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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5일 화요일

겨울, 고양이 생각

 


갑자기 추워졌다. 일기예보가 알려줬던 것처럼 영하 10도로 기온이 내려갔다. 눈이 내렸었고 강원도 북쪽에는 한파경보가 내려진다는 뉴스도 보았다. 감염병은 더욱 확산하고 있다.

4년 전 이 즈음에, 지금 내 곁에서 칭얼거리며 잠투정을 하는 까만 고양이가 나와 아내에게 이제부터 우리와 함께 살겠다고 선언했다. 유난히 추웠던 11월 밤중의 일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아직 이름이 없었을 어린 고양이를 부르자 얘는 고민도 없이 다가와 우리에게 몸을 부비며 끙끙 소리를 내었다. 결국 고양이를 품에 안고 데려와 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하고 몸을 씻기고 키우기로 한 것은 아내와 내가 맞긴 하지만, 나는 그날 밤 이 고양이가 절박한 심정으로 '선언'을 했던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는 당신들과 살아야겠다.' 라고. 추워진 11월이 다시 찾아오자 나는 그날 밤 까만 고양이 까미를 만났던 일이 기억났다.

까미는 아주 말이 많고 걸핏하면 투정을 부리는 어린이 고양이가 되었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언니 고양이들에게 심한 장난을 걸고 얻어 맞는 일도 매일 하고 있다. 그리고 간식이 생각날 때에는 우리를 만났던 그날 그랬던 것 처럼 단호하고 당당하게 먹을 것을 요구한다. 가끔은 정말 배가 고픈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어쨌거나 아주 분명하고 강한 어조로 사람에게 간식을 내놓으라고 할 때 마다, 나는 까미가 언변 좋은 대중연설가의 기질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올해 여름에 사랑했던 고양이 꼼이를 잃었다. 아직 반 년도 지나지 않았다. 떠나고 없는 고양이를 매일 매일 몇 번씩 떠올리며 여름과 가을을 보냈다. 꼼이는 내 결혼의 시작과 함께 우리와 살게 되었었다. 고양이 꼼이는 언제나 우리 두 사람을 웃게 했다. 하얀 고양이 꼼이는 애정을 표현할 때에도, 말썽을 부릴 때에도, 즐거워 뜀박질을 하거나 나른하게 마냥 졸고 있을 때에도 귀엽고 예뻤다. 나는 고양이 꼼이에게 행복을 빚진 채 그를 떠나 보냈다.

고양이 까미가 우리와 만났던 그 해 여름에는 고양이 순이가 세상을 떠났다. 순이와 가장 친했던 꼼이는 그로부터 꼭 4년 후에 순이가 떠난 곳으로 갑자기 가버렸다. 지난 달에 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겪고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었다. 병실에 누워 움직이지 못하며 잠깐씩 잠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던 날, 나는 떠나고 없는 내 고양이들을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새삼, 각자의 시간은 결국 별안간 멈추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내와 나의 전화기와 시계에는 항상 우리의 곁을 떠난 고양이들의 사진이 보여지고 있다. 곁에 없는 고양이를 그리워 하다가, 지금 곁에 있는 고양이들을 껴안고 얼굴을 부벼 보기도 한다. 나는 더 쓰다듬어도 좋다며 그르릉 소리를 내는 고양이를 안아 편안한 자리에 눕히고 책상 앞으로 돌아와,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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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2일 수요일

비가 내린다.


순이가 떠난지 네 해가 되는 날이었다.
꼼이가 단짝이었던 순이를 따라 가버린지 겨우 이십여일이 지났다.
바람이 불고 비가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닫고 집안을 청소하는데, 구석마다 떠나고 없는 고양이 두 마리가 마치 조금 전까지 드러눕거나 뛰어 놀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제 실없는 농담으로 웃고 아무 음악이나 틀어두고 흥얼거리기도 한다.
다시 만날 수 없는 고양이들을 보고싶어도 하고 가끔 아무 것도 없는 곳을 향해 없어진 고양이의 이름도 불러 보았다.
같이 있을 동안에 힘주어 행복하려고 하고, 헤어진 후에는 적당히 슬퍼한 후 오래 그리워하면 되는 일이다. 오늘은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했었다.

2019년 7월 22일 월요일

조용했던 하루.


