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30일 수요일

떠나고 변하는 것들.

 



고양이 꼼이가 우리 곁을 떠난지 일년이 되는 날이었다. 작년 오늘, 비는 정말 추저분하게 내리고 있었다. 재가 되어버린 꼼이를 작은 단지에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는개와 같은 비가 흩뿌려지고 있었다.

함께 살고있는 세 마리의 고양이들이 더 애틋하여 날마다 어루만지고 껴안으며 생활하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이겠지만, 매일 나는 이제 죽어서 곁에 없는 내 고양이 순이와 꼼이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날마다 고양이들이 놀던 곳, 숨어있던 곳, 장난치던 구석, 잠자고 있던 자리를 청소하면서 이제는 만져볼 수 없는 손끝의 느낌을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그런데 그것은 감정의 남은 부분일 뿐, 사실은 그 감촉도 느낌도 점점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사람을 바라보던 예쁜 눈망울이나 활력이 넘쳤던 장난꾸러기 고양이들의 모습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다.

사람들은 자주 '고양이 액체설'과 같은 Meme으로 고양이들의 재미있는 모습을 공유하며 재미있어하고 귀여워 한다. 나는 한 번도 그런 것에 반응해보지 않았다. 고양이가 숨을 멈추면 제일 먼저 몸이 축 늘어지면서 정말로 뼈가 없는 액체처럼 흘러내린다. 반듯하게 조심히 눕혀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갑게 굳어져버린다. 미리 힘주어 눈을 감겨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것을 경험하면 고양이 액체설 따위의 문장만 보아도 바삐 화면에서 눈을 돌리게 된다.

모든 생명의 생과 사는 어처구니 없고 허망하다. 생사의 찰나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삶의 가치라던가 죽음의 의미 같은 것들이 모두 무의미하게 여겨진다고 했다. 전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다가 내가 병원신세를 졌던 반년 전에, 심하게 아파보았던 이후에도 나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조금 더 달라진 것 같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했던 나는 2016년 그 여름부터 거의 자전거에 손을 대지 않았다. 고양이 순이가 암 판정을 받은 후에, 내가 자전거 타기에 미쳐서 몇 년을 보내며 고양이의 건강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순이의 병을 미리 발견하지 못했고, 결국 고양이가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더 이상 자전거 위에 앉아 땀을 내며 바람을 쐬는 것이 즐겁지 않아졌다.
꼼이가 갑자기 아프기 불과 몇 주 전에는 영상을 찍어뒀었다. 유난히 민첩하고 운동신경이 좋았던 그 고양이가 높이 도약하고 어려운 동작으로 뛰어내리는 장면들이 담겼다. 그랬던 고양이 꼼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아팠고, 병을 이기지 못하여 세상을 떠났다. 순이가 죽은 뒤에 집안의 고양이들을 자주 병원에 데려가 검진하고 미리 건강을 확인하며 지냈는데도 꼼이가 병들고 죽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나는 이제 집안의 고양이들이 우습고 재미있는 행동을 하여도 구태여 영상을 찍어 남기거나 하고싶지 않아졌다. 그냥 그 순간 웃어주고 다가오면 끌어안아 쓰다듬어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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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9일 화요일

John Pizzarelli, Better Days Ahead

 


존 피자렐리의 새 앨범 Better Days Ahead를 듣고 있다. 제목을 보고, 아직 부제로 붙어있는 내용을 읽기 전에 나는 이미 이 음반이 팻 메스니의 곡을 연주한 앨범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난 밤에 잠을 청하며 무선 이어폰으로 듣고 있을 때에는 리버브가 너무 많은 것 아닌가 따위의 불평을 하며 듣다가 잠이 들었었다. 오늘 깨어나 커피를 마시며 맑은 정신으로 스피커 앞에 앉아 다시 들으면서는 기분이 좋아졌다. 오후에 치과수술을 위해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도 도로 위에서 계속 듣고 있다가, 지금 굳이 블로그에 써두고 있는 중이다.

작년 4월에, 아흔살이 넘었던 그의 부친 버키 피자렐리가 그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이 지독한 전염병 기간 중 많은 희생자들이 생겼다. 유명한 사람들도 판데믹 기간 동안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부친은 오래 활동한 기타리스트이기도 했고, 아흔이 넘도록 연주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음악가였다. 존 피자렐리의 새 앨범 표지는 기타를 안고있는 그의 얼굴에 마스크가 씌워져 있다. 나는 그 앨범 자켓이 시대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의 돌아가신 부친에 대한 생각도 있었을 것 같다고 혼자 상상해봤다.

솔로기타로 연주했고 모두 열 세곡이 담겨있는 이번 팻 메스니 특집(?) 앨범은 훌륭하다. 그냥 훌륭한 뮤지션의 음악을 커버한 수준이 아니라, 팻 메스니의 음악을 정말 좋아했던 것이 분명한 이 기타리스트의 예술적인 해석이 잘 담겨있다. 그는 이 앨범에서 대부분 팻 메스니 그룹으로 발표됐던 곡들을 연주했는데 그룹 편성으로 이루어진 원곡의 섬세한 부분들을 빼먹지 않으면서도 한 개의 기타로 표현할 수 있는 음악적 재미를 고루 담았다. 예를 들어 Last Train Home, April Wind/Phase Dance와 같은 곡에서는 베이스 라인과 특정한 화음들이 아주 잘 살아있는데, 그것은 피자렐리가 그의 7현 기타를 멋지게 활용하고 있는 덕분이다. 저음 한 줄을 추가하여 일곱줄로 되어있는 기타를 사용한 것은 그의 부친 Bucky Pizzarelli가 먼저였다. 버키 피자렐리는 같은 고향인 뉴저지 출신 선배 기타리스트 George Van Eps로부 7현 기타를 배우고 계승했다.

