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생각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생각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8년 7월 13일 금요일

오랜만에.


비가 그쳤으니 오늘이 딱 좋은날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오랜만에 자전거를 가지고 나갈 준비를 하려니 여러가지가 서툴었다. 타이어에 공기를 채우는 데에도 오래 걸렸다.

강을 따라 달려 팔당교 아래에 섰다. 기온 때문인지 자전거 때문인지 옷이 젖도록 땀이 났다.
팔당교 밑 벤치에 앉아서 물을 마셨다. 이 년 반만에 이 자리에 나와 앉아 본다.

자전거를 사고 한참을 미친듯 타고 다닐 때가 있었다. 나는 무척 즐거워했다. 매일 자전거를 탔고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모두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얼굴에 부딪는 바람, 풀냄새와 강비린내, 자전거 바퀴가 바닥을 지나는 소리들이 모두 기분좋게 느껴졌었다. 나는 최소한 그 몇 해 동안 자전거를 타는 순간만큼은 행복해했다.

그리고 내가 행복해하는 사이에 내 고양이는 죽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
순이가 이미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야 나는 뒤늦게 한탄했다. 그리고 이 년 전 그날 새벽 한 시 반에, 순이는 내 품에서 마지막 숨을 쉬더니 액체가 된 것처럼 몸이 흘러내렸었다. 그 다음은 빠르게 식어가고, 굳어갔다.

팔당교 아래 벤치 주변은 변한 것이 없었다. 강변도 그대로이고 노을이 지는 하늘도 변함없었다. 내 고양이 순이만 이젠 없구나, 했다.
그  때에 내가 자전거에 미쳐있지 않았었다면 집에서 내 고양이를 더 자주 보았을 것이고 아픈데는 없는지 더 살펴볼 수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순이를 어쩌면 더 빨리 병원에 데려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놀고' 있던 동안에 내 고양이는 죽어가고 있었다.
순이가 죽은 후 지난 이 년 동안 나는 자전거에 손도 대지 않았었다.

기어를 느슨하게 해두고 천천히 달렸다. 바람도 햇빛도 까불며 눈앞을 스쳐가는 새들도 이제 예전과 같지는 않았다. 나는 어쩌면 더 조용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와 반겨주는 고양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한 마리씩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2017년 6월 22일 목요일

목요일.



순이가 떠난지 11개월이 되었다.
밤중에도 생각했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도 생각했다.
그렇다고 순이의 재를 담아놓은 단지를 꺼내어 손으로 문질러본다거나 새삼 사진을 열어 하염없이 보고 있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루도 어김 없이 고양이 순이를 생각하고 그리워 한다.

아침에 소음을 내는 사람들은 지난 해에 이어 매일 정확한 시간에 다시 음악소리와 괴성 지르기를 시작했다. 읍사무소의 공무원에게 다시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마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는지 궁리해보지만 다른 수가 없다. 만일 그들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여름이 끝날 때 까지 내가 아침 시간을 망치지 않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국도를 달려 운전을 오래 했다. 애플 뮤직에서 새로 나온 음악들을 들었다. 리마스터를 거친 옛 음반들도 들었다. 재즈를 무작위로 틀어놓기도 했다.
어떤 날은 그날 했어야 했던 일에만 집중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잘 해내지 못한다. 언제나 마음의 짐이 있는 것을 감당하기 싫은 날도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조용한 길을 달리고 달렸다. 그 평화로움이 낯설게 여겨졌다.

컴퓨터와 전등을 끄고 자려고 누웠을 때 검은 고양이 까미가 내 발 곁에 오더니 발목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 불편할텐데 항상 내 곁에서 자다가, 아침이 밝으면 아내의 곁에 가서 선잠을 잔다.
어린 고양이 덕분에 순이를 잃은 마음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생명이라는 것, 죽음이라는 것은 양쪽 모두 불성실하고 불합리하다.
어린 고양이를 살짝 들어올려 침대의 푹신한 자리에 눞혔다.
고양이가 그르릉 거리며 편안해 했다.



