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11일 토요일

빨리 지나가면 좋겠다.


매일 연주했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지금 정말로 일요일도 없이 매일 연주를 하고 있다.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올해 마지막 날까지 일정이 있다.
막상 매일 연주를 하고 있으려니, 쉬고 싶어진다.

이런 식으로 2004년이 이십여일 남았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라면 최소한 아무도 더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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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30일 화요일

만성불면.

정상적으로 잘 수 있는 날은 며칠되지 않는다.
일년 중 몇십 일 정도가 아닐까.

선잠을 깨고 땀을 흠뻑 흘렸다.

동이 틀 무렵에 나는 몇 가지의 일들을 선택할 수 있었다.
차를 마실 수도 있었고 다시 잠들 수도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밖에 나가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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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19일 금요일

겨울이 온다.

카메라가 고장나버렸다.
이미지를 첨부하지 않고 블로그에 무엇을 적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매일 밤 연주하고 새벽에 귀가하고 있다. 다시 완전히 밤생활로 돌아왔다.
서울의 강북을 밤새 달렸다. 하염없이 밀려서 다닐 때가 더 많다.
생활이 서울의 북쪽으로 바뀌다보니 다리를 건너 강남쪽으로 마실을 다니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어제 저녁에는 구불구불한 도로와 암호같은 표지판들 밑으로 그림처럼 바삐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어쩐지 이것이 정말 서울의 풍경이었지, 라는 생각을 했다. 정방형이 아닌, 큼직하지 않은, 폭력처럼 규격화된 입간판들이 없는 도시가 서울이 아니었었나, 하는.
서울에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꼬물거리며 밀려다니고 밥을 먹고 웃고 울고 빼앗고 상실하며 살 수 있는지.

돈벌이를 위한 연주일 때문에 손이 굳지 않으면 좋겠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늘 연습을 하고 있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오히려 짐이 되어버렸다. 내 성격 탓인지 배우는 사람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더 조바심을 내며 레슨을 하는 것 같다.

새벽에 창밖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어차피 존재는 외롭다.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면 금세 죽어버리는줄 알고 있다.
물건을 사고 술을 마시고 우정을 고르고 사랑을 구입하려하지만 어차피 존재란 것은 몹시 외롭다. 그것을 우선 인정하는 것이 참 어렵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새 물건이나 술잔이나 전화하면 불려나오는 친구들이나 욕심을 채우는 것에 있지 않다.

바람이 싸늘해졌다.
겨울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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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2일 화요일

카메라 고장.

며칠 전 아침에 카메라가 고장났다. 그것을 수리하여 알뜰하게 더 써보고 싶었다.
고객센터라는 곳의 전화상담원이 카메라의 모델 등을 묻더니 '새것을 사서 쓰시지 그러세요.'라고 했다.
그의 말이 맞긴 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잔머리를 굴리며 남을 이용하고 사심으로만 가득찬 사람들을 제법 많이 만나봤다. 그들이 밉다거나 싫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냥 인정해주는 편이다. 그래, 그렇게 살으시라, 하는 식으로.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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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24일 일요일

참을성.

한 해 동안 뭔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조금 더 참을성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든 사물에게든 웬만한 일로는 화가 나지 않는다. 흥분하는 일도 적다.
인격이 더 나아졌을리는 없다. 좀 더 멍청해졌거나 무감각해진 것 같다.
참을성은 늘었지만 똑똑해지지는 못하였다.
판단은 언제나 늦고 여전히 어리석다.

