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26일 월요일

연말.


여섯 해 전 어느 가을 저녁에 나는 저런 자세로 카페에 앉아있었다. 세상은 잘 못 되어질 일들이 없을 것 같았고 자고 일어나면 어제보다는 조금씩 더 행복해질지도 모른다고 근거 없이 믿고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하면, 다양한 면에서 저 당시와 반대이다.
마치 배당받았던 행복의 할당량을 먼저 사용해버려서 앞으로 더 좋아질 경우는 없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어느쪽이라고 해도 지루하고 권태롭다.

나는 그래서 새 해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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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23일 금요일

내 표정.


누군가가 찍어준 사진을 보면서 생각을 해보면 그날 그 공연 중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이 난다. 항상 기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아주 자세히 기억나기도 한다.

저 사진 속의 장면에서는 깜박 잊고 고양이의 밥과 물을 새로 챙겨주지 않고 집을 나왔던 것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었다. 베이스 줄이 일주일만에 못쓰게 되도록 죽어버려서 신경질이 나있던 상태였다. 쓰고 있는 모자가 착용감이 거의 없고 따뜻하지만 어쩐지 뇌수술을 마친 환자처럼 보여서 우울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저 날의 공연에는 정말 연주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나이 든 사람과 인사를 할 때에, 살짝 웃는데도 잘 구겨진 청바지처럼 자연스런 주름을 가진 분들을 만날 때가 있다. 웃음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늙어졌다면 평생 복을 만들며 살아온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데 내 얼굴 표정은 언제 어디에서나 불만이 가득한 것 처럼 보인다.

2005년 12월 20일 화요일

즐거웠다.


"맞아, 원래 라이브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어."라는 생각을 하게 해줬던, 즐거운 공연이었다.
분위기 때문에 내가 평소의 규칙을 깨고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다.
분명히 또 너무 많이 떠들었고 오버를 했을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피해했다.

김창완 형님이 말해줬다. "괜찮아, 가장 좋은 술 깨는 약은 후회야. 마셔."

오랜만의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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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음반 좋다.


이 달 초에 블루스밴드의 공연이 있었다.
그 공연을 나는 잘 하고 싶었다. 그래서 공연을 연습하던 동안 셔플과 블루스 음반들을 듣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음악들만 듣고 있느라 단순한 화성과 반복되는 멜로디들에 갇혀 폐쇄공포증에 걸릴 것 같았다.
이틀 전 산울림의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꼬박 일주일 돈안 산울림의 음악들만 반복해서 들었다. 악보를 그려뒀지만 모두 외고 싶었다. 스무 곡을 완전히 외기 위해 몇 십번씩 들었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빅터 우튼의 새 음반과 리차드 보나의 새 음반을 듣지 못하고 아이팟에 넣어둔 채로 벼르고 있었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에 비로소 긴장을 풀고 이 음반들을 들어주리라 하고 있었다.

그랬다가 이 시간까지 이틀 동안 오디오 앰프가 난로처럼 뜨거워지도록 쉬지 않고 듣고 있는 중이다. 행복하다. 내 고양이는 그 난로 위에서 졸고 있다.

리차드 보나의 새 앨범 Tiki 는, 음악적인 감동으로 가득하다.
이미 그는 매우 대단한 연주자이지만 계속해서 발전 중인 것 같다. 그의 음악들에는 중독성이 있다. 지금까지 그의 음반들이 모두 다 그랬지만 한 곡도 뒤로 밀쳐둘 것이 없는 좋은 음악들로 채워져있었다. 매우 좋았다.
빅터 우튼의 새 음반 역시 놀라왔다. 이번에는 노골적인 자부심, 가족에 대한 헌신적인 애정 등이 약간 과도하게 담겨있다. 잘 만들어준 음반을 고맙게 듣고는 있지만 어쩐지 보나의 것과 비교해보면 이쪽의 것은 좋은 베이스 교본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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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19일 월요일

기분 좋았다.


나는 긴장했었다.
그러나 스무 곡의 노래들을 쉬지 않고 이어가면서 나는 즐길 수 있었다.
전날에 잠을 못 잤고, 아침 일찍부터 고된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났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 피로하지 않았던 것은 긴장이 덜 풀려서였을까 아니면 즐겁게 연주했기 때문이었을까.

공연이 끝난 후 한쪽 구석에 편안하게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조여뒀던 정신을 느슨하게 해두려고 했다. 맥주와 샐러드를 먹으며 함께 연주했던 사람들과 잡담을 나눴다. 같이 즐겼던 관객들의 답례에 인사도 하고 웃고 떠들었다.
나에게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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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 놀이.


