2018년 12월 31일 월요일

좋은 해가 되면 좋겠다.


사람 곁에 꼭 붙어서 지내는 고양이 짤이가 뭔가를 보고있다. 아내의 발이다.
지난 달에 아내가 발을 다쳤었다. 병원에 다녀온 후에도 계속 통증을 느낀다고 했을 때에 알아차렸어야 했다. 아내는 웬만한 일로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인데, 내가 그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다른 병원에 가보았고, 그동안 발가락 뼈가 부러진채로 한 달 가까이 지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갔었던 병원에서 엉뚱한 진료를 하고 가벼운 말로 환자를 안심시켰던 것이었다.
발에 깁스를 하고 집에 돌아온 아내의 모습을 보며 여러가지 감정이 오고갔다.
무슨 나쁜 일이 생겼을 때에 아무도 뭐라고 말하지 않는데도 나는 어쩐지 나의 탓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화도 났다가, 생각을 거듭하면 역시 나의 부주의이고 내가 제대로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마음에 우울해지기도 한다.
어제는 아내의 발에 붕대를 다시 감아주면서, 나는 왜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가 하여 힘이 빠졌다.

이제 올해가 하루 남았다.
아버지는 지난번 수술에서 떼어낸 조직을 의사가 검사한 결과, 다시 암으로 의심되는 것이 발견되어 재수술을 하게 됐다. 보름 뒤에 다시 입원을 해야한다. 엄마는 내일 입원했던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지속적인 치료를 위해 몇 가지를 예약하여야 한다.
고양이 이지는 잘 먹고 잘 지내기는 하지만 여전히 약에 의지해야하는 상황이다. 어쩌면 계속 약의 힘을 빌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내는 앞으로 3주 이상 절뚝거리며 다녀야 한다고 했다. 그 기간이 지나도 부러진 뼈가 완전히 아물거나 낫는 것은 아니라고 하니, 한동안 고생스러울 것이다.

악기들을 잘 보관하기 위해 내가 지내는 방에는 언제나 보일러를 잠그고 산다.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다가 문득 내가 손이 시려워서 자주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고양이들은 아내의 곁에 모여서 따뜻하게 자고 있었다. 한 번 내려서 마신 커피가루가 담긴 필터에 물을 데워 부었다. 연하고 맛없는 커피가 한 잔 생겼다.
달력을 한 장 넘긴다고 하여 무엇인가 변해질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래도 해가 바뀌면 가족들 모두의 병이 낫기를 바란다. 봄볕을 쬘 수 있을 즈음엔 모두들 산보도 하고 각자 즐거운 여가를 보낼 수도 있으면 좋겠다.

금세 지나가버린 한 해가 아쉽지도 않다. 조금의 미련도 없기는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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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2일 토요일

인천에서 공연.


올해의 마지막 공연은 인천에서 했다.
짧은 리허설을 마치고 첫끼를 먹었다.
공연은 예정된 시각에 시작할 수 있었다.
지난 밤에 베이스에 새 줄을 감아뒀다. 악기의 상태도 좋았고 앰프 소리도 좋았다. 다만 내 몸이 문제였다. 손가락, 팔목, 어깨, 허리가 모두 아팠다. 진통제를 사먹는 것이 좋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역시 먹지 않기로 했다. 연주를 시작하면 통증은 잊혀질 것 같았다. 두통은 없었으니 괜찮았다.

아버지는 이틀 전에 퇴원했다. 나는 병원에서 닷새를 보냈다. 엄마가 시월 중순에 입원하여 42일만에 퇴원한지 보름만에 아버지가 입원했어야 했다. 아버지는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부모 두 분이 동시에 입원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아픈 고양이 이지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다녀와야한다. 나는 건강보험공단에서 재촉하던 건강검진을 올해에도 받지 못했다. 다음에 하면 될테지.

공연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엔 도로가 막히지 않았다. 음악을 들으며 여유롭게 운전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에 갑자기 자동차의 전조등 한쪽이 꺼지는 것을 보았다. 그동안 양쪽의 전구가 동시에 꺼지는 일은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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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2일 수요일

고된 것.


소박한 일상의 연속이 행복이라고 했다. 전보다 더 마음에 와닿는 말이다.
부모 두 분이 동시에 아픈 일은 남들의 집에도 흔한 일이다. 생색내어 힘들다고 할 일은 아니다. 엄마는 퇴원했지만 앞으로도 절대안정이 필요한 상태이고, 아버지는 또 다른 것이 발견되어 두 번의 수술을 연달아 받아야하게 되었다.
월요일에 이어 오늘도 아버지와 병원에 다녀왔다. 끝없이 막히는 도로를 지나 아버지를 다시 집에 모셔다드릴 때까지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레슨을 위해 정체가 심한 도로 위에서 시간을 보냈다.

컴퓨터로 해야 할 일들을 작업실에서 마무리하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 컴퓨터를 켜지 않고 잠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왔더니 이미 자정이 다 되었다.
그런데 지하주차장 입구에 주차한 자동차들이 가득 있었다. 겨우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더니 온 동네 자동차들이 모두 모인 것처럼 빈틈이 없었다. 이중 삼중으로 주차해놓은 자동차들 때문에 다시 빠져나올 때엔 후진을 해야했다. 거리가 먼 다른 동 앞의 야외주차장에 가봤더니 빈 자리가 많았다. 그곳에 주차를 할 때까지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내일의 날씨를 확인하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경기 중부지역에 눈이 많이 내릴 것이고, 오후부터 더 추워질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그러니까 지하주차장에 멋대로 세워져있는 그 자동차들은 모두, 눈을 피하고 추위를 피하여 모여든 것들이었다.
이기적이고 염치없는 일이지만,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 다 하는 일이니까 죄의식도 없다. '다 그런 것 아니냐'라는 인식, 나는 아직도 여전히 역겹다. 타인의 불편에 신경쓰지 않는 태도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못배우겠다. 그냥 내가 좀 더 걷고, 내가 약간 손해를 보고 마는 것이 낫다.

겨울이니까 춥겠거니 하면 그만일 수준의 날씨라고 하여도, 해마다 추워지면 거리에 살고 있는 고양이들을 걱정한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있는 고양이들 모두 길에서 만나 식구가 되었다. 독한 겨울이 지나가면 언제나 길고양이 몇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다른 몇은 병에 걸려있다. 다시 봄이 되면 살아남은 길고양이들은 소박한 일상의 연속을 잠시 누린다. 모든 생(生)이 아름다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모든 삶이 고되다는 것은 이제 잘 알 것 같다.

긴 하루를 보내고 삶은 고구마 한 조각으로 허기를 채웠다. 식탁에 앉아 식은 커피를 마저 마신 후 올려다 보았더니 고양이 꼼이 냉장고 위에 올라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곁에 모여 앉아 서로를 쳐다보는 고양이들을 한 마리씩 쓰다듬어주고 나는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걸터 앉았다.

내일은 눈이 쌓인 길을 운전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아주 느린 음악들을 미리 골라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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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7일 금요일

연주.


지난 화요일에는 작년 연말에 공연했던 곳에서 다시 연주를 했다. 평소보다 작은 무대, 객석이 가득찬 아담한 공간의 소리가 좋게 들렸다. 무대는 낮았고 관객의 얼굴 높이에 앰프와 캐비넷이 있었다. PA로 나가는 소리와 별개로, 무대 앞쪽의 사람들이 따뜻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연의 절반 이상은 엄지손가락으로 연주했다.

넓고 큰 공간에서 연주할 때의 즐거움도 있지만, 작은 무대에서의 공연은 언제나 좋다. 나는 좁고 작은 클럽에서 음악을 시작했다. 팔을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에 있는 관객들은 손가락이 줄에 닿는 감촉까지 느끼며 음악을 즐길 수 있다.
하고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살고있는 일이 쉽지는 않다. 어깨는 늘 무겁다. 다만 악기를 챙겨 무대에서 내려올 때까지는 잠시 일상의 시름을 잊는다. 더 나이를 먹어도 내가 처음 그랬던 것처럼 작은 공간에서든 어디에서든 자주 연주를 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연을 마치고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에 찬 바람이 모질게 불고있었다. 바람때문에 더 빨리 타버리고 있던 담배 한 개비가 아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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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3일 월요일

더블 앨범.


밴드의 십주년 기념음반이 나왔다.
비닐 레코드로, 두 장짜리 더블앨범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LP였다. 다시 턴테이블을 사용할 계획이 없었었는데...


표지도 좋았지만 음반을 열었을 때에 시원하게 보이는 이 그림이 무척 좋았다. 모두 밴드의 리더님이 크레용으로 그리신 것.