심야에 약속이 취소되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는데 자주 들르는 바에 잠깐 머무르기로 했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음악을 듣다가 집에 돌아오고 싶었었다.
그런데 평소에 상대하기 싫고 성가셔하던 사람들이 들어와서 부어라 마셔라 술을 먹기 시작했다.
상관하기 싫었다. 작은 소란이 일어났고 나는 창피했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창피했다.
예전에는 어울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 곁에는 앉지도 않았고 말대답도 하지 않았었다. 내가 언제부터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사람들을 대했다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일일이 응대를 했던 것일까.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레슨생이 사정이 생겼다고 하며 화요일로 약속을 옮겼으면 좋겠다는 전화를 했다.
다행하게도 아직 집을 나서기 전이었다. 오전 즈음에라도 전화를 해줬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날씨 좋은 가을 오후를 자는 것으로 보내버렸다.
몇 달 전부터 같은 꿈을 반복하여 꾸고 있다.
친구인지 누구인지의 집에 모임이 있어서 초대를 받아 참석한다. 아는 얼굴들도 있지만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다. 듣고싶지 않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밖으로 잠시 나와 혼자 산책을 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얼굴이 똑같이 생긴 두 녀석이 (꼭 한 놈은 키가 작다) 내 앞에 나타나 가로막더니 내 얼굴에 가루를 뿌린다. 그러면서 '다 너를 위한거야'라고 말한다. 가루는 흰색일 때가 많다.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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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23일 토요일

다급했던 이야기.

약속 한 시간 전에 지하 3층 주차장에 내려갔다.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운전을 하며 들을 음반을 골라 틀어놓은 뒤 유유히 출발했다. 시간은 충분했다.
그런데 지하 3층 주차장 출구가 사라졌다. 하나뿐인 주차장 출입구에 셔터문이 내려져있었던 것이었다.
지하 3층에서 1층 수위길까지 뛰어 올라갔다. 관리해주시는 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다시 지하 3층에 내려가 직원이 와주기를 기다렸다. 1분이 아까왔다. 만일 10분이 지체된다면 지각을 할 것이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한참 동안 11층에 머물러있었다. 십여 분을 기다린 후에야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1층까지 왔다가 다시 올라가버렸다. 나는 다시 1층 수위실에 뛰어 올라갔다. 관리인 아저씨는 인터폰으로 누군가에게 아까와 똑같은 말을 다시 했다.

직원이 내려와서 셔터문을 열어준 것은 아홉 시 오십 분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왜 늦게 오셨느냐고 했더니 간단한 대답을 했다. '밥 먹느라고요.'

나는 미친듯이 도로를 달렸다. 분명히 과속단속 카메라에 촬영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분 늦게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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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15일 금요일

리듬이 망가져있다.



이틀은 아침 일찍 잠들었다.
뒤이어 이틀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정말 정신이 없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후에 비로소 차 열쇠를 두고 나온 것을 알았다.
다시 10층까지 올라가 방을 뒤지다보니 차 열쇠는 등에 매고 있던 악기가방 안에 있었다.
한숨을 쉬며 다시 지하 3층 주차장으로 가던 중, 이번엔 확실히 전화를 두고 나온 것을 알게되었다. 다시 10층으로 올라가 전화기를 찾아내고 더 잊은 것은 없는지 확인을 했다.

두 개의 악기를 들고 나와야 했던 탓에 이마엔 땀이 맺혔다. 연주를 두어 시간 앞두고는 '아파서 못 오겠다'는 전화를 한 드러머 때문에 진땀을 흘렸다.

새벽까지 이어질 음악 소리를 생각하며 저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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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14일 목요일

이번엔 감기에 걸렸다.

지난 해에는 앓았던 적이 없었다.
정신적으로는 바닥을 기어다녔는데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던 탓이었는지 몸이 아프지는 않았다.
올해 여름부터, 자주 많이 아팠다.

어제 밤에는 며칠 고생하던 배앓이가 낫는 듯 하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겨 새벽에 옷을 얇게 입고 어두운 거리를 뛰어 나갔었다.
그것이 나빴나보다.
얇은 외투를 다른 곳에 벗어두고 반팔 셔츠만 입은채 되돌아와야했다.
또 배탈이 나서 중간에 택시에서 내려야했다.
정신을 추스리겠답시고 몇 킬로를 걸어서 돌아왔다.
결국 감기에 걸렸다.

이제는 버텨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날이 밝으면 꼭 약을 사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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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29일 수요일

추석.

