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29일 금요일

습기.


늘 차에 싣고 다니는 바람에 추위와 건조한 환경에 시달리고 있었던 악기의 상태가 나빠졌다.
자주 가지고 다니지 않았던 나머지 악기들도 전부 네크의 상태가 이상해져있었다.

조금 더 세게 가습기를 켜두고 이틀을 지냈더니 전부 본래의 좋은 상태로 돌아왔다.
아침에 유리창의 두꺼운 가림막을 걷어 올렸다. 햇빛이 잔뜩 들어와 수증기를 비췄다.
늘 어둠 속에서 보고 있을 때엔 몰랐는데 제법 많은 물방울들이 퍼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혹시 고양이들에게 나쁠까봐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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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27일 수요일

그들의 꿈이 자랄까.

가르치는 학생들의 기념공연. 무대를 눈 앞에 두고 그들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아직 새 것이어서 윤이 나는 악기를 꽉 쥔 손들이 풋풋해 보였다. 십대의 시간을 쏟을 일을 찾았으므로 그들은 즐거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막 서핑보드에 올랐기 때문에 다가올 파도들이 험악하다고 해도 겁을 먹지 않을 것이다.


무대에 오르기 전 한 사람씩 불러서 튜닝을 도와줬다. 자신들의 연주를 마치고 내려올 때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순간에는 남을 의식하거나 인사를 주고 받는 것 보다 혼자서 묵묵해질 필요가 있다. 그들의 추억 속에 콘트라스트 강한 이미지가 한 장씩 남았으리라.

언제나 해도 좋은 것 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더 강요되는 사회이고, 무엇이 가치있는 일인가 보다는 무엇이 값이 매겨지는 일인가를 가르치려는 세상일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각자의 선택이 언제나 즐겁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공연을 보면서 그 아이들의 시작이 얼마짜리였는지 보다는 얼마나 재미있었는지가 되었기를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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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달보드

이펙터 보드를 꾸민 후 여러 곳을 들고 다녔다.
쌓인 먼지와 흙을 닦고 흐트러진 선들을 정리했다. 페달이 몇 개 더 생겼는데 한정된 면적과 조합의 순서를 맞추자니 한 개 밖에 더 집어 넣지 못했다.
오후에 새로 갖추어 연결을 하고, 저녁에 공연을 했다.

순이가 아까부터 노리고 있었는데, 그만 순발력 좋은 꼼에게 가방을 빼앗기고 말았다.
꼼은 끈질기게 버텼고 순이는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지루해져서 다른데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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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25일 월요일

일상.


감기 기운으로 그런 것이었는지 속이 편하지 않았어서, 먹고 가라는 음식을 마다하고 굶은채 나갔었다. 배고픈 것은 견딜만했는데 거의 여덟 시간동안 소리에 시달렸더니 너무 피곤했다. 정신이 멍한채로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현관 앞에 줄줄이 나와 인사를 하는 고양이들을 차례로 쓰다듬어주고, 수건 한 장 들고 욕실 문을 열었더니 물감을 담았던 플라스틱 용기와 붓이 보였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집안을 둘러보니 그제서야 새로 색칠이 되어있는 집안의 구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물감이 묻은 붓과 색상을 얻은 집안을 보는 것, 한 그릇 따뜻한 밥처럼 기운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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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22일 금요일

감기.


아니나 다를까, 감기에 걸렸다.
어쩐지 올 겨울은 무사히 지나보내는가 했더니 역시 걸려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다. 나는 무척 조심했다. 바보처럼 보여지더라도 찬 바람을 피해보겠다고 몇 겹씩 껴입고 다녀보기도 했다. 다 소용없었다. 바이러스를 막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숨을 쉬지 않고 외출을 한다거나 무엇과도 접촉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것 뿐이리라. (그래도 걸릴 놈은 걸린다.)