부모 두 분의 병원일들로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드디어 자리를 잡고 들어봤다. 한 곡씩 지나갈 때마다 그것을 녹음하던 날의 풍경이 떠올랐다. 연습실에서의 소음도 기억나고 녹음을 마치고 밤중에 도로를 달려 돌아오던 일들도 생각이 났다.

음반을 다시 자켓에 끼워넣다가 문득, 여전히 그 동작이 손에 배어있다는게 신기했다. 아득히 어린 시절에 매일 했던 동작이었다. 자전거 타는 법을 잊지 않듯 손이 기억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레코드에 그 사이 달라붙은 고양이의 털을 후후 불어 떼어내고 음반을 비닐 포장에 고이 담아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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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2일 목요일

식구.


검은고양이 까미가 우리집에 '제 발로' 들어와 눌러앉아 살은지 두 해가 되었다.
집안을 휘젓고 다니며 종일 까불고, 나이 많은 고양이들에게 달려들어 놀아달라고 조르는 것을 매일 본다. 볕이 좋으면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졸다가 햇빛이 사라지면 이불을 찾아 드러눕는다. 이 고양이가 처음 내집에 들어왔을 때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흘 동안 잠만 잤던 것이 기억난다. 추웠던 그 해 십일월에, 바깥에서 고생을 했었으리라.

고양이 순이가 떠난지 두 해 넉달이 지났다. 검은 고양이 까미는 순이가 하던 짓을 신기하게 재연할 때가 많다. 나는 까미를 보다가 순이 생각을 했다. 까미를 쓰다듬다가 순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한밤중에 내가 자리에 누우면 검은 고양이가 조용히 다가와 내 팔을 베고 나란히 눕는다. 나는 깜박하고 검은 고양이의 이마를 만지며 '순이야', 하고 불러버린 적도 있었다.

다시 겨울이 시작되었다. 겨울동안 내 식구들이 사료를 잘 먹고, 군것질도 적당히 하고, 내가 없는 동안에도 집안에서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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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4일 수요일

퀸과 그 영화.


스팅은 50,000이라는 노래에서 세상을 떠난 록스타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We tweet our anecdotes, our commentary
Or we sing his songs in some sad tribute
While the tabloids are holding a story of kiss and tell
That he’s no longer able to deny or refute’

이 곡은 스팅의 앨범 “57th & 9th” (2016)에 실려있다. 이 음반이 발표될 즈음 뮤지션들의 사망소식들이 있었다. 이 곡은 데이빗 보위와 프린스가 세상을 떠난 시점에 쓰여지고 녹음되었다. 그 즈음 글렌 프라이 (Glenn Frey, ‘프리’가 아니다) 도 죽었다. 앨범이 발표된 이후 겨울에는 레미 킬리미스터 (Lemmy Kilimister) 가 사망했다. 스팅은 ‘rock stars don’t ever die, they only fade away’ 라고 노래한다. 그러면서 ‘타블로이드는 죽은이가 더 이상 부인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그의 성적인 사생활 보도를 계속하는 동안, 우리는 트위터에 우리의 일화, 우리의 해설을 쓰거나 슬픈 추모의 마음으로 그의 노래를 부르지’ 라고 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스팅의 저 노랫말을 떠올리게 했다.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고, 이제 누군가에게는 마음에 오래 남을 좋은 영화로 기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이 영화는 너무 상업적이었고, 그 떠들썩했던 광고만큼 가벼웠으며,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감히 생략해버렸다. 네 명의 밴드 멤버들은 스테레오 타입의 단순한 캐릭터로 변했다. 심하게 말하면 이 영화는 큰 돈을 들인 립싱크, 흥행에 대한 강박이 느껴지는 거대한 카라오케 같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기본적으로 사실에 가깝다. 그런데 그 사실들을 어떤 생각으로 비틀어 엮어놓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읽히고 쓰여진다. 그래서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오독과 오해는 진실과 거리를 둔 평가를 가져온다. 이 영화는 그래서 전기(傳記) 영화가 아니라, ‘실화에 기반을 둔 재연드라마’가 되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미디어의 역할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면 그만일 수도 있다. 이 글은 오랜 팬의 입장에서, 퀸과 프레디 머큐리를 다루는 극영화라면 적어도 이 영화보다는 더 나은 작품이길 바랐던 마음으로 쓰는 푸념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여자친구와 뒹굴다가도 피아노를 연주하던 어떤 천재가 마음 착하고 순한 성격의 세 멤버들을 만나 6분짜리 명곡을 만든 록스타가 되고, 사생활의 문제 등으로 밴드를 버리고 솔로음반을 만들다가 Live Aid 공연 직전에 마치 돌아온 탕아처럼 밴드에 다시 합류하여 록음악사에 오래 남을 전설적인 공연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 되어버렸다. 쉽고, 단순하고, 피상적이다.

1985년 7월 13일의 라이브 에이드 무대의 배경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그리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1984년 1월에 퀸은 13번째 앨범 The Works 를 발매했다. “Radio Ga Ga”와 “I Want To Break Free” 는 큰 성공을 거뒀다. The Works 앨범의 투어는 1984년 8월에 시작하여 다음 해 5월까지 이어졌다. 1985년 1월에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Rock in Rio 페스티벌이 처음 시작되었고, 퀸은 아이언 메이든, 화이트스네이크 등과 함께 그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였다. Rock in Rio 에서의 공연은 영상으로 녹화되어 같은 해 5월에 “Live in Rio” 라는 타이틀의 비디오로 발매되었다. 해를 넘긴 The Works 투어의 일정은 아직 남아있었고, 퀸은 뉴질랜드, 호주와 일본 투어를 계속했다. 이 투어는 4월에 시작하여 오사카를 마지막으로 5월 15일에 끝났다.
프레디 머큐리의 솔로 음반은 4월 29일에 발매되었다. 퀸이 호주 시드니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고있던 중이었다. 멜버른에서의 무대는 조명을 제어하는 컴퓨터시스템의 고장으로 조명도 없이, 폭우 속에서 엉망진창의 공연이 되어버렸다. 닷새 후 이어진 시드니에서의 네 차례 공연까지 마치고 일본으로 날아가 토쿄, 나고야, 오사카의 공연을 했다. 퀸의 멤버들은 모두 지친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두 달 뒤, 런던과 필라델피아에서 16시간 동안 동시에 벌어진 최대의 음악 콘서트 Live Aid 가 열리게 되었다.

퀸은 1982년에 발표한 앨범 Hot Space 를 위한 미국과 일본 투어에서부터 라이브 세션을 도와줄 연주자를 고용했었다. 그는 Fred Mandel이라는 연주자로, 기타와 키보드를 맡아 밴드의 사운드를 보강해줬다. Fred Mandel 은 앨범 The Works 에서 신디사이저와 피아노를 맡았다. 그리고 그는 브라이언 메이가 에디 반 헤일런 등과 함께 했던 Star Fleet Project 에도 참여했다. 이것은 일회성 이벤트의 성격이었고 음반은 “Radio Ga Ga”가 싱글 발매되었던 1983년 11월에 발표되었다. 밴드 멤버의 솔로 음반은 프레디 머큐리가 처음이 아니었고 유일했던 것도 아니었다. 로저 테일러는 1984년 7월에 솔로앨범 Strage Frontier 를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레코딩 세션을 맡은 다른 연주자들이 있었지만 퀸의 멤버들도 함께 참여하여 녹음을 도왔다. 존 디콘은 베이스와 믹싱을 맡았고 브라이언 메이는 “Man On Fire”에서 리듬기타를 쳤다. “Man On Fire”는 퀸의 앨범 The Works 를 위해 녹음되었다가 수록되지 못했던 곡이었다. 이 곡에서 프레디 머큐리는 추가적인 키보드를 연주해줬다.

밥 겔도프는 Live Aid 의 무대에 퀸을 출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퀸이 확답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거의 일년여 동안의 투어로 지쳤기 때문이었기도 했고, 프레디 머큐리의 솔로 음반이 발매된 직후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솔로 음반은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자신의 솔로음반을 홍보하기 위한 프로모션도, 공연의 계획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Live Aid 가 열리기 두 달 전에 끝난 The Works 투어에는 Fred Mandel 의 뒤를 이어 퀸의 라이브 세션 연주자로 참여했던 뮤지션 Spike Edney가 있었다. 그는 Fred Mandel과 마찬가지로 키보드와 기타를 연주했고 코러스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Splike Edney는 바로 밥 겔도프의 밴드 Boomtown Rats 의 전 멤버였다. 그는 Live Aid 의 무대에서도 퀸과 함께 연주했다.
밥 겔도프는 Spike Edney를 통해 프레디 머큐리와 연락을 할 수 있었다. 결국 퀸은 Live Aid 에 참가하기로 결정했고, 출연 약속 시각은 오후 6시 41분이었다.

