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31일 토요일

한 해가 끝났다.


 올해 2월부터 쓰기 시작한 공책 열 권에 글을 가득 채웠다. 일 년짜리 다이어리 책에도 거의 모든 기록과 메모를 빼곡하게 적었다. 컴퓨터로 글을 써왔을 때와 달리 나중에 다시 기록을 찾아볼 때 검색어를 입력하여 원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공책마다 끝 장엔 날짜별로 키워드를 적어 정리해뒀다. 그것을 죽 훑으면 지나보낸 한 해의 일들이 순서대로 보였다. 한 달에 한 권씩이라고 생각하면 매년 열두 권의 공책이 필요한 셈이니 미리 공책들과 잉크를 주문하기로 했다.

전염병이 돌아 거의 아무 일도 못했던 두 해를 보낸 뒤, 올해에는 그나마 일을 할 수 있었다. 장거리 운전은 전보다 쉽지 않았지만 옴짝달싹 못했던 앞 해의 일을 생각하면 고맙게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새해를 맞는다고 하여 무슨 특별한 느낌 같은 것은 없다. 기껏 나이가 느는 일이 이렇게 고될 일인가 하였다. 달력의 맨 끝 날짜에 서서 곧 시작할 새 연도를 생각하면 거의 모든 것에 희망도 기대도 갖기 어려운 기분만 든다. 


2022년 12월 30일 금요일

올해 들었던 음악들

 2022년에 나온 앨범 중에서 자주 들었던 음반들을 모아봤다.


Falling Grace. 로맹 필롱, 요니 젤닉, 제프 발라드 트리오의 연주는 공간이 많아서 듣기 시작하면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 든다. 세 사람의 연주가 다 좋지만 드러머 제프 발라드의 안정감이 이 트리오를더 중요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네번째 곡 Lament 를 한동안 매일 들었다.


노인이 된 싱어송라이터의 노래가 값지다. 여전하지 않고 변해진 목소리가 근사했다. 세번째 곡 Stranger 가 좋아서 가사를 보면서 더 들었다. 미국인이 노래할 수 있는 멋진 내용이군, 했다. 누알라 케네디와 듀엣으로 부른 네번째 곡 Swannanoa 도 듣기 좋았다. 


키스 자렛이 2016년에 프랑스에서 했던 공연 녹음이 올해 앨범으로 나왔다. 열 세곡의 수록곡들은 제목 대신 로마숫자로 붙여진 번호다. 모두 즉흥 연주이기 때문이다. 쾰른 콘서트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 이후로 이런 음반을 들을 땐 나에게 인상적으로 들렸던 곡에 나만의 제목을 붙여보기도 했었다. 번호도 제목일 수 있을텐데 신기하게도 나름의 이름을 붙이면 생각이 나서 찾아 들어볼 때 기분이 다르다. 그런데 이젠 그런 일도 그만 뒀다. 매번 남의 연주에 내멋대로 이름을 붙여보는 것도 에너지가 너무 드는 일이다. 이 앨범은 한 시간 십분 분량이어서 두어 번에 나누어 잠들기 전에 듣곤 했다.

이 미국인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처음 들었다. 에리크 사티와 로베르트 슈만의 곡과 François Couperin, Philip Glass 의 음악을 연주했다. 나는 쿠페렝이라는 작곡가의 음악을 이 음반으로 처음 들어보았다. 아무 정보 없이 듣기 시작했다가 그날 종일 틀어두고 있었던 앨범이다. 수록곡의 순서도 좋았다.

기타리스트 로맹 필롱의 또 다른 트리오는 드러머 브라이언 블레이드와 함께 하는 팀이다. 제프 발라드와 함께 했던 앨범 Falling Grace 는 밤중에 많이 들었다면 이 앨범은 아침 시간이나 장거리 운전을 할 때 자주 들었다. 로맹 필롱, 제프 덴슨, 브라이언 블레이드 트리오의 앨범은 2019년에 나왔던 Between Two Worlds가 있는데, 그것도 꽤 좋았다.

듀란듀란만큼 꾸준한 밴드도 드물다. 이 앨범은 분명히 올해 시월에 나온 것인데 몇 곡은 마치 듀란듀란의 옛 앨범 중에서 들어봤던 것처럼 들렸다. 그러고보니 이 밴드처럼 꾸준하게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팀도 많지 않다. 두번째 곡 All Of You와 여섯번째 곡 Beautiful Lies가 맨처음 좋았었다.