몸이 아프다. 아프긴 아픈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이 정도는 뭐 예상했던 것이라는 느낌 정도이다.
잘 지내다가 단 한 주일 정도 극심하게 문란한 생활을 했던 결과였다. 밤을 새우고 낮에 잠깐 자고,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다시 밤새 깨어있다가 날이 밝으면 한꺼번에 몰아서 자버리는 짓을 며칠 했다. 소문을 들었는지 곧 감기가 찾아와 잘 있었느냐고 인사를 건네었다.
증상과 징후를 잘 기억했다가 대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이를 먹으면서 좋아지는 것이 있다면 비위가 강해진다거나 하는 일인가보다.
토악질이 나거나 혈압이 치솟아 쓰러지거나 할 정도의 일이 매일 매일 일어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담담하다. 그리고 더 많이 차분하다. 불과 몇 년 전에도 할 수 없었던, 무슨 꼴을 보아도 일단 껄껄 웃기 - 마저도 가능하다. 마음이 아프다고 하더라도 그저 아픈 것 아닐까 하는 생각뿐 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많이 자제하고 좀 더 넉넉해져보려고 애를 쓸 때엔 잘 되어지지 않더니, 더 없이 꼴 사나운 장면들을 매일 목도할 수 밖에 없는 시절이 오고나서야 오히려 냉정을 찾는 느낌이다.
앓고있는 사람들의 감기 정도야 곧 낫겠지만 지저분한 세상의 냄새들은 쉽게 사그러지지 않을 모양이다. 그러나 쉽게 화가 나지도 않고 별로 절박하지도 않다. 우선은 조용하게, 더 길게 바라보며 더 배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옳지 않은 일을 지켜보면서도 입을 닫고 뒷짐을 지는 것은 나쁘고 부끄럽다. 힘들게 살더라도 쪽팔리게 늙고 싶지 않다. 쪽팔리게 늙고 계신 분들을 많이 구경하면 이 정도는 배워질 수 있는 것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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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6일 토요일

어린이와 고양이.


앞니 한 개를 멀리 출장을 보낸 조카가 놀러왔었다.
조카 남매는 나를 힐끗 보고는 한 번 크게 웃어주고, 고개를 휙 돌려 소리를 지르며 고양이들을 부르는 일을 반복했다.
고양이들은 물론 이미 다 숨어있었다. 몸집이 작은 사람에게 관심이 생긴 한 마리만 빼고.



2008년 2월 11일 월요일

순이는 언제나 나와 함께.

순이는 스크린을 덮어둔 맥북을 방석 삼아 어슴푸레 새벽이 밝아 올 무렵 한참동안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고양이는 깔고 앉을 랩탑 컴퓨터의 규격에 잘 맞도록 몸을 접는 법을 익혀둔 모양이다.

내 것은 집안의 세 개의 맥북들중 가장 최근의 것으로, 이제 일 년이 되었다.
그런데 다른 두 개의 것들과 비교해보면 화면이 가장 어둡다.
순이가 깔고 앉은 것이 가장 오래되었는데, 화면은 가장 밝고 멀쩡하다.

순이는 졸리워서 꾸벅거리면서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앉아있으려 했다.
어릴적부터 언제나 항상 내 곁에 있어주는 고양이 순이.


기자질.

평소 연예 기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므로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포털 사이트에는 항상 연예인의 기사를 맨 앞에 띄워놓기 때문에 눈에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

막내 형님이 사고로 돌아가신지 열흘 남짓, 지났다. 팬 카페의 분들이 그와 관련된 기사들을 스크랩해두고 계시는 덕분에 여러 매체의 기자들이 쓰고 있는 기사들을 전부 읽어볼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기자의 업무라는 것이 컴퓨터 앞에서 적당히 소식을 수집하여 가공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아니면 복사하여 붙이는 일이라던가.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왕년의 어느 록밴드 드러머가 세상을 떠났는데, 길게 써봐야 무엇하며 조사를 하면 또 뭐할건가. 그런 식이라면 모 밴드의 원로 기타리스트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몸이 아프다는 것도 써야할 판이고 어째서 해마다 은퇴기념 공연을 여는 원로가 계신가에 대해서도 취재를 해야 할 것이므로... 소모적이고 인기없고 인지도가 떨어지는 기사는 쓸모없는 것이겠지.