1985년 7월 13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퀸의 무대는 굉장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솔로 음반에서 싱글 커트된 대여섯 곡의 노래들이 히트를 하고 있었고, 퀸의 미래에 대해 의심하는 가십성 기사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퀸이 무대에 오른 것에 놀라와했고 더욱 반가와했다. 이 이벤트에서 퀸은 웸블리 스타디움의 프라임 타임에 등장하여 밴드의 존재감을 새롭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퀸은 라이브 에이드 쇼를 ‘훔쳐버릴’ 정도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날 퀸의 21분짜리 라이브는 전설로 남아 마땅했다. 자신들의 장비를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출연하는 뮤지션들 모두 무대에 설치되어 있는 오디오 장치와 조명과 PA 들을 그대로 썼다. 똑같은 환경에서 퀸의 무대는 공연장과 TV 앞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그들의 앞 순서는 U2였고, 그들의 뒤에는 데이빗 보위와 The Who, 그리고 엘튼 존이 기다리고 있었다. 뒤에 이어졌던 거물들의 라이브 역시 훌륭했지만, 퀸이 휩쓸어버리고 간 무대 이후 이어진 쇼들은 평범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아직 해가 떨어지기 전의 시간이어서 퀸의 무대는 조명의 효과도 없었던 것까지 고려한다면 아무리 감탄해도 지나치지 않는 무대였다.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은, 이미 그 당시 프레디 머큐리는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고, 그러므로 1986년에 준비되어있었던 밴드의 스타디움 투어를 그 언제보다도 훌륭히 해내고 싶어했었다는 것이었다. 라이브 에이드에서 보여준 밴드의 저력과 인기는 그대로 다음 해의 공연으로 이어졌고, 1986년의 투어야말로 밴드의 전성기라고 해도 좋을만큼 대단했다. 라이브 무대에서 가성을 삼가고 목의 상태를 유지하는데에 신경을 썼던 프레디 머큐리는 적어도 1986년 투어에서는 마치 모든 것을 쏟아내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나중에 알고보니, 성큼성큼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굴하지 않았던 비범한 음악인의 남은 시간들이었다는 것이 팬으로서 한층 더 가슴 아프고 슬프게 여겨졌었다. 1979년에 나왔던 두 장짜리 라이브 앨범 Live Killers 가 앨범 The Game 직전까지의 퀸의 모습을 잘 담고 있었다면, 프레디 사후 발매된 Live at Wembley ‘86 앨범은 밴드와 프레디 머큐리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뮤지션으로서의 프레디 머큐리를 보여주는데에도 모자랐지만 자연인으로서의 파로크 불사라를 묘사하는데에도 부족했다. 그는 적어도 영화 속에서 그려진 것 보다는 훨씬 더 대접받아야 할 가치가 있었다.

1980년 퀸의 앨범 The Game 에 수록되었던 “Another One Bites The Dust” 의 성공은 1982년에 발표한 앨범 Hot Space 를 만드는데에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 마이클 잭슨은 “Another One Bites The Dust”를 통해 퀸과 가까와졌고 밴드가 로스앤젤레스에 들를 때에 자주 만나며 공연장을 찾기도 했다. 앨범 The Works는 로스앤젤레스의 Record Plant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 이것은 밴드의 첫번째 미국에서의 녹음이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 이전까지 하지 않았던 스타일의 음악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나머지 멤버들은 그와 반대로 퀸의 음색이 변질되어버리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었다. 프레디 머큐리가 런던과 뉴욕의 클럽을 다니며 유흥음악으로서의 댄스뮤직과 Funk, 디스코 사운드에 빠져들게 되는 것에 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 그의 개인 매니저 폴 프렌터였다. 나머지 세 멤버들이 폴 프렌터가 프레디 머큐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매우 싫어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네 사람 모두 영리하고 재능이 넘치는 뮤지션들이었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조금 더 특별했다. 그는 오페라와 지미 헨드릭스, 70년대의 록 사운드와 흑인음악과 성공회 교회의 찬송과 페르시아 문화권의 민요까지 몸안에 담고 있었다. 그는 펑키와 디스코, 클럽의 댄스음악을 새롭게 탐구하고 싶어했다. 완벽주의자로서 좋은 음악이라면 무엇이든 가져와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고 싶어했다. 애정행각과 사치스런 파티, 그리고 폴 프렌터의 천박한 의도와는 별개로 그 과정은 프레디 머큐리라는 음악인에게는 중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The Bird (1988) 와 대비하여 생각하게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재즈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미국의 근현대사, 그리고 찰리 파커라는 인물에 대한 진중한 탐구를 그대로 영화에 옮겨주었다. 그런데 The Bird 처럼 영화를 만들면, (단지 음악이 비밥재즈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기 어렵다. 진중함과 깊이를 포기하는 대신 드라마와 로맨스, 자극적인 즐거움을 선택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어할 수 있는 영화를 판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뒤의 것 - kiss and tell 에 집중했다.

예를 들어 “Bohemian Rhapsody” 라는 곡이 영화에서처럼 특출난 재능을 가진 밴드의 리드보컬이 순박한 멤버들을 부리며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전작인 앨범 Sheer Heart Attack 을 통해 보컬 오버더빙과 오페라틱 구조의 song structure 를 더 공부할 수 있었던 밴드의 힘이었다던가, 관객들과 주고받는 보컬 임프로비제이션이 “Now I’m Here” 의 라이브에서부터 꾸준히 진화하고 변화하여 프레디 머큐리의 중요한 무대 연출 중 하나가 되었다던가, 프레디 머큐리의 뮤지션으로서의 면모는 단지 비범한 보컬 뿐 아니라 그의 출중한 피아노연주였다… 등의 이야기를 아주 짧은 인서트 정도만 삽입하였어도 영화적으로 잘 전달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모두 집어넣었다면 영화는 복잡해지고 사람들은 지루해했을지도 모른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어쨌든 위대했던 록밴드를 다시 소환하는데에 공헌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데에는 영화 자체보다도, 자신들이 위로받고 행복해했던 음악들과 그 음악을 만든 그룹 퀸에 대한 애정이 오래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뉴욕타임즈에 록음악 비평을 쓰는 A.O. Scott 은 이 영화를 소개하며, “유튜브와 레코드를 보고 듣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그의 의견에 매우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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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일 금요일

TV Live Show.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서 공연을 했다.
TV 생방송인줄을 하루 전에 알았다. 그리고 완공된지 몇 년이 지난 그곳에 나는 처음 가보았다.
전날 리허설을 할 때에도 뭔가 순조롭고 좋은 기분이었다. 생중계로 준비된 공연이었는데 음향과 진행 등이 모두 좋았다. 모든 것이 잘 되어있어서 어쩐지 생경한 느낌이었다는 것이 우스웠다. 원래 다 그래야 하는 것 아니었나 싶어서.

요즘 어머니의 병간호 때문에 밤마다 병원에서 보내고 있는 중이다. 무대 위에서 뭔가가 불편했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악기연습을 충분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인줄 알았다. 곡이 계속 진행되면서 불편했던 이유가 어깨와 허리 통증 때문인 것을 알게 됐다. 그러고보니 몸과 마음이 편했던 적이 아주 오래 전의 일처럼 여겨졌다.

더 많이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 연말까지 남은 공연은 두어개 뿐이다. 엄마가 회복하시고 가족들이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면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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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경험.

5년 전 여름날, 장모님이 크게 다치셨다. 여러군데 중요한 수술을 받고 긴 입원생활을 하셨다. 퇴원 후에도 한동안 간호가 필요하셨다. 나와 아내는 아예 우리집에 모셔서 가을까지 함께 계시도록 하였다. 아내는 전력을 다해 어머니의 병간호를 했다. 집안의 고양이들은 누워계신 노모 곁에 또아리를 틀고 함께 자고는 했다.

지난 주에, 이번에는 내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와 그대로 입원, 장기적인 치료가 불가피하게 됐다. 나는 매일 밤과 아침을 병실에서 보내고 일하러 갔다가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아내와 내가 함께 겪었던 몇년 전의 일이 경험이 되어, 서로 주고받는 말도 필요없이 각자 알아서 대처하고 있다. 아내와 동생은 혼자 있는 아버지를 챙겨드리거나 낮시간에 엄마의 간호를 맡았다. 나는 (원래 야행성이기도 하니까) 밤부터 아침까지 엄마의 병실을 지키고 있다.

살면서 함께 어떤 일을 겪어내면, 그렇다고 하여 마음이 심드렁해지는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눈앞에 닥친 비슷한 일 앞에서 크게 당황하지 않게 된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에 '이것은 전에도 비슷하게 겪어봤잖아' 라는 생각을 하게 된 후, 정서적인 최소한의 편안함은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지금보다 젋거나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기 싫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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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7일 일요일

산책.


