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3일 목요일

아내의 그림

책꽂이 위에는 우리와 함께 살았던 고양이들이 있다. 모두 아내가 그린 그림들이다. 낡은 종이 냄새가 나는 수십 년 된 책을 한 권 꺼내어 보다가 내가 아직 이것을 왜 가지고 있는가, 생각했다. 몇 권은 버려도 된다. 사실 거의 다시 펼쳐보지 않는 책들은 모두 버려도 되는 것 아닐까. 어디 책 뿐인가, 저기에 있는 플라스틱 CD들이나 손 댈 일이 없는 오래된 물건들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을 나는 한 개도 버리지 못하고 집안 가득 두고 앉아 있다.

감정, 느낌, 그리움은 기억 속에 있다. 어느날 자아를 잃으면 기억은 그 모든 마음들을 다 끌어 안고 사라질 것이다. 나는 그 형체도 없는 지나 온 세월들을 품에 품고 싶은 것인지.  그것들이 물건 속에 담겨 있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벌써 오래 전에 떠나버린 고양이들이 아직도 선반 위에 뛰어 오르고 볕이 가득한 날엔 베란다 타일 위에서 뒹굴거린다. 한 집에 오래 살고 있다보니 집안 구석 어디에도 고양이들이 없는 자리가 없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식구들이 이 방 저 방 어디에나 있다. 그러다가 문득 아내가 그린 고양이들이 눈에 들어 오면, 아, 그렇지, 쟤들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건 아니지, 라고 생각하곤 한다.


 

2026년 4월 21일 화요일

화요일에

자동차 앞유리와 와이퍼 사이에 꽃씨와 나뭇잎이 잔뜩 끼여 붙어 있었다. 그것을 대충 털어내고 나서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옮겨 두려고 하고 있었다. 그 때 마침 아내를 따라 산책 나온 개 율리가 곁에서 맴돌며 나를 쳐다 보았다. 문득 생각이 나서 사람과 개를 태우고 넓직한 근처 강변 공원에 가기로 했다. 너른 강을 보며 율리는 아주 신나게 뛰어 놀기 시작했다. 너무 빠르게 다가와서 간신히 한 장 건진 사진을 보니 개의 표정이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돌아올 때에 주유소에 들르고 싶었는데, 외출할 작정으로 나왔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갑도 신용카드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율리는 집에 돌아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깊은 밤이 되자 고양이 깜이가 내 의자를 차지하고 등받이에 기대어 기분 좋아 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의자를 내어주고 나는 높이 조절 탁자를 책상 앞에 끌어 와 새벽 내내 서 있었다. 잠깐씩 음악이 지나가고 다음 곡이 시작될 때에 헤드폰 너머로 깜이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뻗어 토닥토닥 쓰다듬어 주면 잠시 멈추는 듯 하다가 고양이는 이내 다시 코를 골며 늘어지게 잠을 잤다.


2026년 4월 20일 월요일

봄비

 


아침에는 바람이 불고 하늘이 검더니 예보대로 낮에는 비가 내렸다. 오후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하여 스튜디오 한쪽 끝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세 곡을 연주하고 돌아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엔 날이 개이고 흰 구름을 흩트리며 햇빛이 밝게 내렸다. 방송사 주차장에 세워뒀던 차엔 비를 맞아 먼지 자욱이 잔뜩 묻어 있었다. 서늘했던 바람은 어느새 살랑이는 봄바람이 되어 불고 있었다.

이전에 이 스튜디오에서 몇 번 연주했었다. 이번엔 앰프를 쓰지 않고 라인 연결로만 연주하기로 했다. 넓지 않은 공간이이어서 앰프가 있어야 방청객 수십 명에게 더 생생한 사운드를 들려줄 수 있었겠지만 가능한 번거로운 일을 줄이고 싶었다. 다급하게 돌아가는 생방송을 송출하는 게 목적인 세션이었으니까.
밴드 공연을 함께 만들고 있는 음향팀 두 분을 굳이 불러서 준비했던 덕분에 우리가 들으며 연주했던 사운드는 아주 좋았다. 그 소리가 실제 방송에서는 얼마나 재현되었을지는 모르겠다.

2026년 4월 18일 토요일

안산에서

 

안산에서 공연을 했다. 사 년 전에는 여기 안산 예술의 전당 바로 옆 극장에서 공연했었다. 그곳은 달맞이 극장, 오늘 갔던 곳은 해돋이 극장이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있었다. 어차피 실내 무대이므로 해도 달도 보이지는 않지만 이름은 곱다. 오늘은 한 달 만에 펜더 울트라 II 재즈를 가지고 갔다. 지난 밤에 악기를 가방에 넣기 전에 스트링을 새로 교환하려고 했다가 무슨 일인지 상태가 좋아서 그대로 두었다. 십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악기의 스트링을 자주 갈아야 했었다. 연주를 마치면 언제나 악기를 관리하는 습관이 되어있기도 하고, 이제는 손에 땀도 나지 않아서 베이스 줄을 더 오래 쓰게 되었는가 보다.

공연을 마치고 극장 바로 옆 종합병원 길을 지나면서 오륙 년 전 그곳 장례식장에 두 번 연이어 갔었던 기억이 났다. 그 맞은 편에는 단원고 4.16 기억교실이 있다. 이틀 전은 세월호 참사 12주기였다. 이 년 전에 10주기 기억문화제에서 공연을 했을 때 하루 종일 비가 내렸던 것도 생각났다.


집에 돌아와 다큐멘터리 영화 <란 12.3> 을 보았다. 영화가 만들어질 때 보잘 것 없는 금액을 후원했던 덕분에 개봉 전 온라인 시사회 링크 주소를 받았다. 원래는 지난 주에 메시지를 받았지만 그날엔 익산에서 집에 돌아왔더니 이미 볼 수 있는 시간이 지나버렸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 헤드폰을 쓰고 볼륨을 높여서 영화를 보았다.
그래, 아직은 난중 亂中이지만, 수 많은 개인사들이 우연과 인연으로 얽혀서 함께 치르었던 거대한 경험의 힘은 세다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