달 밝은 가을밤이었다.
추석. 옹졸한 가족이기주의와 사욕의 날.
자기만족, 생색, 이기심, 타인에 대한 무관심, 보상심리가 송편으로 빚어져 밥상 위에 올랐다.

이유없이 새벽부터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3천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안주로 삼아 먹고 있었다. 조금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제법 느끼하고 괜찮다.

아침에는 누군가가 마음을 다칠까봐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술을 마신 김에 이곳에 적어둔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분들에게 나는 우호적이지 않다.
당신의 딸이 선생이라면, 일반적인 인문학적 상식은 공부해뒀어야 맞다. 그것을 미처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의 인성은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덜 무식해지려는 노력은 해야 옳다.
우리 집안의 교사들 중 정의와 사랑,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인격의 고양을 가르칠 사람들이 몇 분이나 될까. 한 분 정도일까.

그놈의 종교. 죽음을 저당잡아 벌이는 다단계 사업.
무엇을 골랐더라도 당신들의 본능은 하나일 뿐이다. '아무튼 내가 좀 잘 살았으면 좋겠다.'이다.
역겹다. 구실을 만드는 것은 익숙하지만 역사의식이나 인륜은 먼 곳에 두고 그만 잊었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계발하지 못했다. 내 자식을 사랑하고 내 부모를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지만 본질은 전부 너희들의 욕망이다. 명절은 욕망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 난 자들이 모여서 음식을 나눠먹기가 되었다. 최소한 빼앗아 먹기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정치 이야기, 얼마든지 해도 좋다. 정치란 원래 안주거리이다. 그러나 토할 것 같으니까 제발 사회정의 운운하지 않으면 좋겠다. 정의를 위해 피를 흘렸거나 죽었던 사람, 우리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 출세를 위해 애쓰다가 잘못된 줄에 섰던 사람들이나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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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27일 월요일

구멍이 났다.



어제 오전부터 조금 전 아침까지.
아아, 서울은 넓다. 도시의 동서남북을 옮겨 다니며 200킬로미터는 달렸나보다.
아침에 해가 솟을 즈음 한쪽 바퀴가 주저앉았다.
보험회사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겨우 난감한 상황을 모면했다.
도움을 준 친구에게도 고맙고 추석연휴인데도 이른 시간에 문을 열어준 정비업체에게도 고마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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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31일 화요일

태능신앙촌.

태능 선수촌은 신앙촌인가보다.

가관이다.
기독교 국가, 기독교 신자들이 대부분인 나라의 선수들도 한국의 선수들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적 없다. 이슬람 국가의 선수들이 경기에서 승리할 때마다 알라를 외치는 모습을 본 일 없었다.

각 기독교 관련 사이트에도 운동선수들이 기도하는 모습에 대한 글이 올려져있었다. 읽으나 마나 그들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유치하고 졸렬하다고 생각했다. 너희들의 신은 고작 금메달을 따주거나 8강, 4강에 오르게 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면 서울시를 봉헌 받거나.

이원희는 한판승으로 상대를 누르고 무릎을 꿇더니 기도를 하고 팔을 벌리는 몸짓을 벌였다. YTN에 출연하여 그 모습에 대해 백지연이 물었더니,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온전히 바치는 몸짓'이었다고 했다. 경기 중 힘겨울 때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떠올렸'다고도 했다.

태권도의 문대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멋있게 이겼거나 힘겹게 이겼거나 간에, 승리한 직후 관중석에 올라가 태권도 관계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아는 사람들을 껴안고 기쁨을 누린 것도 사사로울 뿐 밉게 볼 필요는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꿇어 앉더니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선수생활 도중 절에 숨어들어가 잠적한 적도 있었다가, '선수촌'에서 후배로부터 전도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했다.