자전거를 타고 나가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가 계속 되었지만, 나는 휴일이 아니면 시간을 낼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휴일이었으나 볕이 남아있을 때에 몇 시간 정도 달려보고싶었다.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데 길에 사람과 자전거들이 너무 많았다.
사람이 많지 않은 식당을 찾아 자전거 도로를 벗어나 조금 더 달렸다. 겨우 찾은 식당은 사람도 반찬인심도 붐비지 않는 곳이었다. 반찬을 더 달라고 부탁하면 작은 종지같은 접시에 꼭 두 개씩만 새로 담아줬다. 세 번 더 달라고하기엔 눈치가 보였다.

배를 채우고 해가 저무는 집쪽을 보며 잠시 앉았다가, 준비해온 외투를 걸쳤다. 이제 머지않아 추워질 것이다. 올 겨울에는 옷을 껴입더라도 자전거를 계속 타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몇 해 전 겨울에는 그만 입김이 마스크 안에서 얼어붙어 덜덜 떨면서 집에 돌아왔었다. 덜 추운 겨울이 오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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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7일 월요일

그 때 그 곳.


페이스북 덕분에 연락을 하고 지냈던 주엽형의 초대로 내가 졸업한 학교에 갔었다.
학교의 홍보를 위해 쓰이는 일이라고 하여 두말없이 가겠다고 대답하고, 시간을 내어 다녀왔다. 어색한 사진 몇 장을 찍고 주엽형과 마주 앉아 인터뷰를 하였다. 사실 그것은 좋은 핑계였고, 기회삼아 옛 학교에 가보고 싶었다. 25년만에 가보는 곳이었다.

눈에 익은 길이 나왔을 때에 갑자기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기억은 혼재되기 쉽고 나는 워낙 시간의 앞과 뒤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가끔 떠오르던 골목길이나 좁은 거리가 어디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었다. 바로 내가 다녔던 학교 앞이었다.

주엽형의 연락으로 태우형과 광장형도 만났다. 함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다른 장소에서 약속하지 않고 학교로 갔던 것은 잘한 일이었다. 엄혹했던 시절, 야만스러움이 아직 씻겨지지 않았던 사회의 분위기는 학교라고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오늘 만났던 형들은 모두 젊은 투사들이었고 자신을 던지며 부당한 일들에 맞서 싸웠었다. 그 틈새에서 늘 이어폰이나 귀에 꽂고 다니며 음악을 할 생각만 했던 나를 이해해주고 오히려 배려해줬던 사람들도 그 형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공적으로 사적으로 빚을 졌다. 그런 부채의식은 평생 지속된다. 굳이 갚으라고 하는 사람은 없는데도.

오래된 건물의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 새로 생긴 길을 오고가는 학생들의 모습은 분주해보였다. 제법 굵어진 나무 한 그루, 매점으로 쓰였던 낡은 건물의 벽돌들도 모두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늦여름의 햇빛은 따뜻했고 그늘 아래에서 부는 바람은 시원했다.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았다. 기억하고 있는 일들은 너무 흐릿했다. 낯익은 장소에서 느껴보는 생소한 기분들이 돌아다녔다. 떠올랐던 것들을 써두고 싶었는데, 몇 번 시도를 하다가 그만뒀다. 서로 맞춰지지 않는 조각들같은 생각들이었다. 기분과 느낌은 그것대로 지니는 편이 나을 때가 많았다. 따뜻한 햇빛과 선선한 바람을 기억해두자, 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는 잘 기억할 수 있다.

집에 돌아올 때엔 일부러 국도를 타고 느릿느릿 운전했다. 꼬불거리는 도로 위에 차들이 없었다. 조용한 오후였다. 함께 와준 아내와 함께 오랜만에 한적하고 고즈넉한 드라이브를 했다. 컨테이너로 꾸민 커피집을 발견하고 멈춰 서서 찬 커피도 한 잔 사서 마셨다.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왜 나는 그 형들과 사진 한 장 함께 찍어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자신의 모습을 담는 사진을 찍는 일에 무감하다보니 아쉬운 한 컷을 얻어놓지 못했다. 이제 사람을 만나면 함께 사진 찍어두는 일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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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5일 토요일

춘천 공연.


오랜만에 잘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가뿐하였다.
미리 챙겨둔 짐들을 들고 일찍 출발했다. 커피를 가득 담아 운전하며 마셨다.
일찍 도착하여 주차를 하고 공연장 부근에 있는 수제햄버거집에서 햄버거와 콜라를 먹었다.
리허설을 마친 후에는 긴 대기시간 동안 멤버들과 근처 커피집에 모여 앉아 한적하게 잡담도 나눴다.

대화 중에 민열이가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던 이야기를 했다. 그 바람에 각자의 군복무 시절 얘기가 이어졌다. 나는 무슨 말을 보태려다가 그냥 삼켰다. 춘천은 내가 근무했던 고을이었다.
그동안 춘천에 와서 공연을 여러번 했다. 제대 이후 처음 악기를 들고 춘천에 다시 왔을 때엔 기분이 묘했었다. 내 기억 속의 춘천은 밤샘과 야근, 고생스런 훈련, 음악을 듣고 싶어 외출시간 내내 쏘다녔던 중앙로터리 부근 골목길의 냄새들이었다. 2006년에 광석형님과 공연하러 왔던 여름이 기억났다. 몇 년 후부터는 지금의 밴드와 함께 공연을 하러 왔다. 그 후 춘천에서 녹음을 하기도 했고 콘서트를 하기도 했었다. 간혹 누군가들의 세션을 하기도 했다. 오랜 친구들과 블루스 공연을 하러 이곳에 왔던 것이 불과 작년 11월이었다. 그것들이 모두 무척 오래된 일인 것처럼 여겨졌다.

오늘은 그런 감상들은 희미해지고 근화동 공지천 앞 습한 공기를 들이쉬며 줄곧 악기 생각만 했다. 짧은 공연이지만 시작 전에 연습을 하고 싶었었다. 한쪽 손목에 다시 통증이 생겨서 어제 하루는 악기를 손에 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기실은 무대 뒤 천막이었고 그곳은 대화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란했다. 이어폰을 연결할 수 있는 연습용 장치를 굳이 구입해야 좋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감정의 대부분들이 무뎌지고 시큰둥해진 느낌. 설레임도 불편함도 없는 기분이었다.

연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에는 일부러 46번 국도를 타고 느리게 운전하며 음악을 들었다. 처음에는 팟캐스트를 틀어놓았다가 누군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피로해졌다. 가로등이 꺼져 어두운 곳이 많았다. 습한 기운에 앞유리에는 김이 서렸다. 새로 나온 옐로우자켓의 음반과 피아니스트 Shaun Martin 트리오의 앨범을 들었다. 집앞에 도착할 무렵에는 루빈스타인이 연주한 쇼팽을 듣고 있었다. 차분한 토요일을 보낸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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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3일 목요일

일상.


오전에 볕이 가득한 베란다 창가에는 고양이들이 모여 자리를 잡고 햇빛을 쬔다. 그늘이 움직이면 자다가도 슬며시 움직여 볕이 드는 바닥이 좁아질 때까지 쉰다.
그루밍을 하고 하품도 하다가 창밖으로 새라도 날면, 꼭 해야할 일이 생긴 것처럼 일제히 귀를 쫑긋한다. 그러나 그것 뿐, 잠시 잠을 깬 고양이들은 먼지 없는 하늘을 보다가 아래쪽에 지나다니는 사람과 자동차를 구경하며 오전을 보낼 때가 많다.


집안의 고양이들은 함께 무더운 여름을 또 한 개 지나보냈다. 계절은 갑자기 변하고 세월은 나는 듯 달려간다. 까망이 막내 고양이는 꿈이라도 꾸는지 잠꼬대를 하며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고양이들의 위치를 모두 확인하고, 밤중에 돌아올테니 집안의 불 하나는 켜두었다. 그릇에 사료와 물을 채워주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 신발은 현관문 밖에서 신었다.

6번 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달려가는 아침, 차창을 열었더니 바람이 찼다.
이제 곧 완전히 가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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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2일 수요일

고양이 가족.


월요일에 자동차를 수리하는 동안 대기실에서 서성거리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정비공장에 이웃한 집의 기와지붕 아래로 무엇인가 보여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고양이들이 볕이 드는 곳에 푹신한 낙엽을 침구 삼아 곤히 자고 있었다.


어린 고양이 둘은 서로 부둥켜 안은채로, 엄마로 보이는 고양이는 곁에서 혼자 웅크린채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슬레이트 담 건너에는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는 소리,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 다양한 엔진소리들이 소란했는데 고양이들은 나뭇잎 사이로 지나는 바람소리를 벗삼아 쿨쿨 자고 있었다. 엄마 고양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어려보였고, 아기 고양이들은 살이 토실토실하였다. 다행히도 잘 먹고 잘 자며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머물던 세 시간 동안 고양이들은 자세를 바꿔가며 자기도 하고 엄마 고양이는 잠시 자리를 비우기도 했었다. 그 작은 공간만큼은 고양이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편안하고 따뜻한 집으로 보였다. 일생동안 그들이 그렇게 평화로왔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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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1일 화요일

울주 공연.