사진 앱에 모아둔 고양이 순이의 폴더를 클릭했더니 사진파일의 메타정보에 따라 연도가 표시되었다. 그 기간이 내가 고양이 순이와 함께 했던 시간이었다. 그 숫자를 보면서 나에게 친절했던 내 고양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삼년 전 그날 아침에 나는 화장터 직원으로부터 순이의 재가 담긴 상자를 받아들고 집으로 출발했다. 운전을 시작한지 몇 분 되지 않아 갓길을 발견하고 차를 멈췄다. 그리고 갑자기 저절로 울음이 터졌었다. 울고싶지 않아서 버텼던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참고 싶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소리도 눈물도 없이 울음이 터져버렸다. 아무도 없는 길 위에서, 뒤늦게 눈물이 빗물처럼 떨어져 허벅지를 적실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감정은 정확하지 않다. 기억할 수 있는 감각은 있다. 나는 고통스러워했다. 몸이 아파왔다. 헤어지고싶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서운하고 슬퍼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런 기분이니까, 아마 그 순간에도 그런 감정이었을 것이다.

2006년, 4월에.


슬픈 기억, 아픈 느낌은 좋지 않다. 나이 먹은 인간이라면 그런 정도는 떨쳐내거나 가슴 깊이 묻어두는데에 능숙해지는 것인줄 알았다. 나는 아마도 그런 사람은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고양이를 떠나보내는 일 역시 많은 관계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말로 이성적인 체하며 센척을 해보았자 아픈 마음은 나아지지 않는다.
기억이 날 때엔 기억하고, 슬퍼할 때엔 차분히 슬퍼하는 게 더 낫다. 헤어지기 전까지 힘껏 행복하면 좋고, 누군가를 잃고 고통스러워할 때에 위로받지 못하였다고 해도 오래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배우면 되는 것 같다.

그날처럼 덥고 습했던 하루가 조용하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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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2일 목요일

식구.


검은고양이 까미가 우리집에 '제 발로' 들어와 눌러앉아 살은지 두 해가 되었다.
집안을 휘젓고 다니며 종일 까불고, 나이 많은 고양이들에게 달려들어 놀아달라고 조르는 것을 매일 본다. 볕이 좋으면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졸다가 햇빛이 사라지면 이불을 찾아 드러눕는다. 이 고양이가 처음 내집에 들어왔을 때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흘 동안 잠만 잤던 것이 기억난다. 추웠던 그 해 십일월에, 바깥에서 고생을 했었으리라.

고양이 순이가 떠난지 두 해 넉달이 지났다. 검은 고양이 까미는 순이가 하던 짓을 신기하게 재연할 때가 많다. 나는 까미를 보다가 순이 생각을 했다. 까미를 쓰다듬다가 순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한밤중에 내가 자리에 누우면 검은 고양이가 조용히 다가와 내 팔을 베고 나란히 눕는다. 나는 깜박하고 검은 고양이의 이마를 만지며 '순이야', 하고 불러버린 적도 있었다.

다시 겨울이 시작되었다. 겨울동안 내 식구들이 사료를 잘 먹고, 군것질도 적당히 하고, 내가 없는 동안에도 집안에서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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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3일 금요일

고양이 순이.


내 고양이 순이가 세상을 떠난지 일 년 팔개월이 되었다.
작고 어린 고양이였던 시절의 사진을 꺼내어 보았다.
아직도 고양이가 내 곁에서 그르릉 소리를 내며 잠들어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매일 그립고 보고싶다.
나는 아무래도 이 고양이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나보다.
언제나 새롭게 느끼는 것은, 함께 있었던 동안 참 좋았었다는 것이다.
먼저 떠난 고양이에게 항상 고마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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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2일 월요일

일년 반.


순이가 떠난지 일년 육개월이 되었다.
여전히 그립고 매일 생각이 난다.
순이가 보고싶다.
자다가 깨어나면 의자에 앉아있을 것 같고 내 곁에서 숨을 쉬며 자고 있을 것 같다.
아이폰에 순이의 사진이 천 장 담겨있다. 매일 꺼내어 보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이 나면 특정한 시기의 순이 사진을 한참 보고는 한다.
일년 반이나 되었다니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기쁨은 휘발되어 날아가버리고 슬픈 감정은 깊숙히 가라앉아 머문다.
사람들은 사라지는 기쁨을 움켜쥐려 하고 깊은 슬픔은 흘러내려보내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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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2일 일요일

1년 석 달.


고양이 순이가 떠난지 1년 3개월이 지났다.
순이가 향기를 맡으며 놀았던 꽃은 여전히 새로 피어나고 있었다.
아내가 그릇에 물을 담고 꽃의 가지를 잘라 테이블 위에 올려뒀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그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손에 모아 순이의 재가 담긴 상자 위에 올려뒀다.
꽃잎은 천천히 마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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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2일 목요일

목요일.



순이가 떠난지 11개월이 되었다.
밤중에도 생각했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도 생각했다.
그렇다고 순이의 재를 담아놓은 단지를 꺼내어 손으로 문질러본다거나 새삼 사진을 열어 하염없이 보고 있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루도 어김 없이 고양이 순이를 생각하고 그리워 한다.