.

2017년 2월 25일 토요일

아직 춥다.


순이가 떠난 후 일곱달을 보냈다.
매일 고양이 생각이 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싶어한다.

겨울은 끝나가는 모양이다. 아직은 바람이 차갑다.
공연을 위해 악기 손질을 하다가 문득 이 사진이 생각나서 찾아 열어보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사진들을 인화해두고 싶어졌다.



.

2016년 8월 25일 목요일

순이가 곁에 있었다.



순이가 떠난지 한 달이 되었다.

그동안 매일 슬퍼하고 아파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그리워지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은 유한하니까, 이것은 자연의 법칙일 뿐일테니까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견뎌볼 수 있었다.

자주 청소를 했다. 순이의 흔적이 묻어있는 집안의 모든 곳을 볼 때 마다 눈물이 났었다.
이 집에서 보냈던 전부의 시간을 함께 했던 내 고양이의 생각에, 집안의 모든 구석 구석마다 슬픈 냄새가 났었다.

엊그제에는 조금 다른 기분이 느껴졌다.
나는 내 고양이 순이와 내가 서로를 깊이 좋아하며 살았던 12년이 정말 근사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경험은 한 번 뿐이었던 일이었다.
나는 이제 이 집의 모든 곳에서 순이를 좋아했던 내 감정을 본다.
나는 언젠가 이곳을 떠날지도 모르지만, 집안의 후미진 구석 한 군데도 남기지 않고 마음 속에 넣어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후회하고 자책하는 일은 역시 부정적인 것이고, 그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내가 했던 일과 하지 않았던 어떤 일들에 대하여 반성했어야 했고, 내 힘이 모자라 순이에게 소홀할 수 밖에 없던 일들에 대하여 깊이 미안해해야 했다. 그런 과정은 내가 나라는 사람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했다.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고양이와 함께 있었던 11년 6개월 동안의 내 모습이 어떠했던가를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순이의 사진들을 모아 다시 보면서 날짜를 확인하고 그때의 기록을 살펴보기도 했다.

사진 속의 고양이 순이는 아주 많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진 속 그 순간의 일들을 기억할 때 마다 나는 순이의 의사표현과 마음과 감정을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고양이의 눈에 비치고 있었을 내 모습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거의 매일 꿈에서 순이를 보았다. 어떤 것은 꿈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나 문득 떠올랐던 기억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꿈에서 순이는 어린 고양이 시절의 모습으로 뒹굴며 놀기도 하고 조용하게 그르릉 거리며 잠을 자고 있기도 했다. 꽃을 보고 기뻐하거나 고양이 꼼과 뛰어 노는 모습도 있었다. 지난 밤에는 천둥소리에 놀라서 떨고 있는 어린 순이를 내가 껴안고 토닥이며 진정시키고 있었다. 순이는 처음 겪어보는 천둥번개와 소란한 빗소리에 겁을 먹었다가 내 품안에서 안정을 찾더니 금세 장난을 치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 커피를 내리며 생각해보니 그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었다.

이것은 결국 남에게 이해받지 못할, 혹은 공감받지 못할 외로운 경험일 수도 있다. 다만 고양이 한 마리가 십년을 넘게 살다가 병으로 갑자기 죽어버린 것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도 개에게서도 다른 고양이에게서도, 순이와 함께 했던 세월과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 남아있는 나의 시간 안에서도 더 이상 없거나 드물 것이다.
나는 슬퍼하기를 일부러 멈추려하지 않으려 한다. 그 대신 지나온 십여년이 나에게 귀하고 아름다왔던 날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순이가 떠나던 날의 모습도 굳이 기억하려고 한다.
순이가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든 간에, 내가 고양이 순이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그 고양이도 함께 느껴줬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고양이 순이는 내 곁에 있었다.
무척 그립고, 보고싶다.
그리워할 수는 있고, 이제 볼 수는 없다.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의식하지 못하며 울기도 한다.
더 시간이 지나면 마음도 무뎌지고 눈물도 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를 좋아해줬던 순이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