돌아가신 분에 대하여 왜 대접해주지 않느냐는 투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기자 여러분들 대부분은 그 밴드의 음악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유명한 연예인의 친동생이더라, 에서 생각이 멈춰있어도 된다. 음악전문지도 아니고 그냥 스포츠 신문, 연예기사 사이트의 기사들이니까 상관없다. 부고의 기사 몇 줄 쓰려고 옛날 록그룹의 음악을 찾아 들어보며 비행기를 타고 현지로 날아가 조사를 벌여야한다고 억지를 부리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취재는 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고단하다.


커피를 두둑하게 주문한데다가, 친구가 특별히 덤으로 한 봉지를 잔뜩 더 담아서 보내줬는데도 벌써 커피콩이 많이 줄었다. 밤 사이에도 커피를 꽤 많이 마셨다. 한 잔을 더 마시고 잠이 들면 딱 좋겠지만, 참기로 했다.

테이블 위에는 세 개의 랩탑들이 저마다의 일을 마치고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한 개의 윈도우즈 랩탑은 맥에서 작동되지 않는 일들을 한 뒤 아까부터 쿨쿨 자고 있다.
몇 년 전에도 홈페이지에 써둔 기억이 있는데, 도대체 누구나 '한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마이크로 소프트 워드'를 쓰고 있다는 생각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냐고 물어보았자 한국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길게 설명을 해줘도 파일을 보내는 분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hwp와 '알집'의 파일들을 보내준다. 이 집의 윈도우즈 컴퓨터 마저도 '한글' 프로그램은 설치되어있지 않다. 늘 파일을 변환하느라 엉뚱한 잔손질을 거치고 있다. 그들의 고집만큼 나도 미련해서, 아직도 '한글' 프로그램을 구입하지 않고 '부트캠프'도 써본적 없이 텍스트 파일들을 만진다.

누구나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잔다는 것도, 누구나 밤에는 잠들고 아침이면 일어나 출근을 한다는 것도 선입견일 수 있다. 세상의 일들은 그런 스테레오 타입의 연결로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명절연휴엔 어느 집에나 아버지의 형제들이 모인다거나, 누구나 따뜻한 가족에게 찾아가 뜨뜻한 떡국을 먹고 있으리라는 짐작도 대부분 허상이다. '그렇게 해야 정상'이라고 하는, 편견이다.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듯 불편해하면서 운전을 하다가 폐휴지를 가득 실은채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을 보았다. 힘에 부쳐 도로에 멈춰 서더니 큰 탄식을 했다. 자동차 안에 앉아 있던 내 귀에 그의 탄식은 들리지 않았음이 틀림없었을텐데, 나는 아주 긴 한숨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갈 곳 없었던 사람들, 가고 싶은 곳이 없었던 사람들, 주저앉아 쉴 수도 없었던 사람들에게도, 행복한 순간들의 습격을 받기도하고 즐거운 일에 놀라기도 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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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9일 토요일

좋은 아침이었다.


늘 밤을 새운 후에 아침이 되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잠을 자기 시작하는 생활을 하며 지낸다.
오늘 아침에는 유난히 방 안에 햇빛이 많이 들어왔다.
언제나 세상에 어둠이 내려와 앉으면 비로소 뭔가 시작되는 느낌, 안정되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혹은, 그렇다고 생각해왔던 모양이다. 전등을 켜지 않은 방 안 가득 햇빛이 들어와 길게 누웠다. 조용했고 평화로왔다. 고양이 순이가 무슨 일인가 하며 곁에 다가오더니 내 몸에 머리를 기대고 함께 누웠다.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열흘을 지냈다. 생각해보니 언제인가부터 웹에 글을 쓰지 않을 때에는 다른 것들도 쓰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펜을 잡아보니 처음 배우는 악기처럼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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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2일 토요일

천진한 눈.


순이는 워낙 수다가 많은 고양이이다.
욕실에서는 옹알옹알 앵알앵알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불평으로 시작했다가 기분이 좋아져서 재잘거리기도 했다.

물기를 닦아주고 털을 말리느라 안고 있었더니 천진한 눈으로 사람을 쳐다보았다.
귀여운 고양이 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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