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8일 금요일

그림, 공연, 커피와 사람.


날짜를 미루었다가 아내의 그림이 전시되어있는 곳에 갔더니... 오늘이 글쎄 마지막 날이었다고. 조명은 이미 꺼져 있었고 하나 둘씩 작품 철수 중.
진작 시간내어 들러서 조금 멋나게 축하 정도는 해주고 싶었는데,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림을 그린 당사자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뭔가 미안해하지 않기도 그렇고... 좀 이상한 상황.

아내는 킬킬 웃으며 그림 옆에서 사진 한 장을 찍고 그 자리에서 벽에 붙어있던 그림을 툭 떼어 내어 집에 가지고 돌아간단다.

나는 공연 리허설 시간에 맞추어 출발을 하느라 서둘러 떠나야 했다.


올해의 마지막 공연.
짧은 분량의 작은 공연이었지만 리허설 때 부터 편안한 앰프 사운드.
(DB751 + 두 개의 DB410 캐비넷. 디렉트 박스 대신 내장된 밸런스 단자를 써보면 어떨까 궁금해했는데 계속 바쁘게 움직이던 스탭분들의 일을 번거롭게 해드리기 싫어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좋은 소리로 한 해의 끝 공연을 할 수 있었어서 기분 좋았다.


공연을 마치고 멤버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마침 친구의 커피집과 가까운 곳이었어서 동료들과 헤어진 후에는 그곳에 들러 하루를 마감하는 커피도 한 잔. 맛은 별로였어서 성의없이 내려준 티가 났지만.

커피집은 친구 녀석의 둥지 같은 느낌이 있었다.
좋은 일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니 더 좋은 일.
갓 볶은 커피향기가 사람을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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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5일 화요일

얼어붙은 겨울.


베토벤을 듣고 있는 새벽.
몇 해 전에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 Wilhelm Bakhaus 라는 분이 1969년에 돌아가신 분이었다는 것을 (너무 한참) 뒤늦게 알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까먹고 조금 전에 베토벤 소나타가 생각이 나서 틀어 둔 채로, '와... 이 사람은 아직 연주를 하시나?'하고 또 찾아봤다가 몇 해 전에 놀랐던 기억을 되찾음. 바보도 아니고.

CD 음반으로 겨우 듣고 있는 20세기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이렇게 좋은데, 쇼팽이 살아있을 때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방 안에서 그의 연주를 직접 들었던 사람들의 감정은 어땠을까.
좋았겠지 뭐. 졸았거나.
완전히 취향의 문제이지만 키스 자렛의 연주 도중에 들리는 신음은 너무 너무 듣기 좋은데 글렌 굴드의 허밍은 어김없이 짜증이 났었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한 주일을 보내고 몸과 정신이 망가져 있었다. 집에 돌아와 손만 씻은채로 쓰러져 다섯 시간 동안 잤다. 갑자기 뺨을 맞으면 갑자기 이성적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뭔가 많이 엉켜있는 채로 기분좋지 않은 곳으로 치닫고 있다가 스스로가 꽤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체험해보면 순간 편안한 정신 상태를 되찾기도 한다.

바로 지금이 그런 느낌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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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하지마.


조금 힘들었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들었는데 문자메세지가 와있었다.
뒤늦게 확인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동안 내가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었던 학생들은 모두 아르바이트를 하며 악기연습을 하고 학교공부와 음악공부를 하느라 하루가 모자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집안 형편이 특별히 어려워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조금의 사치를 부리기 위해서도 아니라, 단지 그렇게 일을 해야 하는 현실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휴일을 누리지 못하는 십대의 시절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내가 미안해요,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다. 그럴 자격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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