깊은 잠에 빠졌었다.
평소 부족했던 잠을 보상받기 위해 하루를 날을 잡아 잤다.
역시 이런 것은 건강한 삶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많이 잤는데도 개운하지 않았다.

이를 닦고, 세수하고,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닥에서 봉투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고양이 순이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동안 거의 매일 내가 집을 비워두고 다녔기 때문에, 불쌍한 내 고양이는 혼자 저렇게 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많이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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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17일 토요일

혀 끝에 피가 맺혔다.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들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나에게만 어쩐지 기이한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초자연적이거나 기적적인 일들이 생기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그냥 뭔가 이상한 일들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자면 꽤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막 기억나는 일 중에는 군대에서 부대배치를 받았던 직후, 누군가가 트럭 위에서 쇠파이프를 던지다가 그만 내 얼굴에 명중시켰던 일이었다. 다행히도 오른쪽 눈과 귀 사이에 맞았다. 얼굴이 많이 찢어졌었다. 피를 흘리고 있었다. 곧 치료를 받았고 붕대를 감은채로 며칠 고생을 했다. 만약 날아온 쇠파이프를 눈에 맞았다면 분명 실명했을 것이다. 귀에 맞았다면 지금쯤 나는 음악일은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기이하다기 보다는 천만다행이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기이하게 여겨진다. 나는 그 때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쇠파이프를 던졌던 사람이 정확하게 내 광대뼈 뒷쪽을 겨냥하여 명중시키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우연과 실수와 운이 잘 섞였던 것이리라.

군대에서 몸을 많이 상하였다. 얼굴의 반쪽만 괴상하게 부어오르는 증상도 겪었다. 이것이 발전되어 몇 시간 만에 온몸의 절반만 엄청나게 부어올랐다. 병원에 실려갔다. 아무도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치료도 조치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사흘 수에 그냥 정상으로 돌아왔다. 똑같은 일이 수 년 후에 또 있었다. 그 때엔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했는데, 아무런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또 언젠가는 늦가을에, 어느 산에 올라가 잠시 앉아서 쉬고 있을 때에 뱀 한 마리가 내 발 위를 지나간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 뱀은 온몸이 하얀 백사였다. 처음 뱀의 존재를 느꼈을 때에 이미 뱀은 내 왼쪽 신발 위에 대가리를 올려두고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 너무 너무 느리게 다른쪽 발 위로 이동하고 있는 동안 나는 온몸이 얼어붙어버렸다. 나는 뱀을 무서워하기 때문이었다. 식은땀이 났다. 그런데 내가 뱀을 무척 싫어했는데도, 그 순간 코 앞에서 내 발 위를 지나가고 있는 하얀뱀의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잃을 뻔 했다. 우아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 색감과 피부의 질감, 그리고 가느다란 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뱀이 내 곁을 떠나서 숲 사이로 사라져간 다음에도 나는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가을 산바람에 섞인 냄새가 구수하다고 생각했다.
산을 내려와 사람들에게 얘기했더니 가을뱀은 모두 독사라고 하거나 발 위를 지나가는데도 물지도 않았다니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나에게 핀잔만 줬다. 게다가 하얀 백사였다고 말했을 때엔 더 이상 내 말을 믿으려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겠지, 믿어줄 리가 있나. 너무 이상한 일이었잖아.

조금 전 새벽의 일이다.
어쩌다 보니 약속이 이상하게 되어서 두어 시간 동안 친구를 기다렸다.
겨우 만나서는 몇 분 이야기를 하고 금세 헤어졌다.
이미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그냥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주 들르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식당 아주머니가 얼굴이 창백해져서 어쩔 줄 몰라했다. 식당의 돈을 넣어두는 금고가 송두리째 없어져버렸다는 것이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왔다. 그 아주머니는 상황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서 경찰관에게 주고, 새벽 세 시 이후의 상황과 실내에 있었던 사람들의 인상착의를 설명해줬다.
그리고 그 식당을 나서자마자 담배를 한 개비 피웠고, 자동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어쩐지 혀 끝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혀에 뭔가가 달라붙은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혀의 끝에 피가 잔뜩 맺혀서, 까맣게 부풀어올라있었다.
이것을 뾰족한 것으로 터뜨릴까 망설이다가, 그만뒀다.
혀는 입술처럼 혈관덩어리여서 피를 흘리기 시작하면 잘 멎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이런 일들이 왜 나에게 생기는 것일까.