긴 하루였다.
이른 아침에 출발할 때에 자동차의 엔진오일이 부족해져있는 것을 알았다.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먼 거리를 달려 약속시간 전에 도착하려면 지금 꼭 출발을 하여야 했다. 일단 운전을 시작하며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중부내륙고속도로의 한 휴게소에 경정비업체가 있었다. 그곳에 들러 우선 부족해진 엔진오일을 보충했다.
리허설을 마치고 다시 자동차의 시동을 걸어보았다. 보충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일이 더 이상 줄어들지는 않았다.

계속 그것을 신경쓰다가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다.

공연이 시작되고, 잠시 엔진오일이나 자동차에 대한 생각은 잊을 수 있었다.

원래 하루를 자고 다음날 집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어서 그 주변의 정비공장도 문을 열지 않는다고 했다. 공연을 마친 후 곧장 집으로 출발했다. 자동차의 계기판에는 오일이 부족하다는 경고등도 들어오지 않았고, 달리는데에도 이상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여 주차를 마친 후에야 마음이 편해졌다. 그날 하루동안 열 시간 반을 운전했다.

월요일에 정비업체에 가서 수리를 받았다. 필요한 소모품을 교환했고 이상이 있었던 오일팬과 필터들을 바꿨다. 일년만에 브레이크패드가 모두 닳아있었다. 그것도 교환했다. 자동차의 전체 주행거리는 21만 3천 킬로미터가 되었다. 내가 정말 운전을 많이 했구나, 생각했다.

울주에서의 공연은 즐거웠지만, 그보다 긴 시간 운전을 하며 들었던 음악들이 더 기억에 많이 남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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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3일 월요일

합주.


그 이전에 세션을 했던 기간은 빼고, 밴드 이름으로 함께 해온지 십 년이 되었다.
그동안 어떤 곡들은 백번, 혹은 그 이상은 연주해본 것 같다.
공연을 앞두고 항상 다시 처음부터 새로 합주를 하는 일은 기본이고 일상이다. 십여년 동안 수 없이 많이 연주해본 곡들이지만 언제나 새삼 새롭다. 그리고 세월과 함께 달라진다. 그런 것은 매번 신기한 기분이 든다.

이틀 전에 부모님의 일을 돕느라 몇 시간 밭일을 했는데, 삽질을 하던 중에 어깨에 통증을 느꼈다. 합주하는 동안 내내 어깨와 팔꿈치에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학교 개강과 함께 운동을 하지 못했던 탓일 것이다.

합주를 마치고 악기를 정리하면서 지난 십여년 동안 연주했던 몇몇 장면이 기억났다. 몹시 추운 겨울 눈을 맞으며 야외에서 연주할 때엔 왼쪽 손에 장갑을 낀 적도 있었다. 폭염이었던 여름날 공연을 마친 후에는 악기에 흘러내린 땀이 하얗게 굳어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초가을 날씨일 주말과 그 다음 주에 야외공연들이 약속되어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주면 소리가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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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31일 금요일

왕머구리.


낮에 밭에서 살이 통통하게 찐 참개구리를 만났다.
묵직해 보이는 몸집으로 한 번에 멀리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귀여워서 따라가 보았더니 개구리는 잎새 사이에 앉아있으면 자신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인지,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나도 가만히 앉아서 더 지켜보았다면 좋았을텐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바람에 그만 개구리가 멀리 뛰어서 가버렸다.

왕머구리라는 이름은 누군가의 소설에서 배웠다. 그런데 작가도 작품도 잊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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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9일 수요일

형, 동생.


나이가 제일 많은 하얀 고양이가 바구니에 들어가서 잘 자고 있었다.
제일 어린 까만 놈이 굳이 그곳에 비집고 들어가더니 자리를 빼앗아 앉았다.
늘 함께 놀아주는 큰 고양이도 고맙고 동생처럼 어리광부리며 잘 놀고 있는 막내도 귀엽다.
나란히 바구니에 앉아 있으니 정말 형, 동생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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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7일 월요일

꽃 냄새, 바람.


폭염을 잘 견디고, 고양이가 이른 아침 창가에서 꽃 내음, 바람 냄새를 맡고 있었다.
어린 고양이에게는 태어나서 가장 더운 여름이었을 것이다.
조금 선선해지니 고양이는 다시 칭얼거리며 마주칠 때 마다 놀아달라고 조른다.

2018년 8월 18일 토요일

음의 높낮이.

악기의 튜닝을 440 Hz 로 해두고 있는 것은 일종의 약속일 뿐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라' 라고 하는 A 음의 높이가 정해져있었을 것 같지만 그것이 지금의 440 Hz 로 약속된 것은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1950년대 이후 레코드 업계라는 것이 범지구적으로 발전한 다음부터 대중음악에서는 440 Hz 에 A 음을 맞추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A 음을 432 Hz 로 튜닝하여 연주하는 것에 대한 갑론을박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왔다.
440 Hz 보다 32센트 낮게 조율하여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에 대한 장점과 단점들이 많은 증거와 논리로 설명되어왔는데, 가끔 그런 글과 주장을 접하고 있어도 나는 뭐가 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역사로, 어떤 이는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하고, 누구는 종교처럼, 어떤 경우에는 명상이나 심리학을 들어서 432 Hz 로 조율한 음악이 훨씬 더 인간에게 이롭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자연에 더 가까운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도 하고 수학적으로 정확한 비율이므로 음의 주파수가 보다 더 음악적이라고도 했다. 물의 진동과 같기 때문에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고도 하고 심지어 건강하게 해준다고도 했다.

그런 것은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했던 것처럼 인간이란 그것이 신비로울 수 있다면 뭐든지 창작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작가적 능력을 지닌 동물인 것이다. 피라밋의 비율이 현대의 생활에 은연 중 숨어들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신문가판대의 가로 세로 치수를 재어 복잡한 수식을 새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복잡할수록 좋고 알 수 없을수록 신비롭기 때문에 뭔가를 믿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쉽다. 그런 것에 한쪽으로만 경도되기 쉬운 것이 바로 사람이고, 그러므로 종교와 다단계 판매업에는 불황이 없다.

최근에 밴드 공연을 앞두고 밴드리더님이 진지하게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하는 곡들에 한하여 432 Hz 로 바꾸어 해보고 싶다는 제안을 하였다.
살다보면 크고 작은 우연을 겪는데, 이번에도 그러했다. 우리는 그 이전에 이것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음악의 튜닝을 바꾸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442 Hz 로 연주한다고 하면 그것에 맞추면 되고, 콘서트홀의 피아노가 443 Hz 로 튜닝되어 있다고 하면 그것에 맞춰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노래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약간의 피치 간격도 민감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나처럼 귀가 바보인 베이스 연주자에게는 그냥 조금 높거나 낮거나의 차이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음의 높이가 다르니 기분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겠지 뭐,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침 내 컴퓨터가 수명을 다 하여 멈춰버리는 일이 생겼고, 나는 새 아이맥을 구입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새 매킨토시 컴퓨터에서는 더 이상 그 유명한 매킨토시 시동음 Startup Chime 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그 사실을 알고서는 분한 마음도 있었다.
맥을 켠다는 것은 그 시동음을 듣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컴퓨터에 전원을 넣고 오에스를 부팅한다는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고 떼를 쓰고 싶었다. 좀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 음은 수십년 동안 맥 유저들이 듣고 있었던 친숙한 음악이었고 유대감을 느끼게 해주는 합창이었다.
그 시동음은 묘했다. 단지 단순하고 짧은 화음일 뿐인데 언제나 듣기 좋았다. 기계에서 나오는 음이라기엔 따뜻했고 어딘가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소리였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긴 부팅시간을 기다리기 직전에 들을 수 있는 수업 종소리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없다면 맥이 아니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상징적인 소리였다.
스티브 잡스가 살아있었다면 아무리 오에스의 작동 방식이 달라졌다고 해도 없애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건 좀... 동의하기 어렵다. 뭔가를 없애버리는 것을 제일 잘 하던 사람이 그 사람이었으니까.

그 매킨토시의 시동음이 바로 432 Hz 튜닝이었다.


432 Hz 에 관한 다양한 주장과 논박에 대해서는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고 아직도 큰 관심은 없다. 그러나 맥의 시동음 만큼은 내 인생 속에서 큰 의미를 지닌 소리였다.