이 기타리스트는 유튜브에서 펠릭스 파스토리우스와 연주하고 있는 영상을 본 뒤에 검색하여 찾아 들었다. 스탠다드 곡들인데 전부 진지하고 내용이 알차다. 열 곡을 순서대로 몰입하여 듣게 됐었다. 끝 곡 Solar가 인상 깊었다.

왜 제목이 연주자의 이름인가 하면, 존 스코필드 혼자 연주했기 때문이다. 이 앨범도 들어보기 전에 유튜브에서 그가 앰프 두 개를 사용하여 연주하고 있는 영상을 먼저 보았다. 어쩐지 뭔가 다른 일을 할 때에 틀어놓았던 경우가 많아서 잘 집중하지는 못했던 앨범이었다. 좋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이 앨범에 대한 이야기도 써둔 적이 있었다. 이 쿼텟이 내한한다면 반드시 구경하러 갈 것이다.

재즈라고 한다면 할 수 있겠는데, 그래서 재즈가 아니라고 우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음악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내 감성으로는 자리를 잡고 앉아 성의있게 듣지 못했다. 그런데 문득 그 분위기가 떠오를 때가 있었어서, 가끔씩 한 두 곡을 골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리스트에 빼먹지 않고 넣은 이유다.

나는 오르간 트리오는 잘 듣지 않는데, 이 앨범은 제외다. 래리 골딩스의 오르간도, 피터 번스타인의 기타도 정말 좋았다. 빌 스튜어트는 말할 필요도 없다. 앨범 전체가 다 좋았다. 세 사람이 삼십년 전에 냈었다는 앨범도 찾아서 들어보고 싶어졌다. 

나는 현악 사중주의 연주를 직접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슈베르트 음악을 검색하다가 들어볼 수 있었던 앨범인데 듣고 있다가 급히 헤드폰을 쓰고 처음부터 다시 들었다. 그리고 아직 끝까지 다 못들어봤다. 쉰 다섯 곡이 여섯 시간 이십분 동안 이어지는 앨범이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멈췄는지 기억했다가 다음 주에 다시 이어서... 라는 방법으로 듣고 있다. 아름답고, 뭔가 의욕을 일깨워 주는 연주였다.

처음 Eddie 라는 노래가 싱글로 먼저 공개되었을 때 듣고 깜짝 놀라며 좋아했다. 나는 RHCP 의 팬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앨범은 꽤 여러 번 들었고 들을 때마다 즐거웠다. 솔직히 이 정도면 베이스를 연주하는 사람을 위한 앨범 아닌가. 마이클 피터 발자리 선생님, 존경합니다.

세 곡 짜리라서 여러 번 들었다. 더 길었다면 많이 듣지 않았을 것이다. 연주도 녹음도 전부 완벽하다. 완벽한데, 많이 듣지는 못하겠다. 크리스챤 맥브라이드 탓은 아니다. 마이크 스턴 때문이었을까. 이 EP는 24-bit/192kHz 로 녹음했다는데 음질이 좋은 것은 좋지만 음량이 너무 크다.

이 기타리스트의 이름은 줄리앙 라즈라고 발음하는데, 한글로 검색하면 '라게'라고 써둔 것만 보인다. 앨범 전체를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작년에 나온 앨범은 아직 못 들어보았고 그 전 해에 나왔던 Love Hurts는 듣다가 그만뒀었다. 이 앨범은 좋았다. 작곡을 잘 하는 기타리스트이다. 빌 프리셀이 코드를 연주해준 것도 좋았다.

9년 전 A Rise in the Road 앨범부터 이 밴드는 뭔가 달라졌다. 나는 지미 하슬립의 연주를 좋아하지만 어쩐지 그가 팀을 떠난 이후 이 쿼텟의 음악이 더 좋아진 기분이다. 거의 2년 간격으로 꾸준히 앨범을 내주고 있는 것이 대단하다. 베이시스트 데인 앨더슨의 연주도 많이 좋다.