2005년 12월 11일 일요일

기다려진다.


다음 주에는 산울림 공연 세션이다.
내 십대시절의 중요한 부분을 메우고 있었던 '어르신'의 음악이어서 정말 즐겁게 준비하고 있다.
신기한 경험을 했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과는 거리가 멀고, 전혀라고 해도 좋을만큼 찾아 듣지 않고 있었는데도 다시 산울림의 노래제목들을 접했을 때에 나는 이미 거의 다 외고 있었다.
어릴적에 흡수된 것은 ROM 같은 곳에 저장되는걸까.

그 공연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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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10일 토요일

귀엽고 예뻤다.


책상 위의 저 자리에 앰프를 놓아둔 후 며칠 동안, 고양이 순이는 계속 저렇게 눈만 내밀고 힐긋거리며 나를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쏙 들어가 숨어버렸다.
고양이들이 숨바꼭질을 즐긴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장난을 거는 것을 보니 그 모습이 귀엽고 예뻐서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조금 전에도 나와 순이는 눈이 마주쳤다.
저렇게 보고 있다가 갑자기 한쪽 앞발을 들고, '물어볼게 있어'라고 말이라도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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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쉬어야겠다.


하고 있던 밴드를 그만뒀더니 직장을 잃은 것이냐고 누가 물어보았다.
내가 하는 일이 차라리 그런 것이었다면 나는 불의를 정말 잘 참는 사람이 되었거나 아니면 일찌감치 조직으로부터 버림 받았을지도 모른다.
실직한 것은 아니므로 여전히 다른 밴드, 다른 사람들과 연주를 하고 있다.
혼자서도 계속 뭔가를 하고 있다. 그동안 써뒀던 음악 중 한 곡을 다음 주 일요일에 결혼을 하는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했다. 결혼식에서 그 곡을 연주해주려고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알고 지내는 연주자들이 모두 바쁘다는 것이다. 일이 있어서 바쁘다는데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야하니까 절대로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일은 이제 질렸다. 아무래도 밴드의 멤버를 구할 때에는 '무신론자 우대' 같은 조건이 필요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남았는데 연주할 친구들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지 걱정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빈둥거릴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많이 자고 자주 먹었다.
몸을 편하게 하고 긴장을 풀었더니 저절로 빠르게 게을러졌다.

고양이 순이는 그동안 무척 심심했었던 것 같다.
내가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까 고양이가 많이 좋아한다.
까불고 장난을 치고, 사료도 많이 먹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 어깨 위로 뛰어내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냥 내버려뒀으면 고양이가 알아서 어깨에 매달렸을 것을 도와준답시고 손을 내밀었다가 그만 가구의 모서리에 손등을 다쳤다. 외상은 없는데 혈관이 지나는 부분이 계속 부어오르고 있는 중이다. 많이 아프다. 주먹을 쥐기가 힘들다.
그래도 고양이가 다치지 않아서 나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순이는 어쩐지 나를 비웃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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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8일 목요일

고양이 소리.


새벽에 약간의 취기가 남아있었다.
조금 덜 마시면 덜 마신대로 더 마시면 과한대로 컨디션이 나쁘다.
오랜만에 시간이 많이 남아서, 깊은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러나 습관이 무섭다. 오늘도 날이 밝도록 잠을 못 잤다.

이웃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책상 위의 구석진 곳에 앰프를 두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구입한 코러스에서 나는 소리인지, 계속 그르릉거리는 잡음이 들려왔다.
이펙터를 꺼보기도 하고 케이블도 확인했다. 앰프의 노브들을 살펴봤는데 이상이 없었다.
계속 악기소리의 사이 사이에 뭔가가 계속 그르릉 그르릉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앰프 뒤에서 고양이 순이가 부시시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순이가 구석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었다.
잠이 깨지 않은 고양이가 몸을 더 일으키지 않은채 장난을 걸어왔다.
나는 사진을 한 장 찍어뒀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결국 순이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유통기한이 다 되어버린 커피냄새, 방치해둔 빨래들, 빈 그릇이 가득한 설거지통들... 날이 밝으면 집안 꼴이 더 잘 보일 것 같아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 덮고 잠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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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6일 화요일

절이 싫으면 떠나는 것.