아침에 소음을 내는 사람들은 지난 해에 이어 매일 정확한 시간에 다시 음악소리와 괴성 지르기를 시작했다. 읍사무소의 공무원에게 다시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마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는지 궁리해보지만 다른 수가 없다. 만일 그들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여름이 끝날 때 까지 내가 아침 시간을 망치지 않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국도를 달려 운전을 오래 했다. 애플 뮤직에서 새로 나온 음악들을 들었다. 리마스터를 거친 옛 음반들도 들었다. 재즈를 무작위로 틀어놓기도 했다.
어떤 날은 그날 했어야 했던 일에만 집중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잘 해내지 못한다. 언제나 마음의 짐이 있는 것을 감당하기 싫은 날도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조용한 길을 달리고 달렸다. 그 평화로움이 낯설게 여겨졌다.

컴퓨터와 전등을 끄고 자려고 누웠을 때 검은 고양이 까미가 내 발 곁에 오더니 발목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 불편할텐데 항상 내 곁에서 자다가, 아침이 밝으면 아내의 곁에 가서 선잠을 잔다.
어린 고양이 덕분에 순이를 잃은 마음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생명이라는 것, 죽음이라는 것은 양쪽 모두 불성실하고 불합리하다.
어린 고양이를 살짝 들어올려 침대의 푹신한 자리에 눞혔다.
고양이가 그르릉 거리며 편안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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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2일 토요일

고양이를 그리워했다.


순이가 떠난지 아홉 달이 지났다.
오래 되었다. 오래 되었는데도 여전히 매일 나는 고양이 순이를 생각한다.
신비롭게도 늘 곁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제는 곁에 없는 짐승의 체온을 느낀다.
그 고양이가 앉아서 나를 올려다 보고 있던 집안의 모든 곳에서 나는 순이의 얼굴을 본다.

나는 더 이상 순이의 옛 사진들을 일일이 찾아 보지 않는다.
그 대신 달이 밝은 밤이거나 꽃이 가득 피어있는 나무를 볼 때에, 나는 순이의 목소리를 듣고 순이의 냄새를 맡는다.


2017년 1월 22일 일요일

눈 내렸던 날.



이 블로그에 적어둘 새해 첫 글을 쓰면서 망설였었다. 한 개는 지우고 한 개는 고쳐 썼다.
오늘은 순이가 떠난지 여섯 달이 되는 날이었다.

대학에서 치르는 입시시험의 심사를 하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섰다. 올 겨울 제일 춥다는 뉴스를 들으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순이가 손바닥만한 어린 고양이였던 시절부터 함께 보내왔던 겨울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 반 년 동안 하루도 순이의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운전을 하거나 음악을 연주할 때에도, 동네의 길을 걷다가 밤하늘의 달을 보게 될 때에도 순이가 떠올랐다. 집에 돌아와 고양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한 마리씩 쓰다듬고 안아주고 있으면 순이가 품에 안겼을 때의 느낌을 기억해보곤 했다.

추웠던 날 아내의 바지춤을 붙잡고 우리집에 들어와 머물러 살게 된 까만 고양이는 순이가 남기고 떠난 자리에서 자주 잠들고, 순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나는 까만 어린이 고양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으면서 자주 순이를 생각했다.

나와 아내는 집안에 함께 있는 나이 든 고양이들에게 더 마음을 쓰려고 하고, 더 세심하게 보살피려고 한다. 함께 있을 때에 더 많이 서로 좋아하며 살아 있고 싶은 마음.

두 달 째 집안의 고양이 한 마리가 아팠고 아직도 스스로 사료를 잘 먹지 않고 있다. 아내는 몸집이 제일 작은 그 고양이 이지를 간호하고 살피느라 아직도 긴 잠을 자보지 못하며 지내고 있다. 밥을 물에 개어 손으로 떠 먹이고 주사기에 물을 담아 때를 맞추어 먹였다. 우리 두 사람은 식탁 위에 큰 공책을 펴두고 아픈 고양이가 밥을 먹거나 용변을 본 것을 서로 기록해두며 지내고 있다.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들에게 정성을 쏟다가 문득 순이 생각이 나면, 죽고 없는 고양이에게 더 세심하게 잘 해주지 못했던 것들만 떠올라 마음이 안 좋다. 순이에게 나는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미리 아프지 않게 해줄 수 있었는데… 순이는 나 때문에 병을 얻었고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말이 없어지고 자꾸 우울해졌다.

학교에 가까와질 무렵 동이 트기 시작했다. 빨간 해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햇빛이 차 안에 뿌려지고 있었다. 녹지 않은 눈과 얼음 때문에 자동차의 앞유리가 뿌옇게 변했다.

나 혼자 순이의 가루가 담긴 조그만 상자를 한 손에 들고 집에 돌아오고 있던 여름날의 아침에도 꼭 그랬었다. 해가 떠오르고 하늘이 밝아지는데도 계속 눈 앞은 뿌옇고 흐릿했다.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계속 눈가를 문지르며 운전을 했었다.