봄에 나왔던 재즈 앨범 중 제일 좋았다. 사실 이 기타리스트의 연주를 집중해서 오래 듣고 있으면 기운이 빠진다. 완벽한 연주가 주는 감동이라는 것도 있긴 하지만 도무지 틈이 없다. 듣다보면 어느 순간 따라가기 힘들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래서 제일 좋았는데, 여름 이후 거의 들어본 적 없게 되었던 앨범이다. 그래도 시디를 모으듯이 앨범을 낼 때마다 다운로드해두는 뮤지션이다.



2022년 12월 19일 월요일

월드컵, 녹음실

자정에 월드컵 결승중계를 보기 시작할 때엔, 중계가 끝난 후 두 시쯤 잠들면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의 결승 경기는 예상보다 더 대단한 게임이었다. 서로 두 점씩 얻고 연장전에서 다시 한 골씩 넣어 또 한 번 동점, 결국은 승부차기까지. 세 시간짜리 스포츠 픽션을 보는 기분이었다. 결국 시상식까지 다 보고... 네 시 반이 넘어서야 잠들었다.

도로가 막힐 것이라고 내비게이션이 겁을 주길래 알람을 조금 더 이르게 맞춰두고 깨었다. 녹음을 해야 하는데 잠이 모자라 집중력이 흐려질까봐 평소보다 진하게 커피를 마셨고, 배가 부르면 안 될 것 같아서 음식은 조금만 먹고 출발했다.



녹음하는 동안엔 커피를 석 잔 더 마셨다. 녹음할 내용을 준비할 시간이 넉넉했던 덕분에 그동안 집에서 예습을 많이 할 수 있었고 그것이 도움이 되었다. 세 개의 악기를 곡마다 어울리게 맞추어 사용했다. 가습기를 새로 구입하여 악기를 잘 관리했던 보람이 있었다. 악기들 상태가 좋아서 연주하는 데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 내가 맡은 부분을 모두 완성할 수 있었다. 다시 악기들을 메고 들고 집으로 왔는데 밤 아홉시에 이미 지하주차장엔 자리가 없었다. 야외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방 두 개에 악기가방 세 개를 동시에 짊어지고 걷고 있었더니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있던 이웃사람들이 내가 지나가는 모습을 구경하였다.

집에 오는 중에 한 곡을 다른 버젼으로 한 번 더 녹음해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내일은 좀 여유있게 가도 될 것이니 오늘은 깊이 잠들 수 있으면 좋겠다. 잠이 부족하여 힘들었지만, 심야에 보았던 월드컵 결승 경기는 생중계로 보았던 보람이 있었다.



2022년 12월 16일 금요일

새 펜, 올해의 마지막 펜

 


스테인레스 닙 펠리칸을 한 개 더 사고 싶어서 그동안 몇 번 거래를 시도했었다. 사고 싶은 색상은 품절이었고 간혹 중고로 M200이 나오긴 했지만 내가 원하는 닙 사이즈가 아니었다. 당근마켓에서 드디어 한 개 거래할 수 있게 되어 약속을 하고 나갔더니, 펜에 판매자의 이름이 각인되어있던 적도 있었다. 한 개 더 있으면 좋겠다는 이유로 해외에서 주문을 하기엔 반 년 사이에 환율이 너무 나빠져 있었다. 이미 만년필은 여러 개 있으니까 급한 일도 아니어서 가을 쯤 부터는 검색해보는 일도 그만 두고 있었다.
수요일 아침에 펜가게에서 알림 문자가 왔다. 이게 웬일, 모르는 사이에 펠리칸 한정판 M205가 새로 나왔다는 것이다. 새벽에 월드컵 경기들을 보느라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서둘러 주문을 했다. 내가 원하는 F닙만 남아있었고 다른 닙들은 이미 품절이었다.
헐레벌떡 주문, 결제를 마치고 나서야 조금 느긋하게 방금 내가 산 것이 어떤 모델인지 살펴봤다. 이미 구월에 펠리칸에서 발표를 했고 유명한 분들이 소개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발매는 지난 달에 시작, 이제서야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 내가 만년필에 관련된 기사들을 찾아 읽어보지 않은 것이 대략 여름이 지날 무렵부터였구나.
펜을 쥐고 불빛에 이리저리 비추어보았다. 나는 데몬스트레이터 모델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직접 내 손으로 만져보고 나서야 이것이 매력이 있는 모델이라는 것을 알았다. 투명하게 속이 비치는 모델은 처음엔 판매 영업사원이 펜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판매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보았던 것이었는데, 지금은 여러 색상으로 스페셜 버젼이 나와있다.
이 펜은 에델슈타인 잉크에 맞춰 색상을 정한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Caran D'Ache Blue Alpin 잉크를 넣어보았다. 신기할 정도로 잉크와 펜의 색상이 서로 잘 어울려서 재미있어했다.
올해의 마지막 펜이다. 진짜 더는 안 사려고 하는데, 장담하진 못한다.