새벽에 눈보라를 뚫고 얼어붙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면서 내가 고민했던 것은 더 참을 것인지 아닌지가 아니었다.
명분, 실리라는 것은 사람들이 제 입맛에 맞도록 만들어내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 것은 계산에 넣을 수도 없었다.
나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위대한 일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짓은 아니기를 원했다. 그것이 생각의 시작이었다.
지난 주말 공연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나는 노력했다.
며칠 동안 시간을 들이고 밥을 굶고 비용을 썼다.
집에 돌아와 낯선 앰프의 매뉴얼을 읽고 스무 곡 남짓 악보를 완벽히 외느라 오래 집중했다.
실수할 가능성이 있는 부분은 체크하여 필기해뒀다.
공연장에 있는 메인콘솔을 카메라에 담아와서 세세한 모양을 익혔다.
엔지니어에게 공연시 내가 원하는 사운드에 대해 말하고 의견을 구했다.
일주일도 되지 않았던 베이스 줄을 새것으로 교환했다. 그리고, 리더 때문에 속상해있는 다른 멤버들을 챙기느라 애썼다.

그 결과 공연의 질은 매우 좋았다.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다.
나는 나 혼자만의 시험을 잘 치렀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밴드의 리더가 투자한 것에 비하면 가격대비 최상의 공연이었다.
며칠 후 돌아온 것은 터무니없는 액수의 연주료와 비상식적인 변명이었다.
그는 함께 연주하는 사람들을 폄하했다. 그의 언어에 치졸한 욕심이 드러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떳떳하지 못할 때에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
겁을 내면서도 잔인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그래서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겨우 나와 같은 연주자가 그 밴드를 그만두는 일이 그렇게 심각한 것이었나.
꼬리를 물고 걸려오는 동료들의 전화와 질문들에 당황스러웠다.
회유도 있고 걱정해주는 말도 있었다. 동조하거나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몇 사람들에게 급박한 전화들이 걸려온 모양이었다. 순조로울 수도 있었던 다음 공연들이 위태롭게 되었던 것이었을까. 벌써부터 들려오는 협박과 비난의 단어들. 내가 매장될지도 모른다는 공갈.
어리석은 행동은 몇 번의 반복만으로 악행이 된다.

내가 남에게 어떻게 살아야 옳은가를 말해준다는 것은 시건방진 일이다.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 아니냐와 같은 말도 하면 안 된다.
그런데 그런 말을 나 자신에게는 매일 해야만 한다.
조금 숨을 돌리고, 충전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지금은 좋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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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1일 목요일

이상했던 날이었다.

1. 잠을 자다가 꿈에서 무엇인가가 몹시 우스워 자다말고 누운채로 크게 웃어버렸다.
내 웃음소리에 내가 놀라서 그만 잠을 깨었다.
잠을 깬 것과 동시에 무엇이 우스웠던 것이었는지 잊고 말았다.
기억해내려 애써보다가 다시 잠을 잤다.
혼자 몇 년 지내다 보니 언제나 강박증이 있다.
알람이 울리기 5분 전에 나는 늘 깨어난다.

2. 시간에 쫓길 하루일 것을 예상했다. 평소보다 준비물을 많이 챙겨서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만 양말을 신지 않은채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마 나는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3. 잠이 덜 깬채로 오후 한 시에 강변을 달리고 있었다. 바깥은 싸늘한데 자동차 안은 밝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늘 어둠 속을 달리다가 모처럼 너무 밝은 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4. 첫번째 약속장소에서 사람을 기다렸다. 어쩐지 담배를 피우고 싶지 않았다. 이것도 이상하다면 이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때, 갑자기 한 아이가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미끄러져 다가오더니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모습이 예뻐 보였다. 유난히 인상 깊었다.

5. 평소같으면 전혀 연주할 일이 없었을 곡을, 전혀 그 곡을 연주할 것 같지 않았던 사람과 갑자기 공연 리허설에서 연습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곡이었어서, 나는 그 곡을 외고 있었다. 연주하는 동안에 마치 그것이 언젠가 겪었던 일 처럼 여겨졌다. 강한 기시감이었다.

6. 특별히 나쁘게 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화가 났다거나 짜증이 났다거나 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한밤중에 다른 공연이 끝난 후, 자신을 인도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인사를 청해온 남자가 있었다. 손을 내밀길래 악수를 받아줬다. 그러자 그는 숨 쉴 틈도 없이 계속 시타르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 악기의 재질과 역사와 인도에서의 문화적인 가치를 설명하고 있었다. 몇 분은 참고 듣다가 너무 피곤하여 견딜 수 없었다. 이놈도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종일 이상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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