푹신하게 쌓인 눈을 밟으며 괜히 건물을 빙 돌아 걸어갔다.
차갑고 마른 공기가 목 안에 가득 들어왔다.

괜히 달력을 열고 날짜를 세어보았다.
음력 섣달 그믐이 닷새 남았다.




2016년 10월 25일 화요일

그리워했다.


꿈에서 순이를 보았다.
그리고 잠을 깨었다. 밖은 깜깜했다. 두 시 반이었다.

순이가 떠난지 아직 백일이 되지 않았다.
고양이 순이가 내 어깨에 볼을 기대고 그르릉 거리던 시절이, 어느 날에는 아득한 옛 일 같기도 했다. 어떤 아침에는 어제의 일 처럼 느껴졌다. 매일 꿈에서 고양이를 보았었다가 한 동안 꿈을 꾸지 않고 지냈다.

꿈 속에서 한 번도 내 고양이를 만지거나 다가가 안아 보지 못했다.
다시 꿈에서 만나게 되면 와락 다가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눈이라도 마주치면 이름을 부르며 웃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2016년 8월 25일 목요일

순이가 곁에 있었다.



순이가 떠난지 한 달이 되었다.

그동안 매일 슬퍼하고 아파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그리워지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은 유한하니까, 이것은 자연의 법칙일 뿐일테니까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견뎌볼 수 있었다.

자주 청소를 했다. 순이의 흔적이 묻어있는 집안의 모든 곳을 볼 때 마다 눈물이 났었다.
이 집에서 보냈던 전부의 시간을 함께 했던 내 고양이의 생각에, 집안의 모든 구석 구석마다 슬픈 냄새가 났었다.

엊그제에는 조금 다른 기분이 느껴졌다.
나는 내 고양이 순이와 내가 서로를 깊이 좋아하며 살았던 12년이 정말 근사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경험은 한 번 뿐이었던 일이었다.
나는 이제 이 집의 모든 곳에서 순이를 좋아했던 내 감정을 본다.
나는 언젠가 이곳을 떠날지도 모르지만, 집안의 후미진 구석 한 군데도 남기지 않고 마음 속에 넣어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후회하고 자책하는 일은 역시 부정적인 것이고, 그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내가 했던 일과 하지 않았던 어떤 일들에 대하여 반성했어야 했고, 내 힘이 모자라 순이에게 소홀할 수 밖에 없던 일들에 대하여 깊이 미안해해야 했다. 그런 과정은 내가 나라는 사람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했다.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고양이와 함께 있었던 11년 6개월 동안의 내 모습이 어떠했던가를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순이의 사진들을 모아 다시 보면서 날짜를 확인하고 그때의 기록을 살펴보기도 했다.

사진 속의 고양이 순이는 아주 많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진 속 그 순간의 일들을 기억할 때 마다 나는 순이의 의사표현과 마음과 감정을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고양이의 눈에 비치고 있었을 내 모습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거의 매일 꿈에서 순이를 보았다. 어떤 것은 꿈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나 문득 떠올랐던 기억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꿈에서 순이는 어린 고양이 시절의 모습으로 뒹굴며 놀기도 하고 조용하게 그르릉 거리며 잠을 자고 있기도 했다. 꽃을 보고 기뻐하거나 고양이 꼼과 뛰어 노는 모습도 있었다. 지난 밤에는 천둥소리에 놀라서 떨고 있는 어린 순이를 내가 껴안고 토닥이며 진정시키고 있었다. 순이는 처음 겪어보는 천둥번개와 소란한 빗소리에 겁을 먹었다가 내 품안에서 안정을 찾더니 금세 장난을 치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 커피를 내리며 생각해보니 그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었다.

이것은 결국 남에게 이해받지 못할, 혹은 공감받지 못할 외로운 경험일 수도 있다. 다만 고양이 한 마리가 십년을 넘게 살다가 병으로 갑자기 죽어버린 것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도 개에게서도 다른 고양이에게서도, 순이와 함께 했던 세월과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 남아있는 나의 시간 안에서도 더 이상 없거나 드물 것이다.
나는 슬퍼하기를 일부러 멈추려하지 않으려 한다. 그 대신 지나온 십여년이 나에게 귀하고 아름다왔던 날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순이가 떠나던 날의 모습도 굳이 기억하려고 한다.
순이가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든 간에, 내가 고양이 순이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그 고양이도 함께 느껴줬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고양이 순이는 내 곁에 있었다.
무척 그립고, 보고싶다.
그리워할 수는 있고, 이제 볼 수는 없다.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의식하지 못하며 울기도 한다.
더 시간이 지나면 마음도 무뎌지고 눈물도 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를 좋아해줬던 순이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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