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20일 화요일

랄프 타우너

 



랄프 타우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짧은 두어 줄 기사로 읽었다.

먼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고된 공연을 마치고 운전할 때에, 어떤 겨울날 모든 일이 무상하게 느껴져 마음이 얼어있었을 때에 그의 음악에서 위로를 받았었다.

그는 리더로서 녹음했던 대부분의 앨범을 ECM에서 냈다. 그 레이블을 떠올리면 그가 동시에 떠오른다. 그의 음악을 듣다가 알게 됐던 연주자들이 많았다. 자주 반복하여 듣지 않았어도 그의 연주를 듣고 나면 그 공기가 향기처럼 오래 남았다. 냄새를 기억하듯 문득 생각이 나서 그의 음악을 꺼내어 들어보곤 했었다.

새벽에 일어나 그의 마지막 앨범을 듣고 있었다. 이 앨범의 맨 끝 곡 이름은 Empty Stage 였다. 사방이 조용한 이 시간이 좀 더 지속되었으면 했다.


2026년 1월 7일 수요일

바람불어 좋은 날

 

유튜브에 누군가가 1980년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을 통째로 업로드 해놓은 것을 발견했다. 혹시나 하고 검색해보았다가 찾았다. 군데군데 빨리 돌리기를 하면서 영화를 다시 보았다. 거의 삼십여 년만에 다시 본 것 같다. 마지막에 봤던 것은 텔레비젼에서였던 것 같다. 내 기억이 맞는지 자신은 없다. 감독은 이장호이고 조감독 중에 배창호 감독이 있었다. 나중에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촬영하러 라오스에 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고 말았던 김성찬이 나오고, 이장호 감독의 동생인 연극배우 이영호가 함께 주연으로 나온다. 그리고 한 영화에 모두 출연하기 어려울 것 같은 배우들이 잔뜩 나온다. 김희라, 임예진, 유지인, 김보연, 최불암, 김영애, 김인문, 박원숙, 추석양 등이 한꺼번에. <별들의 고향>이 입봉작이었던 이장호 감독의 명성이 작용했던 것이었을까.

나는 이 영화를 중학교 여름방학 때에 화양동 골목에 있던 동시상영 극장에서 보았다. 한낮에 어두운 상영관 안에 들어가면 자욱한 담배연기가 영사기 빛에 반사되어 떠다녔다. 사람이 없어도 마냥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는 없었다. 학교 선생들이 검문하며 지나다니기도 했고 몇 푼 돈을 뺏으려고 하는 양아치들을 만날 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볼 때엔 다른 생각은 잊고 집중하여 스크린만 보고 있었다. '방화'도 유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처음 생각하게 된 영화였다.

거기에 나오는 동네는 그 몇 년 전에 내가 살았던 길동과 닮았었다. 이발소, 중화요리집, 오른쪽에 운전석이 있는 낡은 수입차는 화양동, 신당동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주인공 덕배는 동시상영 영화관에서 마주칠 수도 있는 인물처럼 보였다. 음악만 아니었다면 더 좋은 영화가 될 뻔 했다고, 이제 막 카세트 테이프를 사모으며 음악에 빠져들고 있었던 열 네 살짜리 사내아이는 생각했었다.

잭 드죠넷, 안소니 잭슨이 죽었을 때에는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고마웠다고, 블로그에 추모하는 글을 쉽게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배우 안성기 씨가 일흔 넷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외국인 연주자들을 향해 추모한다느니 했던 것처럼 선뜻 마음을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대신 계속 <바람불어 좋은 날>이 생각났다. 이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분의 명복을 빈다.

2025년 12월 27일 토요일

대구 공연

 

아침 일찍 출발하여 큼직한 컵으로 커피를 사고 주유소에 들러 연료를 가득 채웠다. 대구 수성아트피아 대극장에 도착하여 무대 반입구를 찾느라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이 극장에 16년만에 다시 와보았다. 더 자주 갔던 것처럼 기억하고 있었는데 기록을 확인해보니 아양아트센터와 혼동을 했던 것 같다.

한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에 악기를 설치해놓고 화장실부터 다녀왔다. 오늘은 내 오래된 펜더 재즈 베이스를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일정이니까 뭔가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 년이 금세 지나가버렸다. 리허설을 한 다음엔 차에 가서 짧은 잠을 청했다. 꿈까지 꾸었는데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깨어보니 고작 이십 여분 졸았던 게 전부였다.

오늘은 이틀 전보다 더 나은 연주를 했다. 막바지엔 피로감도 느끼지 않았다. 뭔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일곱 시간 사십 분 운전했다. 셜리 혼의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내가 타고 있는 버스가 자꾸만 좌우로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뿔싸, 내가 꿈을 꾸었던 것이었다. 졸았구나,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어서 졸음쉼터에 차를 세우고 내려 십여분 바람을 쐬었다. 차고 습한 공기가 코 안에 가득 들어왔다.
집에 돌아와 더운물로 씻고 책상 앞에 앉아서, 어찌어찌 한 해를 잘 마무리했구나, 라고 말했다. 자기에게 했던 말이 아니었는데 옆에서 고양이 깜이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2025년 12월 25일 목요일

부산 공연


부산 영화의 전당 하늘연극장에 도착. 집에서 여덟 시 오십 분에 출발하여 오후 두 시에 공연장에 도착했다. 전날 밤에 갑자기 위경련을 심하게 겪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신음하며 뒹굴다가 아내가 뛰어나가 사다 준 약을 먹고 겨우 나았다. 가는 길에 경주 휴게소에서 (비싼) 돈까스를 먹고 기운을 차렸다. 운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냥 트릿한 상태로 하루를 시작했다.
Moollon 재즈 베이스를 가지고 갔다. 이 악기는 올해 유월에 한 번, 그리고 오늘 한 번 썼다.

좋은 상태로 가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 잘못이다. 집중하느라 온 힘을 썼지만 공연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세 번 멈추어 쉬어야 했다. 휴게소에서 찬 커피를 한 잔 사서 그것에 의지하여 무사히 올 수 있었다. 휴게소의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은 시간에 한 구석에서 말 없이 일하는 중인 로봇이 따라 주는 커피를 살 수 있다는 게 고마웠다.
오늘 하루 아홉 시간 오십 분 운전을 했다. 미리 USB 저장장치에 담아 온 음악들을 듣고, 음악을 듣지 않을 때에는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다. 기억과 생각들이 교섭하다가 서로 배척하고, 발전하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했다.  Pat Metheny, Roy Hargrove의 앨범들을 들었고 손열음의 라벨 협주곡과 질 크로스랜드의 쇼팽을 들었다. 돌아올 때엔 찰리 헤이든과 케니 바론 듀엣 앨범 Night And The City, 스탄 겟츠와 케니 바론의 듀엣 앨범 People Time이 좋았다. 깜깜한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온 후엔 음악을 끄고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