역도선수도, 축구선수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하나님은 종목별로 영광을 받느라 무척 바빴다. 예수를 매달았던 유태인들은 모두 게임에서 졌어야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선수들의 모습을 두둔하면서 '우리나라의 신앙양태가 다른나라와는 다르기 때문'이라고, 어떤 목사가 컬럼을 쓴 적이 있었다. 지난 월드컵 때의 일이었다. 그의 긴 글 중에서 위의 한 줄 문장만은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돈이 모이는 대형교회들과, 폐쇄적이고 부패한 체육관료주의와, 한 번도 정의로왔던 적은 없었던 언론들이 만들어내는 기이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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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27일 금요일

해괴한 시비.

신경쓰지 않을 나이도 되었는데, 오랜만에 해괴한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부인하고 싶지도 않고 부정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국 음악인들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어떤 이유와 핑계를 들어 미국의 문화에 잠식된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다. 나는 좋은 음악을 찾아서 들었던 것이었다. 그대신 너희들은 내 질문에 대답을 해줘야 한다. 나는 그 시절의 누구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어야 옳았던 것이었느냐는.

스콧 피츠제랄드를 읽으며 자랐다거나, 제임스 조이스에 빠져서 청춘을 보냈다는 사람에게는 미국문화에 젖었다는니 아일랜드가 어떻다느니 말하지 못하면서, 보들레르와 랭보를 입에 달고 다니는 이들 앞에서는 문학이니 시이니 아무 언급도 하지 못하면서.

이분법적 사고, 왜곡된 정의감, 진짜인줄 알고 지니고 사는 애국심, 무엇보다도 무식하여 용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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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9일 월요일

엄마에게 라디오를.



엄마의 생신이었다.
나는 라디오를 선물해드렸다.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이지만, 나에게 엄마와 라디오는 늘 연동되는 단어로 되어있다.
아주 아주 꼬마였던 시절에 엄마는 나에게 자주 라디오를 틀어줬다. 대부분 사람의 목소리보다는 연주음악이 흘러나오는 선국으로, 주로 기억하는 것은 현악기와 피아노였다.

십대가 되어서야 나의 라디오를 가지게 되었을 때에, 나는 스폰지를 물 속에 처박아버린 것처럼 음악에 빠져들었다. 어쩐지 한 번은 들어봤던 것 같은 음악들이 종일 나를 적셨다.
정식 음악교육을 한 번도 받아보지 않았던 나에게, 꼬마 시절 엄마가 틀어줬던 라디오가 말하자면 음악수업이었던 셈이다.

다행이다. 내 엄마는 다른 아무 기능도 없는 작은 라디오를 받고 좋아하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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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26일 월요일

원래 다 그런 것.

나는 작가의 말을 신뢰하지 않지만, 어느 소설에서 읽었던 구절을 오래 기억한다.

누군가에게 외면당하고 버림받았던 사람은 공교롭게도 자신이 반대편의 입장이 되었을 때에, 누군가를 외면하고 등돌리는 일을 쉽게 한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그것은 심리적인 문제일까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학습되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런 이유들 때문이 아니라, 그냥 사람 사는 일들이 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래 다 그런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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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24일 토요일

두통.

훗날 지금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았을 때에, 이렇게 생활하면 안된다는 교훈이 되면 좋겠다.

저녁에 몽롱한 상태로 귀가했다.
만성 두통에다, 신경성인지 뭔지는 몰라도 위통이 함께 심했다.
습도 98%, 실내온도 섭씨 30도의 한 평짜리 방 안에 하루 여덟시간 앉아있었기 때문이었을거다.

새벽에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욕실에 들어가 토해보려고 애쓴 것 같기도 하고, 이 정도로 더울 수 있다니 신기하군... 하면서 몸을 식히려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가 미처 옷을 안 벗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혼자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젖은 옷이 아직 욕실 바닥에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뭔가 어떻게 수습을 하고 자리에 누워 잠을 잤을 것이다. 그 과정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침, 어스름한 햇빛이 시작되고 있었다.
굶었더니 뱃속이 조금 편해졌다. 아직 머리가 아프긴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아플테니까 신경쓰지 말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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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21일 수요일

습기가 가득.