공연을 앞두고 합주를 할 때에 나는 뭔가 진지한 기분으로 베이스를 432 Hz 로 튜닝했다. 긴 시간 합주를 했지만 그날은 무엇이 다른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지난 주 토요일, 부산에서 공연을 할 때에 우리는 공연의 전반부를 432 Hz 로, 후반부의 일렉트릭 사운드는 440 Hz 로 연주를 하였다. 공연을 하고 있을 때에는 미처 잘 알지 못했다가, 공연을 마친 후에서야 비로소 오늘의 연주가 이전의 것과 뭔가 달랐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멤버들끼리 그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경험을 나누었다.

그것 역시 단순히 음 높이가 조금 낮아졌기 때문이니까 그런거지, 라고 해버리면 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독특한 경험이었다.

집에 돌아와 존 레논의 Imagine,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 메탈리카의 Nothing Else Matters 와 너바나의 Come As You Are 를 들어보았다. 모두 432 Hz 튜닝으로 녹음된 음악들이었다.
다시 들어보아도 역시 나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워낙 좋은 노래여서 편안한 것인지,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친숙한 것인지, 듣기 좋은 이유가 과연 조율한 음의 높이 때문인지 나는 단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결론은 잘 모르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제는 사라져버린 매킨토시의 시동음은 언제나 나를 기분좋게 해줬었다.
그리고 지난 주말의 공연 중 그 튜닝으로 연주했던 시간은 이전의 연주보다 따뜻하고 편안했었다. 어떤 음악은 특정한 튜닝이 더 편안할 수도 있고 어떤 음악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 경험하기 전에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던 일이다.




아쉬우니까, 맥의 시동음을 파일로 여기에 저장해둔다.


Mac Startup Ch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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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4일 화요일

이름.

2009, Kimchangwan Band
공연을 마친 후 숙소에서 멤버들이 둥글게 모여 앉았다. 이야기 도중에 밴드 리더님의 오래된 기타가 화제에 올랐다.
그 기타는 미국에서 1990년에 만들어진 Hamer 기타였다. 8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에서 저가모델로 만들어졌던 Hamer 기타도 있었다.

from Pinterest.com
이 기타회사는 1973년에 처음 시작하여 깁슨, 펜더와도 인연이 많다. 나름 한 시대의 정점을 찍었던 기타이기도 했다.

이야기 도중에 리더님은 계속 이 기타를 '헤이머'라고 불렀고, 나는 '해머'라고 말했다. 사진을 검색해봤다면 제대로 된 발음을 쉽게 알 수 있었을텐데 나는 이 기타의 이름을 Hammer 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충전 중이었던 아이폰을 가지러가기 귀찮아서 '아, 헤이머가 맞는건가' 하고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 생각이 나서 검색을 해보고 자료를 찾아봤다.
새로 알게 된 것은 사람의 surname 인 Hamer는 '하이머' 정도로 발음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문제를 두고 미국인들의 게시판에서도 질문과 대답이 오가고 있었다. 이런 경우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면 되는지 알려주면 간단하게 궁금한 것이 풀린다. 아니나 다를까 몇 개의 게시판에서 Hamer 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여 발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심지어 기타 회사의 설립자인 Paul Hamer 를 만났을 때에 직접 물어봐서 알게 되었다는 글도 있었다.

덕분에 이 기타와 이 이름을 '하이머' 라고 부른다는 것을 배웠다. 잊어먹지 않을 것 같다.

외국의 이름을 우리말로 가져와 편하게 발음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요즘은 아무도 Fender 를 '휀다'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펜더'라고 말하면서도 그 기타의 메이커가 'Fender' 인줄을 잘 안다. 검색창에는 '펜더 기타', '펜더 재즈베이스'라고 입력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상호 소통을 할 수 있다. '펜더'는 'Fender' 와 같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음악하는 사람들이 서로 '펜더'라고 말한다고 하여 뚜쟁이를 뜻하는 'Pander' 를 연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펜더'라는 말은 우리말 속에서 자연스런 기능을 한다.

그런데 독일의 기타와 앰프 회사인 Hughes & Kettner 는 한글 웹페이지에서 거의 대부분 '휴거스 앤 케트너'라고 말하고 쓴다. 양보하여 생각한다고 해도 '휴게스'가 아니고 왜 '휴거스'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Hughes 역시 사람의 이름이기 때문에 '휴-즈' 라고 발음해줘야 한다. 딥 퍼플에서 베이스를 연주하고 보컬도 맡았던 Glenn Hughes 역시 '글렌 휴즈'라고 말해야 맞다. 영화 감독 형제인 Hughes Brothers 나 맨체스터의 록커 Gary Hughes 의 이름들도 모두 '휴즈'라고 해줘야 옳다. 한글 검색으로 '휴거스 앤 케트너'라고 입력하면 유연한 검색어를 지원하는 구글에서도 '휴즈 앤 케트너'로 바꿔서 검색해주기 어렵다. 지금 구글이 굳이 옳은 발음으로 고쳐주고 있지 않는 이유는 이미 '휴거스 앤 케트너'라고 입력하여도 한글 자료에서는 무수히 많은 Hughes & Kettner 가 찾아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휴즈 앤 케트너'라고 검색하면 검색결과가 덜 나오게 되고 있는 실정은 뭔가 우습기도 하고 바보같기도 하다.

뛰어난 테크닉과 즉흥연주를 보여주는 베이스 연주자 Hadrien Feraud 의 이름은 '애드리안 페로'로 발음해줘야 하지만, 역시 한글 검색에서는 대부분 '헤드리안 페라우드'라고 나타나기 십상이다. 유튜브에 있는 영상을 찾아보면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이름에 있는 H 를 굳이 발음하는 것 같다. 성이라도 원래대로 불러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사람의 이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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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1일 토요일

공연 여행.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하루를 자고 왔다.
아침 일찍 서울역에 가서 주차를 하고 부산역에 도착하면 자동차에 실려 공연장으로, 리허설을 마친 후 옷을 갈아입고 잠시 앉았다가 곧 공연... 이런 루틴은 언제나 똑같다. 공연 후에는 늦은 저녁을 먹고 다음 날 거꾸로 순서를 밟아 집으로 돌아오는 패턴도 항상 같다.
그러니까 이런 것도 여행이라고 말하기에는 군색하다.

무덥고 습한 날씨였다. 하지만 그늘이 없는 야외공연이 아니고 에어컨이 가동 중인 실내공연이었기 때문에 더웠다고 불평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공연 후에 혼잡한 상황에서 잠시 정신을 놓았다. 새 건전지를 넣어둔 보스 튜너를 그만 그곳에 놓아두고 와버렸다. 집에 돌아와 가방을 정리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됐다. 언제나 흘리고 분실하고 다시 사기를 반복한다. '내가 그렇지 뭐.'


바다를 보며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재떨이가 마련되어 있어서 눕듯이 앉아 담배도 피웠다.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생기니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많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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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9일 목요일

컴퓨터를 바꿨다.


어제 아침에 컴퓨터의 스위치를 눌렀더니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팅 도중에 멈춰버렸다.
그 후 몇 번 같은 동작을 반복한 뒤 아예 켜지지 않게 되었다.
완전히 멈추기 전에 유닉스 명령어로 확인한 것은 디스크를 포함한 여러가지 에러였다.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줄지어 나오더니 그나마 reboot 명령도 듣지 않았었다. 역시 지난 번 고장을 일으켰던 것은 기계가 마지막 안간힘을 써보았던 것이었나 보다.



예정에 없던 지출을 해야했다. 만 하루 동안 다른 방법들을 시도해보다가 역시 새 맥을 구입하는 편이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공부해야할 것들을 찾아서 여러 번 읽고, 매장에 가서 새 아이맥과 필요한 어댑터들을 구입해왔다.

타임머신으로 새 맥에 자료를 옮기고, 등록된 프로그램들 마다 새 컴퓨터를 인증해주는데에 네 시간이 걸렸다. 목과 허리가 뻐근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고양이 이지는 곁에서 책을 베고 잠들어있었다. 숨소리가 고르고 편안하게 들렸다.

커피를 한 잔 더 만들고 싶었는데 고양이들이 잠에서 깰까봐 나는 그냥 물을 마시고 창문 앞에 잠시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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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8일 수요일

좋은 사람들.







좋은 사람 두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아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계속 마음이 좋지 않다.
빈 자리가 크게 느껴진다는 말이 와서 닿는다.
올 여름도 나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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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7일 화요일

열 살 차이.


고양이 둘은 열 살 차이가 나는데, 단짝 친구처럼 자주 함께 논다.
어린이는 응석을 부리고 어른 고양이는 예민하다.
둘이 함께 더운 햇빛을 받으며 쉬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 손을 뻗어 고양이들을 쓰다듬어줬다.
뜨거워진 타일 바닥이 고양이들이 내는 그르릉 소리로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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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일 목요일

페달들.