과거의 Pat Metheny Group 편성이 아닌 곡으로는 앨범 Secret Story에 실렸던 Antonia와 작년에 발매된 팻 메스니 앨범의 타이틀 곡인 From This Place가 수록되었다. 좋은 작곡에 훌륭한 원곡, 그리고 아름다운 재편곡과 해석으로 아주 듣기 좋았다.

존 피자렐리는 수십년 동안 다른 거장들의 음악을 커버하여 연주해왔다. 냇 킹 콜, 폴 매카트니와 비틀즈,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등의 음악을 연주한 앨범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 음반들을 그다지 꾸준히 듣고있지 않았다. 나의 취향 탓이겠지만, 어쩐지 팻 메스니 특집인 이번 앨범은 유난히 밀도가 높고 좋아서, 아마도 앞으로 계속 듣고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예 아이폰에 저장해뒀다. 애플뮤직에서 무손실 음원으로 지원하고 있으니까 유선 헤드폰이나 오디오 장치로 꼭 들어보길 권하고 싶다.

이 음반 덕분에 이어서 Pat Metheny Group의 Still Life (Talking) 앨범을 듣고 있다. 애플뮤직에 팻 메스니 그룹 시절의 부트렉들이 계속 업로드 되고 있는데, 예전과 달리 그런 것에는 점점 관심이 없어진다. 잘 만들어 놓았던 본래의 앨범들이 완성품처럼 느껴지고, 그 사운드를 좋은 음질로 다시 듣거나, 좋은 연주자가 잘 해석해놓은 새 앨범을 듣고 있는 것이 지금은 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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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5일 금요일

평가

 


음악을 배우고 악기를 전공하는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 것도 어쩌다 보니 십오년째가 되었다. 그 이전에 입시생들을 가르쳤던 것을 더하면 어린 학생들을 마주하며 지내온지 이십여년. 무슨 명예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이 벌 수도 없는 일인데 왜 나는 계속 하고 있었을까. 아마 나는 연주를 하는 것만큼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나 보다.

자신이 즐겁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것을 일로 삼으면 더 이상 즐겁거나 좋아하기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도 있어서, 매 학기를 마칠 때마다 항상 괴로운 업무를 피하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학생들을 평가하고 채점하여 등급을 정하는 일이다.

물론 다른 어떤 분야와 마찬가지로 음악과 악기연주라는 것도 평가할 수 있고 각자의 성과를 숫자로 매길 수 있기는 하지만, 학생들의 과제와 시험답안지들을 눈 앞에 두고 깊은 밤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은 무겁고 힘들다. 그들만의 목소리가 있듯이 그들만의 음악도 있는 것이고, 그 개성을 기록과 수치로만 판가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학생들의 테크닉과 실력의 차이를 점수로 줄 세운다는 것이 과연 음악적인 일인지 나는 의심한다.

그러나 이곳은 학교이고, 어떤 학생이 한 학기 동안의 학업을 해온 과정과 결과를 평가해야 하는 것 또한 가르치는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평가의 결과가 충분히 공정하려면, 우선 가르쳤던 사람이 성실하였어야만 한다. 나는 학생들의 점수를 합산하기 위하여 내가 만들어 놓은 스프레드 시트의 수식을 보완하면서 수업시간마다 기록해 둔 학생 개개인에 대한 문서들을 열 번 스무 번 읽는다. 내가 항목별로 작은 숫자들을 입력해나가면 맨 끝에 그 학생의 총점이 계산되도록 해두는 이유는 어쩌면, 내 손으로 직접 그 합산된 점수를 입력하지 않아도 좋도록 하여 괴로운 업무의 마지막을 회피하기 위한 비겁한 마음 때문일 수도 있다.

학생들이 완성한 과제물들, 때로는 레포트들을 반복하여 듣고 읽다보면 수업시간의 내가 보인다. 과연 내가 그 수업들을 매 시간 성실하게 준비했는지, 학생들에게 바르게 길을 알려주고 필요한 순간에 해줄 수 있는 말을 전할 수 있었는지, 그보다 앞서 어린 학생들 앞에서 나의 태도는 바르고 진실했는지를 스스로 비판해보고 반성한다. 그래서 학생들을 점수 매기는 그 시간은 나 자신에 대한 평가의 시간이기도 했다.

자기자신에 대한 평가와 반성은 타인에 대하여 너그러운 자세를 가지게 해준다. 나는 학생들이 터무니 없는 이유로 결석을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 있다. 내가 힘주어 여러 번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나무라고 싶지 않다. 그럴 수도 있다. 그들로부터 기대했던 수준의 과제물을 받지 못하여도 그것은 학생들의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절반은 나의 탓일 테니까. 그리고 대학에서의 한 가지 과목 정도는 그들의 인생에서 그다지 큰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지금 모자란 배움은 언젠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스스로 충족시킬 수도 있을 것이니까, 다 괜찮다. 나의 '일'이기 때문에 점수는 매기고 있지만, 겨우 학점이란 것으로 학생들이 자신에 대한 가치를 주제 이상 높게 여기거나 낮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심지어 일찌감치 공부하기를 포기하고, 수업은 제껴버리고, 임기응변으로 변명을 늘어놓고, 때로는 거짓말로 선생을 기만하는 것도 괜찮다. 약속을 어기거나 모든 일에 핑계를 만드는 것도 좋다. 거기에서부터는 자유의 영역이다. 아직 어릴 때에는 그럴 수도 있는 법이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이 곧 그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을 납득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학생일 때에 자신의 일을 그런 수준으로 밖에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음악을 잘 할 수는 없다. 음악을 잘 할 수 없을 사람에게 나는 가혹하게 점수를 매긴다. 그것도 지금 내가 성실하게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