습기가 가득한 여름날이다.
몸과 마음이 축축하다.
그래도 가끔씩 멀리서 친구가 찾아와주고, 심심할까봐 소나기도 내려준다.
비가 오거나 말거나 나는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다.
언제 쓰일지는 아직 모르지만, 재활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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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20일 화요일

집안 일.


퇴근길에 주차장에 갔더니.
절묘하게 접어놓았던 거울에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다.

'시키는대로...'라는 글귀를 본 순간, 집에 밀려있는 빨래와 설거지감, 청소할 것들이 생각났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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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15일 목요일

망가졌다.


하지 말라는 뜻인지, 새벽에 갑자기 정적을 깨고 굉음이 들렸다.
깜짝 놀라 일어나 불을 켜보니 악기의 브릿지가 부러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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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12일 월요일

친구 형.


나는 선배, 후배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더불어 나이, 인맥 등을 따지는 관습에 거부감이 심하다.
그 덕분에 나는 오랜동안 함께 연주하며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의 나이를 여전히 모르고 있다.
언제나 진짜 '선배'로서의 존재감을 주는 형들의 정확한 나이도 잘 모른다. 사실은 관심이 없다.

이 형도 그런 사람. 일부러 찾아와줘서 반가왔다. 가까운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둘이 함께 저녁으로 냄비라면을 사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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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지난 주 주말, 정오 즈음에 금발의 여자와 이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내는 깁슨 레스폴들이 나란히 걸려있는 벽 앞에 서서 한참을 기타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기타를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흐뭇하고 행복해보이는 것같았다. 아마 내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인사를 나누고 사내가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기타를 고향에 두고 왔다. 깁슨 레스폴 커스텀인데, 어릴적부터 그것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 그 기타는 나와 동갑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팔뚝을 걷어 문신을 보여줬다.

그의 친구 중에는 펜더 텔레캐스터를 정교하게 문신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는 그런 잡담만 하다가, 여전히 웃음이 가득한 얼굴의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가게에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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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2일 금요일

오랜만에 연주.


고압적인 분위기의 연주자들 틈에 한 자리 잡고 앉아서, 한 해 전 이맘때를 생각했다.

혼자 있어서 외롭다는 것은 거짓말은 아닐지 몰라도 착각에 가깝다.
오케스트라의 한 구석에 비스듬히 앉아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잘 할지 몰라 긴장하고 있는 순간이 정말 외로왔다.

이 날의 연주는 방송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방송이 되겠지만 그 테잎은 파기처분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날 너무 연주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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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26일 수요일

예쁜 색이었다.


내가 화분과 식물을 정성껏 가꾸지는 못한다.
게으름을 극복하려면 애정이 있어야 하는데, 애정이란 것도 내 몸과 마음이 건실할 때야 가능하다.
이른 아침에 볕이 좋길래 화분을 창가에 옮겨놓고 물을 줬다.
그 하루 사이에 더 진한 녹색으로 변한 것이 신기하고 기특했다.
이름은 뭐더라... 헬리오트러프라고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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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24일 월요일

5월의 마지막 주.


새벽을 지나 동쪽에서 햇빛이 시작될 무렵에 잠들었다.
그럴 때엔 낮에 할 일이 없어도 어김없이 아침에 한번은 눈이 떠지곤 했다.
그런데 오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나가야하게 된 이후로 늦잠을 잔다.
지나가지 않았으면 했던 오월도 이제 막바지이다. 여름을 준비해야한다.

개포동의 모 복지관, 조치원의 어떤 대학 캠퍼스, 용인의 무슨 PC방, 여의도의 빌딩 동관 10층 등등에서 이 블로그에 계속 접속하는 분들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내 홈페이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해주는 사람들이다. 게시판에 흔적을 남겨주면 좋겠는데 아마, 안 남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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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12일 수요일

요즘 이렇게...


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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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4일 화요일

비가 오면.


반사작용처럼, 이제는 비만 내리면 몸과 마음이 가라앉는다.
특별히 다른날보다 더 피곤할 이유가 없는데도 그렇다.
건강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 먼저인 것 같다.
나는 마음의 상태에 몸이 무척 민감하게 반응하는 타입인 것 같다.