몇 년 사이에 어떤 것은 없애고 어떤 것은 새로 구입하고 어떤 것은 팔아버렸다가 다시 샀던 것들도 있었다.
들고 다니기 위해 정해진 보드 위에 배열을 하려고 바닥에 앉아 애를 썼다.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페달보드를 더 넓히긴 싫고, 그렇다고 두 개를 만들 수는 없었다. 뭐 그렇게 대단한 걸 한다고 무거운 것을 몇 개씩 들고 다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페달들을 가지고 신경을 쓰다보면 역시 그냥 가벼운 멀티이펙터 한 개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할 때가 아직도 있다.

다가오는 공연을 예상하며 보드 위에 아홉 개의 페달들을 붙였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것을 다시 떼어내어 두 세 개만 가방에 챙겨 넣었다. 며칠 후 공연 합주를 할 때에 써보고 당분간은 그때마다 필요한 것만 지니고 다니며 쓰는 것이 낫겠다. 또 원래대로 돌아와버렸다. 연말 공연 즈음에 한 번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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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0일 금요일

까만 고양이.


내가 사는 집은 낮에는 햇빛을 잔뜩 받아 덥고 밤에는 개천과 강물 덕분에 습기가 가득하다.
이렇게 더운데 까만 고양이는 언제나 내 곁에 바짝 붙어서 지낸다.
내가 집에 오래 머물고 있으니 좋아하는 것 같다.
잠을 자다가 푹신한 것이 느껴져서 깨어나보면 언제나 까만 고양이가 있다. 내 다리를 껴안고 자거나 발목을 베게삼아 베고 잔다. 며칠 전에는 꿈에서 구덩이에 발이 빠져 애를 먹었었다. 고양이가 베고 자는 바람에 발이 저렸었던 것이었다.

두 해 전 11월 말에 나와 아내는 아파트 현관 앞에서 이 어린 고양이를 만났다. 꽤 추운날 밤이었다. 고양이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더니 작고 까만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고양이는 남은 힘을 다해서 더 크게 울며 다가왔다. 고양이는 우리들의 바지춤과 신발을 움켜쥐고 떨어지려 하지 않았었다.

고양이를 안고 집으로 들어와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먹을 것을 내어줬다. 하지만 무려 사흘 동안 고양이는 물과 사료를 먹지도 않고 쿨쿨 잠만 자고 있었다.
어린 고양이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 다음 고양이를 씻기고 털을 말려주었더니 갑자기 집안의 고양이 사료 그릇을 돌아다니며 비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고되고 배고팠었으면 그랬을까 하여 안스러웠다.

까만 고양이 까미는 우리와 만났을 때부터 한쪽 귀가 꺾여 있었고 한쪽 다리는 부러졌던 흔적이 있었다. 고양이 자신으로서는 누구라도 붙잡고 '나를 좀 키워라'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혹시 하필 그날 밤 늦게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우리와 만나게 될 줄을 알고있었던 것일까.

고양이들과 살면서 처음으로 털을 깎아줬다. 조금이라도 덜 더워할까 하여 얼굴만 남기고 이발을 했다. 침대에 새 이불을 깔았더니 까미는 새벽부터 낮까지 이불 위에서 뒹굴며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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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9일 목요일

능내역.


낮에 너무 더웠기 때문에 해가 질 무렵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밤이 되기 전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몇 주 전에 자전거를 정비받은 이후 야간용 라이트를 다시 부착하지 않았다. 이쪽은 가로등이 없는 구간이 많아서 불빛이 없으면 밤중에 자전거를 탈 수가 없다. 돌아올 때엔 서둘러야 했다.

능내역까지만 갔다가 잠시 앉아서 물을 마시고 돌아왔다.
해가 저무는 길 위에는 하루살이와 잠자리와 풍뎅이처럼 보이는 뚱뚱한 벌레들이 잔뜩 날고 있었다. 하필 고글도 마스크도 쓰지 않았다. 달리는 동안 작은 벌레들이 입과 코에 들어왔다. 하루살이 한 마리가 왼쪽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괴로왔다. 집에 돌아와 눈꺼풀 밑에서 벌레를 발견하여 꺼냈다.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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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6일 월요일

꽃.


볕이 뜨거웠고 흙에서는 사우나처럼 열기가 올라왔다.
꽃들이 알록달록하게 피어있었다.
나는 그 꽃들이 저절로 피어난 줄 알았다. 알고보니 모친이 씨를 뿌려놓았던 것이었다.
꽃들 사이로 부지런한 벌들이 붉은 주머니를 한 개씩 차고 바쁘게 돌아다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야 뒤늦게 꽃들에게 물이라도 뿌려주고 올 것을 그랬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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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3일 금요일

오랜만에.


비가 그쳤으니 오늘이 딱 좋은날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오랜만에 자전거를 가지고 나갈 준비를 하려니 여러가지가 서툴었다. 타이어에 공기를 채우는 데에도 오래 걸렸다.

강을 따라 달려 팔당교 아래에 섰다. 기온 때문인지 자전거 때문인지 옷이 젖도록 땀이 났다.
팔당교 밑 벤치에 앉아서 물을 마셨다. 이 년 반만에 이 자리에 나와 앉아 본다.

자전거를 사고 한참을 미친듯 타고 다닐 때가 있었다. 나는 무척 즐거워했다. 매일 자전거를 탔고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모두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얼굴에 부딪는 바람, 풀냄새와 강비린내, 자전거 바퀴가 바닥을 지나는 소리들이 모두 기분좋게 느껴졌었다. 나는 최소한 그 몇 해 동안 자전거를 타는 순간만큼은 행복해했다.

그리고 내가 행복해하는 사이에 내 고양이는 죽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
순이가 이미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야 나는 뒤늦게 한탄했다. 그리고 이 년 전 그날 새벽 한 시 반에, 순이는 내 품에서 마지막 숨을 쉬더니 액체가 된 것처럼 몸이 흘러내렸었다. 그 다음은 빠르게 식어가고, 굳어갔다.

팔당교 아래 벤치 주변은 변한 것이 없었다. 강변도 그대로이고 노을이 지는 하늘도 변함없었다. 내 고양이 순이만 이젠 없구나, 했다.
그  때에 내가 자전거에 미쳐있지 않았었다면 집에서 내 고양이를 더 자주 보았을 것이고 아픈데는 없는지 더 살펴볼 수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순이를 어쩌면 더 빨리 병원에 데려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놀고' 있던 동안에 내 고양이는 죽어가고 있었다.
순이가 죽은 후 지난 이 년 동안 나는 자전거에 손도 대지 않았었다.

기어를 느슨하게 해두고 천천히 달렸다. 바람도 햇빛도 까불며 눈앞을 스쳐가는 새들도 이제 예전과 같지는 않았다. 나는 어쩌면 더 조용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와 반겨주는 고양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한 마리씩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2018년 7월 1일 일요일

경기도 광주에서 공연.


경기도 광주에서 공연했던 사진을 꼬마야님이 또 찍어주셨다.
그 날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갔다가 대기실에서 민열이와 하원이가 사다 준 샌드위치를 먹고 힘을 냈다. 그 샌드위치가 무척 맛있었는데, 다음에 한 번 그것을 사먹기 위해 저 공연장에 가볼까, 생각 중이다.

좋은 컨디션으로 연주했던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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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30일 토요일

공연 리허설.


곡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공연 길이는 짧지 않았다.
스무 곡 넘게 연주했던 적이 자주 있었어서 아마 오늘 정도의 공연은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집에서 페달보드를 펼처놓고 케이블을 연결하다가, 역시 이번에도 꼭 쓸 것만 챙겨가자고 마음먹었다. 페달보드를 사용하지 않은지 아마도 일 년은 넘었을 것 같다.


오랜만에 잠을 잘 자고 일어났던 덕분인지 좋아하는 앰프가 준비되어있던 까닭인지 리허설과 공연 내내 전혀 힘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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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9일 금요일

꽃과 나비.


오후 내내 밭에서 일을 했다.

셔츠가 땀에 젖어 팔을 움직일 때에 불편했다.
잠시 선채로 숨을 쉬다가 나비를 보았다.

호랑나비가 아주 우아하게 날아와 꽃에 앉았다.
꼭 느린화면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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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7일 수요일

마감일.


상자 한 개를 놀기 좋게 만들어줬더니 고양이 까미가 들락거리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일에 치여도 더럽게 있지는 말자는 생각을 하여, 샤워를 하고 바닥 청소를 했다.

