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7일 월요일

그 때 그 곳.


페이스북 덕분에 연락을 하고 지냈던 주엽형의 초대로 내가 졸업한 학교에 갔었다.
학교의 홍보를 위해 쓰이는 일이라고 하여 두말없이 가겠다고 대답하고, 시간을 내어 다녀왔다. 어색한 사진 몇 장을 찍고 주엽형과 마주 앉아 인터뷰를 하였다. 사실 그것은 좋은 핑계였고, 기회삼아 옛 학교에 가보고 싶었다. 25년만에 가보는 곳이었다.

눈에 익은 길이 나왔을 때에 갑자기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기억은 혼재되기 쉽고 나는 워낙 시간의 앞과 뒤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가끔 떠오르던 골목길이나 좁은 거리가 어디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었다. 바로 내가 다녔던 학교 앞이었다.

주엽형의 연락으로 태우형과 광장형도 만났다. 함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다른 장소에서 약속하지 않고 학교로 갔던 것은 잘한 일이었다. 엄혹했던 시절, 야만스러움이 아직 씻겨지지 않았던 사회의 분위기는 학교라고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오늘 만났던 형들은 모두 젊은 투사들이었고 자신을 던지며 부당한 일들에 맞서 싸웠었다. 그 틈새에서 늘 이어폰이나 귀에 꽂고 다니며 음악을 할 생각만 했던 나를 이해해주고 오히려 배려해줬던 사람들도 그 형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공적으로 사적으로 빚을 졌다. 그런 부채의식은 평생 지속된다. 굳이 갚으라고 하는 사람은 없는데도.

오래된 건물의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 새로 생긴 길을 오고가는 학생들의 모습은 분주해보였다. 제법 굵어진 나무 한 그루, 매점으로 쓰였던 낡은 건물의 벽돌들도 모두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늦여름의 햇빛은 따뜻했고 그늘 아래에서 부는 바람은 시원했다.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았다. 기억하고 있는 일들은 너무 흐릿했다. 낯익은 장소에서 느껴보는 생소한 기분들이 돌아다녔다. 떠올랐던 것들을 써두고 싶었는데, 몇 번 시도를 하다가 그만뒀다. 서로 맞춰지지 않는 조각들같은 생각들이었다. 기분과 느낌은 그것대로 지니는 편이 나을 때가 많았다. 따뜻한 햇빛과 선선한 바람을 기억해두자, 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는 잘 기억할 수 있다.

집에 돌아올 때엔 일부러 국도를 타고 느릿느릿 운전했다. 꼬불거리는 도로 위에 차들이 없었다. 조용한 오후였다. 함께 와준 아내와 함께 오랜만에 한적하고 고즈넉한 드라이브를 했다. 컨테이너로 꾸민 커피집을 발견하고 멈춰 서서 찬 커피도 한 잔 사서 마셨다.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왜 나는 그 형들과 사진 한 장 함께 찍어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자신의 모습을 담는 사진을 찍는 일에 무감하다보니 아쉬운 한 컷을 얻어놓지 못했다. 이제 사람을 만나면 함께 사진 찍어두는 일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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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5일 토요일

춘천 공연.


오랜만에 잘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가뿐하였다.
미리 챙겨둔 짐들을 들고 일찍 출발했다. 커피를 가득 담아 운전하며 마셨다.
일찍 도착하여 주차를 하고 공연장 부근에 있는 수제햄버거집에서 햄버거와 콜라를 먹었다.
리허설을 마친 후에는 긴 대기시간 동안 멤버들과 근처 커피집에 모여 앉아 한적하게 잡담도 나눴다.

대화 중에 민열이가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던 이야기를 했다. 그 바람에 각자의 군복무 시절 얘기가 이어졌다. 나는 무슨 말을 보태려다가 그냥 삼켰다. 춘천은 내가 근무했던 고을이었다.
그동안 춘천에 와서 공연을 여러번 했다. 제대 이후 처음 악기를 들고 춘천에 다시 왔을 때엔 기분이 묘했었다. 내 기억 속의 춘천은 밤샘과 야근, 고생스런 훈련, 음악을 듣고 싶어 외출시간 내내 쏘다녔던 중앙로터리 부근 골목길의 냄새들이었다. 2006년에 광석형님과 공연하러 왔던 여름이 기억났다. 몇 년 후부터는 지금의 밴드와 함께 공연을 하러 왔다. 그 후 춘천에서 녹음을 하기도 했고 콘서트를 하기도 했었다. 간혹 누군가들의 세션을 하기도 했다. 오랜 친구들과 블루스 공연을 하러 이곳에 왔던 것이 불과 작년 11월이었다. 그것들이 모두 무척 오래된 일인 것처럼 여겨졌다.

오늘은 그런 감상들은 희미해지고 근화동 공지천 앞 습한 공기를 들이쉬며 줄곧 악기 생각만 했다. 짧은 공연이지만 시작 전에 연습을 하고 싶었었다. 한쪽 손목에 다시 통증이 생겨서 어제 하루는 악기를 손에 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기실은 무대 뒤 천막이었고 그곳은 대화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란했다. 이어폰을 연결할 수 있는 연습용 장치를 굳이 구입해야 좋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감정의 대부분들이 무뎌지고 시큰둥해진 느낌. 설레임도 불편함도 없는 기분이었다.