빗길을 운전하다가 그만 도로 위에 차를 세우고 드러누워버리고 싶었다.
가까스로 어느집 담벼락 곁에 주차를 하고 알람을 맞춘 다음, 누워서 한숨 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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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21일 수요일

밥벌이.


원래부터 나는 혼자 돌아다니기 좋아한다.
이것을 혈액형이 AB형이라서 그렇다고, 한 친구가 말했었다.
나는 혈액형의 타입으로 사람의 성향을 구분하는 것은 엉터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왜 엉터리인지는 설명을 할 수 없으므로, 친구의 말이 그르다고만 하기도 어렵다.

내가 멋대로 정해둔 혼자만의 일정이 끝나고 나면 당분간은 무엇도 하기 싫어질 때가 있다.
제일 귀찮고 싫은 것은 혼자 밥을 차려먹는 일이다.
사먹기도 싫고 해서 먹기도 성가셔서 굶고 만다.
이것은 게으르다기 보다는 책임감이 결여된 생활일 것이다. 어른이 덜 되어서 그렇다.
밥벌이라는 것은 돈을 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끼니를 스스로 챙겨먹을줄 아는 것까지 완성해야 밥벌이일테고, 밥벌이를 제대로 해야 독립된 인간이 될 것이다.
나는 아직 멀었다.

풀처럼, 물 한 모금 햇빛 한 줌으로 살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가, 쟤들도 나름 밥벌이를 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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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밝은 빛, 따스한 공기가 즐거움을 준다.
재미있는 삶이라는 생각도 했다.

오전에만 햇빛이 들어오는 방이기 때문에 일출을 넘기면 절대로 잠들기 어렵다. 나는 어두워지면 활동하고 밝아지면 잠들기 때문이다.
어제 아침에는 집을 나서면서 화분을 창가에 놓아두고 물을 한 컵 부어줬었다.
오늘 아침에 보니 꽃이 피었고, 잎은 더 밝은 녹색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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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17일 토요일

노브라.


나는 노브라를 옹호한다는 정도로는 조금 부족하고, 적극 지지한다.
한번도 남자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나는 십대 시절, 등교길에서 또래의 여자아이들의 등짝을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었다. 뭐라고 그렇게 두터운 천과 철사로 가슴을 칭칭 감고 다녀야 하는 걸까, 했다. 그것이 규칙이고 지켜야할 관습이라면 이게 무슨 문명사회인가, 했었다.
맨살이 옷에 스치거나 하면 민감하고 아플 수도 있어서 그렇다면 할 수 없어도, 다른 이유로 그렇게 얽매여야 한다면 코르셋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브래지어를 착용했을 때에 더 편하다거나 또 다른 실용적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경우에, 도대체 왜 여자들에게 가슴을 동여메도록 강요하는 것인가. 이것은 우습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 여자라면 그렇게 말하겠느냐'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여자는 네 것 내 것이 아니고 그냥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그랬었다.
사내들의 세상은 여전히 우둔하고 무식하며 질이 낮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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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28일 일요일

길바닥에서.


아스팔트 위에 앉아서 양초를 쳐다보고 있었다.
과거의 일에 집착하는 것과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있을까.
지나온 행적에 대한 기억도 판단도 정의도 내리지 못하면서 오늘을 바르게 살 수 있을까.
뭐 어떻게든 숨이 붙어있으면 살아지기야 하겠지만, 그것으로 좋다고 하면 한심하지 않은가 했다.

행동하지 않아도 좋다. 보이지 않는 선의 어느쪽에 가서 꼭 서있어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선이란 각자 긋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생각은 스스로 할줄 알면 좋겠다.
서툴더라도 판단하려고 애써봐야한다. 미숙하더라도 고민을 하여 답을 얻어내려고 해봐야한다.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되는대로 쓸려다니며 살다보면 남이 정해준대로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을 쥐락펴락하려는 무리들의 도구로 쓰여진다.
옳지 않은 것, 비열한 것, 모순이나 기만 앞에서 반드시 맞서 싸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생각하는 법은 스스로 배워야한다.
그게 사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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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21일 일요일

광화문에서.