학생들에게 출제했던 기말 레포트는 오늘까지가 마감이었다.
예상을 했던 일이지만 아직 제출하지 않은 학생들이 남아있다.
내일 성적을 전산망에 입력해야 한다.
아마 내일 보내오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그 후에 보내오거나 안 보내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나는 왜 이번에도 이렇게 여유없이 일처리를 했을까' 하며, 내 우둔한 머리를 쿵쿵 때려줬다.
고양이가 내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보더니, 도망을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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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2일 금요일

기질.


청소를 할 때엔 어디론가 사라졌던 고양이 짤이가 집안이 고요해지자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잠을 자고 있었다.
누구나 어떻게 삶을 살고 있는지는 타고난 기질에 의해 정해질 때가 많다고, 짤이를 볼 때 항상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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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1일 목요일

잠자리가 다녀갔다고.


잠시 창문을 열었을 때에 잠자리가 날아와 잠시 머물다 갔다며 아내가 사진을 보내줬다.
사진을 보다가 이렇게 높은 곳까지 날아다니면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 집 베란다 앞에는 새들이 자주 지나다니기 때문이다.
뭐, 잠자리가 알아서 잘 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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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1일 월요일

까만 고양이는 냉장고 위에서.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있었더니 까만 어린이 고양이가 소리를 내며 좋아서 뛰어다녔다. 내가 잠을 깨어 외출을 할 것인지 집에 머무를 것인지를 고양이는 나름 눈치 빠르게 짐작하는 것 같다. 고양이들이란 원래 그렇다.


내가 외출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고양이 입장에서 크게 좋을 일도 없을텐데, 언제나 짐을 챙겨 현관을 나설 때엔 아쉬워하고 집에 돌아오면 반가와해준다.

고양이들이 원래 다 그렇지만.

커피를 마시며 냉장고 위를 계속 올려다봐줬더니 고양이는 춤을 추듯 까불며 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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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8일 금요일

꽃들.




볕은 뜨거웠고 땅에서는 열기가 올라왔다.
조용한 곳에서 몸을 쓰는 일을 하고 났더니 마음이 조금 잔잔해지는 것 같...기는 커녕 힘들고 고되어 죽을 것 같았다.

꽃들이 예쁘게 피어있었고 벌들이 바쁘게 꽃 사이를 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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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3일 일요일

잠을 자고 싶다.


조금도 쉬지 않고 지냈다.
모처럼 약속이 없는 월요일. 오전에는 은행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와 밤까지 컴퓨터 앞에서 맡은 일을 했다. 대부분의 경우 쓸모가 없고 보상도 없는 일들이다. 내 연습을 위해 시간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계속 쫓기듯 뭔가를 하고 있지만 나를 위한 일은 하나도 못한 채로 매일 매일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입맛이 없어서 콩국수 라면을 끓여 먹고 남아있던 빵과 우유를 조금 먹었다. 심야에는 친구가 찾아와 동네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커피를 마셨다.

전화기를 꺼두고 반나절 정도 잠을 잤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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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31일 목요일

화분과 고양이.


벽쪽의 선반에 화분과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그곳에 햇볕이 비쳐서 조명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고양이들과 십여년 넘게 살았다.
나는 매일 고양이들에게 여러 번 인사를 하고 쓰다듬어준다.
그리고 이 집 안에는 어쩐지 먼저 떠난 고양이들도 여전히 볕이 드는 곳을 찾아 걸어다니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나는 그것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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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8일 월요일

단양에서 연주했다.


미리 공연하는 장소를 지도에서 찾아보았을 때에 어딘가 낯설었다.
어릴 적에 친구와 여행했던 그곳이 아니었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아무 일도 없이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일을 위해 들렀다가 일을 마치면 집에 돌아오는 것으로 끝이었다.

산바람을 쐬며 연주하는 동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오히려 공연시간이 짧아서 아쉬운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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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17일 목요일

오만과 습관.


몇 주 전에 나는 페이스북에 잘난 체를 했다.
윈도우즈 컴퓨터를 쓰다가 맥을 구입한 많은 분들이 맥 오에스 컴퓨터의 속도가 느렸져다던가 하는 이유로 하드디스크를 포맷하고 오에스를 새로 설치하고 있다는 글들을 여러 번 읽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뭐라고 글을 올렸느냐면, '맥 오에스는 밀고 다시 깐다거나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라고 했었다.

지난 일요일, 성남에서 공연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깜박 잠들었다가 심야에 깨었다.
할 일이 많았다. 세수를 하고, 커피물을 불 위에 올려놓고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이후 스무 시간 동안, 내 아이맥은 두 번 다시 로그인 윈도우를 보여주지 않았다.
7년 전에 구입했었으니 쓸만큼 쓴 것인가, 결국 새 컴퓨터를 사야하는 것인가, 생각이 복잡해졌다. 밤을 꼬박 새워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컴퓨터를 살려보려고 했다. 어떤 방법으로도 소용이 없었다.

간신히 내장 하드디스크에 있었던 폴더들을 임시로 백업하고, 한쪽에서는 맥북으로 부팅 가능한 외장하드 디스크를 만들어 오에스 하이시에라 설치파일을 담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아이맥을 포맷하고 맥 오에스를 깨끗하게 설치했다.

컴퓨터는 다시 살아났다. 나는 한 번도 맥 오에스의 타임머신 기능을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내가 습관처럼 하고 있던 나의 평소 백업 방법을 너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랜 동안 거의 매일 직접 파일과 폴더를 정리하고 백업해두는 일을 규칙적으로 하며 지냈다. 그런데 지난 한 달 동안에는 바빴어서 제 때에 백업해두지 못했었다. 집에 오면 컴퓨터를 켜보지도 못하고 자고 일어나 아침에 나가야 하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되살아난 컴퓨터에 필요한 프로그램들을 다시 설치하는 동안 타임머신 용으로 사용할 외장하드를 마련하고, 이제서야 그 기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매킨토시만 사용해온지 20년이 넘었다고 말하며, 그동안 내가 너무 교만스럽게 시건방을 떨었던 것이었다.
혼자 창피해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컴퓨터와 내 자료들을 모두 잃어버릴까봐 만 하루 동안 전전긍긍했다. 겸손하지 않으면 언제나 댓가를 치르는 것이 내 인생인가보다, 했다.

가장 최근의 것을 제외한 나의 파일들은 모두 완벽하게 다시 찾아낼 수 있었다. 다만 여러 개의 미디어에 분별없이 습관적으로 백업을 해두었던 바람에 중복된 압축파일과 폴더들과 이미지 파일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있었다. 그것을 모두 정리하여 내가 사용하던 모습으로 컴퓨터를 다시 정리하는데에 닷새가 걸렸다.

이제 아이맥과 맥북 모두 타임머신 기능을 켜놓았다. 이 기능만 작동되었더라도 최소한 시간 낭비는 덜 했을 것이다. 아주 많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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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의 일은 나중에 알고보니 결국 사용하던 아이맥이 그 수명을 다해버렸던 것이었다.

https://choiwonsik.blogspot.com/2018/08/컴퓨터를 바꿨다


2018년 5월 16일 수요일

대전 공연.


대전에서 공연을 했다.
연주시간은 짧았지만 집에서 일찍 출발하여 리허설을 마치고 긴 대기시간을 보내야했다.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나는 맥북을 챙겨가서 대기실 테이블 앞에 앉아 대기하는 시간 동안 강의자료를 썼다. 준비해둔 것과 생각나는 모든 것을 다 쓰고, 다시 읽으며 불필요한 것을 빼거나 더 필요한 내용을 덧붙이는 방법으로 한 학기 내내 강의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작년에 사용했던 것들을 고쳐서 쓰느니 이렇게 다시 쓰는 것이 깔끔하기 때문이다. 매우 비효율적이고, 사실 조금은 고생스럽다.

리허설을 할 때에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공연음향 일을 하고 계시는 엔지니어분들에게 이런 말 정도는 하고 싶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면, 제대로 하기 위해 노력해달라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과신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타인의 경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쉽다. 어느 쪽이거나 그 이유는 아직 당신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것을 제 때에 바로잡으며 자신의 실력과 경험을 더 좋은 쪽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남의 말을 잘 들어보는 것이다. 그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통 자신보다 권력이 없거나 나이가 어리거나 혹은 뭔가 만만해보이는 대상에게 고압적으로 군다.
우리가 무대 위에서 까다롭게 음향문제를 주문했던 이유는 '일을 잘 하기' 위해서였다.
그저 각자의 일을 똑바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경기지역에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로에 물이 고여 더 속도를 내지 못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음악을 많이 들을 수 있어서 좋았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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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14일 월요일

꽃과 고양이.


고양이들은 꽃을 좋아한다.
번갈아가며 향기를 맡다가 어린이 고양이는 장난삼아 한 송이씩 뽑아내려고 시도를 했다.
어른 고양이는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했다.
가만히 앉아서 고양이들이 노는 것을 보다가 나도 다가가 향기를 맡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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