연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에는 일부러 46번 국도를 타고 느리게 운전하며 음악을 들었다. 처음에는 팟캐스트를 틀어놓았다가 누군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피로해졌다. 가로등이 꺼져 어두운 곳이 많았다. 습한 기운에 앞유리에는 김이 서렸다. 새로 나온 옐로우자켓의 음반과 피아니스트 Shaun Martin 트리오의 앨범을 들었다. 집앞에 도착할 무렵에는 루빈스타인이 연주한 쇼팽을 듣고 있었다. 차분한 토요일을 보낸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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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3일 목요일

일상.


오전에 볕이 가득한 베란다 창가에는 고양이들이 모여 자리를 잡고 햇빛을 쬔다. 그늘이 움직이면 자다가도 슬며시 움직여 볕이 드는 바닥이 좁아질 때까지 쉰다.
그루밍을 하고 하품도 하다가 창밖으로 새라도 날면, 꼭 해야할 일이 생긴 것처럼 일제히 귀를 쫑긋한다. 그러나 그것 뿐, 잠시 잠을 깬 고양이들은 먼지 없는 하늘을 보다가 아래쪽에 지나다니는 사람과 자동차를 구경하며 오전을 보낼 때가 많다.


집안의 고양이들은 함께 무더운 여름을 또 한 개 지나보냈다. 계절은 갑자기 변하고 세월은 나는 듯 달려간다. 까망이 막내 고양이는 꿈이라도 꾸는지 잠꼬대를 하며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고양이들의 위치를 모두 확인하고, 밤중에 돌아올테니 집안의 불 하나는 켜두었다. 그릇에 사료와 물을 채워주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 신발은 현관문 밖에서 신었다.

6번 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달려가는 아침, 차창을 열었더니 바람이 찼다.
이제 곧 완전히 가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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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2일 수요일

고양이 가족.


월요일에 자동차를 수리하는 동안 대기실에서 서성거리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정비공장에 이웃한 집의 기와지붕 아래로 무엇인가 보여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고양이들이 볕이 드는 곳에 푹신한 낙엽을 침구 삼아 곤히 자고 있었다.


어린 고양이 둘은 서로 부둥켜 안은채로, 엄마로 보이는 고양이는 곁에서 혼자 웅크린채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슬레이트 담 건너에는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는 소리,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 다양한 엔진소리들이 소란했는데 고양이들은 나뭇잎 사이로 지나는 바람소리를 벗삼아 쿨쿨 자고 있었다. 엄마 고양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어려보였고, 아기 고양이들은 살이 토실토실하였다. 다행히도 잘 먹고 잘 자며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머물던 세 시간 동안 고양이들은 자세를 바꿔가며 자기도 하고 엄마 고양이는 잠시 자리를 비우기도 했었다. 그 작은 공간만큼은 고양이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편안하고 따뜻한 집으로 보였다. 일생동안 그들이 그렇게 평화로왔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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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1일 화요일

울주 공연.


긴 하루였다.
이른 아침에 출발할 때에 자동차의 엔진오일이 부족해져있는 것을 알았다.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먼 거리를 달려 약속시간 전에 도착하려면 지금 꼭 출발을 하여야 했다. 일단 운전을 시작하며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중부내륙고속도로의 한 휴게소에 경정비업체가 있었다. 그곳에 들러 우선 부족해진 엔진오일을 보충했다.
리허설을 마치고 다시 자동차의 시동을 걸어보았다. 보충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일이 더 이상 줄어들지는 않았다.

계속 그것을 신경쓰다가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다.

공연이 시작되고, 잠시 엔진오일이나 자동차에 대한 생각은 잊을 수 있었다.

원래 하루를 자고 다음날 집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어서 그 주변의 정비공장도 문을 열지 않는다고 했다. 공연을 마친 후 곧장 집으로 출발했다. 자동차의 계기판에는 오일이 부족하다는 경고등도 들어오지 않았고, 달리는데에도 이상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여 주차를 마친 후에야 마음이 편해졌다. 그날 하루동안 열 시간 반을 운전했다.

월요일에 정비업체에 가서 수리를 받았다. 필요한 소모품을 교환했고 이상이 있었던 오일팬과 필터들을 바꿨다. 일년만에 브레이크패드가 모두 닳아있었다. 그것도 교환했다. 자동차의 전체 주행거리는 21만 3천 킬로미터가 되었다. 내가 정말 운전을 많이 했구나, 생각했다.

울주에서의 공연은 즐거웠지만, 그보다 긴 시간 운전을 하며 들었던 음악들이 더 기억에 많이 남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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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3일 월요일

합주.


그 이전에 세션을 했던 기간은 빼고, 밴드 이름으로 함께 해온지 십 년이 되었다.
그동안 어떤 곡들은 백번, 혹은 그 이상은 연주해본 것 같다.
공연을 앞두고 항상 다시 처음부터 새로 합주를 하는 일은 기본이고 일상이다. 십여년 동안 수 없이 많이 연주해본 곡들이지만 언제나 새삼 새롭다. 그리고 세월과 함께 달라진다. 그런 것은 매번 신기한 기분이 든다.

이틀 전에 부모님의 일을 돕느라 몇 시간 밭일을 했는데, 삽질을 하던 중에 어깨에 통증을 느꼈다. 합주하는 동안 내내 어깨와 팔꿈치에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학교 개강과 함께 운동을 하지 못했던 탓일 것이다.

합주를 마치고 악기를 정리하면서 지난 십여년 동안 연주했던 몇몇 장면이 기억났다. 몹시 추운 겨울 눈을 맞으며 야외에서 연주할 때엔 왼쪽 손에 장갑을 낀 적도 있었다. 폭염이었던 여름날 공연을 마친 후에는 악기에 흘러내린 땀이 하얗게 굳어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초가을 날씨일 주말과 그 다음 주에 야외공연들이 약속되어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주면 소리가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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