2022년 12월 15일 목요일

눈이 내렸다

 



지난 밤에 바람이 습하더니 아침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도로는 미끄러웠고 눈은 하루 종일 날리듯 내렸다. 날씨가 잘 어울리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일찍 출발하여 주유소에 들러 연료를 가득 채웠다. 워셔액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유소에서 워셔액을 사려고 했는데 망설이다가 사지 않았다. 차에서 잠시 내려 후드를 열고 닫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하루에 마시는 커피 양을 많이 줄였다. 일부러 집에서 커피를 내리지 않고, 그대신 빈 텀블러를 들고 나왔다. 새벽에 모로코와 프랑스가 벌인 월드컵 4강전 경기를 보느라 잠이 조금 모자랐다. 커피는 학교에 도착하여 로비에 있는 커피집에서 샀다. 그 커피가게 커피는 맛있었다. 그동안 고맙게 잘 마셨습니다, 라고 마음 속으로 인사했다. 텀블러 뚜껑을 열어 커피를 식히면서 눈이 쌓이는 모습을 구경했다.
집에 돌아올 땐 워셔액이 바닥나버려서 조금 고생스러웠다. 어제 주문했던 만년필이 도착해있다는 소식에 즐거운 마음으로 눈길을 달려왔다.

2022년 12월 8일 목요일

생일 케이크

 


아내의 생일이었다. 나는 어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일 케이크를 샀다. 지나다니면서 봐두었던 '베이커리 카페'들이 팔당대교 부근에 몇 군데 있었다. 빵이라는 말도 외래어인데... 강을 따라 주욱 베이커리 카페들만 있었다. 빵카페는 없었다. 그 중 한 군데에 들렀더니 하루 전에 주문을 하면 케이크를 살 수 있다고 했다. 다른 곳엔 케이크로 보이는 것이 있긴 했지만 너무 단 것들로 만들어져서, 한 입 베어 먹는 즉시 신장의 부신 시스템에 이상이 생길 것 같았다. 날은 저물었고 동네는 가까와져서 할 수 없이 어떤 빵집에서 케이크를 샀다. 불매운동이 계속 중이어서 빵집엔 손님이 없었다.

아침에 아내와 함께 미역국과 케이크와 샐러드를 먹었다. 이상하게 보이긴 했겠지만 꽤 조화로운 조합이었다. 물론 나만 그렇게 먹었고 아내는 밥과 국을 먹었다. 나가기 전에 볕이 드는 곳에서 고롱거리며 자고있던 고양이 짤이를 쓰다듬었더니 두 앞발로 내 손을 살며시 잡고 핥아주었다. 시계를 보며 고양이들을 어루만져주다가 집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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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7일 수요일

한 해를 마치는 공연

 


화요일에 올해의 마지막 공연을 했다. 2019년에 이곳에서 송년 공연을 한 뒤에 판데믹 두 해 동안 하지 못했다가 이번에 다시 연주할 수 있었다.

악기를 두 개 가져가서 리허설을 해보고 한 개만 사용하기로 했다. 패시브 악기의 네크 상태가 약간 안좋았기 때문이었다. 자동차에 악기를 다시 가져다 두고 오는 나를 함께 갔던 아내가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았다. 쓰지도 않을 것을 무겁게 왜 들고 온 건가, 했는가 보다.

연주를 하지 못하고 지냈던 기간이 그렇게 길어질줄은 몰랐었다. 다시 공연을 하러 한 해 동안 여러 지역을 다니는 일은 피로했지만 힘들게 여겨지지 않았다. 리허설을 하면서 우리가 특별하지도 않은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대수로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두 시간 공연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집에 돌아올 때에 어딘가 정신이 멍해져서 두 번이나 길을 잘못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