생각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멈칫 고개를 들었다가 모자에 가려져 있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 내가 지금 이걸 하려고 여기에 와있었지... 하고 사진을 한 장 찍어뒀다.

사실 나는 내 한 몸 일상도 챙기기 힘든 상황이다.
이곳에 모여있는 사람들 중에도 나같은 상황인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더 힘들거나 더 곤궁한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아스피린을 사서, 두 알을 먹었다.

여섯시간 동안 광화문에서 두 개의 양초를 다 태웠다.
내 자리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함께 나와있는 아이들, 손을 꼭 잡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노래를 부르던 커플, 내 조카 또래의 어린이들과 젊은 엄마들이 눈에 자주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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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8일 월요일

신촌 기찻길.


맑은 날씨였다.
신촌을 지나다가 기찻길 앞에 정차했었다.
기차가 지나갈 때에 사진을 찍었다. 시시한 장면이었지만 순간 몇 가지의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스쳐지나갔다.

기찻길은 없어질 예정이라고 했다.
아마 이 길 위에서 저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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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6일 토요일

좋은 음악.

같은 음반을 오래 듣고 있는 일은 드물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음반은 아마도 15년 전 팻 메스니 그룹의 음반이었던 것 같다.

요즘 한 달 내내 매일 몇 번씩 리차드 보나의 음악을 듣고 있다. 들을 때마다 기쁘고 기분이 좋아진다.
이 사람은 '그 자신이 음악 그 자체인' 인물인 것 같다.

좋은 음악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들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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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24일 화요일

공연.


지난 주 토요일에는 부평에서 공연을 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많이 불었었다.
작은 공연장에 사람들이 가득 앉아있었다. 연주는 편안했고 공연도 좋았다.

언제나 해야할 일들이 밀려있다. 사실은 그렇게까지 바쁘지 않다. 바빠지고 싶어서 일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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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 31일 토요일

원주에서 공연했다.


벌써 한 해가 시작된지 한 달이 지나가버렸다.
아직 자리잡지 못한 일들이 많이 있다.
지금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한 것 같다.

지난 번에 원주에서 공연할 때에 분장실에 찾아와 광석형님께 촬영을 허락받았던 분이 있었다. 일부러 찾아와 허락을 얻을 일도 아니었는데, 그 점잖은 말투와 행동이 인상깊었다.
그 '들빛'이라는 분이 그날의 사진들을 보내주셨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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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 21일 수요일

지금보다 어릴 적.


연거푸 옛 기억속의 소소한 일들이 꿈에 보이곤 한다.
드물게도 아주 오래 전의 일들이 어제 겪었던 것들처럼 꿈속에 나타난다.

꿈 때문에 잠을 깨고 일어나서 물을 한 잔 마시고, 컴퓨터를 열어 사진을 보았다.
1987년 10월의 사진이었다.

나는 정말 음악을 무척 하고싶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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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 17일 토요일

마이너인가.


새 물건을 국내가격의 반값에 샀다며 혼자 대견해했다.
5년 넘게 지니고 있던 PDA는 서랍 안에 넣어뒀다.

그런데 기껏 새로 구입한 이 기계도 아직 국내에서는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PDA 동호회에서 이 기종을 검색했더니 댓글에 이런 말들이 있었다.
"특이한 제품을 좋아하시네요"
"취향이 독특하네요"

이 나라에서 불편을 겪는 맥 오에스를 쓰고, PDA 마저도 마이너 취급을 받는 것으로 고른 것인가. 나는 어쩔 수 없이 마이너인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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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 7일 수요일

새해 첫 공연.


올해 첫 공연을 했다.
이번 공연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이분들과 새해의 첫 공연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좋았고, 감사드린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가슴속에 함께 연주한 분들에 대한 존경심을 담고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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