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9일 화요일

녹색 컨테이너


수색역에 있는 녹색 컨테이너 건물에서 밴드 합주를 했다.
추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햇빛이 따뜻했다.
쉬는 시간에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가 그 빛이 따뜻해 보여서 사진을 찍었다.

합주를 마치고 레슨을 위해 한 시간 반 동안 운전을 했다.
그 시간은 언제나 길이 막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운전을 하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집에 늦게 돌아왔다.
집안의 모두가 잠들어 있었다.
까만 어린 고양이만 소리를 내며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고양이를 안아주고 세수만 한 다음, 가방을 끌러 정리할 생각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2016년 11월 26일 토요일

광화문에서.


아내는 낮 부터 광화문에 나가 있었다.
나는 다른 일을 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시내로 나갔다.
광화문 해태상 앞에서 아내와 만났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줄지어 광장을 걷고 좁은 길을 따라 소격동 길을 걸었다.



사람들 틈에 끼인채 행진을 하다가 화장실을 찾아 가기 위해 행렬로 부터 빠져 나오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걸어야 했다. 예상 보다 빠져 나오기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근처 박물관 건물의 화장실 앞에 도착했더니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느라 길게 줄 서 있었다.

다시 골목을 따라 큰 길로 나오는 길을 걷다가, 이번에는 동생 내외와 마주쳤다.
처음에는 서로 현실감이 없어서 잠깐 멍하니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만날 수 있었다니, 우스운 순간이었다.

동생네는 을지로에 자동차를 주차해뒀다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차를 얻어 타고 귀가할 수 있었다.


2016년 11월 24일 목요일

검은 고양이


지난 주 어느날 밤에 아파트 현관 앞에서 새까만 어린 고양이가 아내의 바지를 붙잡고 매달렸다.
우리는 무턱대고 울며 안기는 고양이를 데리고 집에 들어와 먹이고 재웠다.



다음 날 동물병원에 가서 간단한 검사를 했다. 어린이 고양이는 사흘 가까이 거의 잠만 잤다.
그동안 무척 고단하고 힘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기력을 회복한 어린이 고양이는 이제 사람만 보면 다가와 무릎에 앉고 쉴 새 없이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아홉살 하얀 고양이 꼼은 새까만 어린이를 무척 귀여워 하고 있다. 함께 뛰어 놀고, 어린이를 데리고 다니며 이것 저것 가르치려 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아홉달 정도 되어 보이는 까만 어린이 고양이는 한쪽 귀와 다리를 다쳤던 것으로 보였다.
보름 전 어느날 우리 동네에 이삿짐을 운반하는 차량이 가득했었다. 아무래도 그날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아주 귀엽고 사람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낙천적이다.

내 고양이 순이가 세상을 떠난지 넉달이 지났다.
지금은 순이가 늘 앉아 있던 곳에 어린 고양이가 드러누워 새근거리며 자고 있다.
나와 아내는 이 고양이를 맡아 키우자는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조만간 동물병원에 다시 데려가 부러졌다가 저절로 붙어버린 것으로 보이는 다리를 검사하고 중성화 수술도 시키기로 하였다.

추워졌다.

영하의 기온이 되었다.
이제 겨울인데, 주말에는 또 광화문에 나가야 할 것 같다.


요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 한 장. 돌아가신 대통령의 관 앞에서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있는 분이 그의 오랜 운전기사였다는 미담 이야기를 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허리 숙여 절을 하고 있던 분은 그날 운구차량을 운전했던 분이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사실 관계를 확인하려 해보거나 하다 못해 옛 기사를 다시 찾아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미담을 원하고 동화를 만들고 신화처럼 여기기 좋아한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보고싶어하는 것을 보고싶은대로만 보려고 한다.

지금의 그 꾸며진 미담, 사실이 아니었던 동화가 복사되고 붙여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현재의 시절을 기가 막혀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남한의 사람들이 십여년 전에 얼마나 사회에 무관심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나는 앞으로의 우리가 조금만 더 이성적이고 약간만 더 합리적일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언제나 쉽게 잊어버리고 자신의 이익손실과 관계 없다고 여겨지는 것에 금세 무관심해지는 존재이다. 인간이란 원래 부터 그 정도의 존재이고,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더 나아지려고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은 아니더라도, 추하다.

2016년 11월 13일 일요일

노란 나뭇잎들.


시국은 시국이고, 계절은 여느때 처럼 노란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혜화동에서 종로 5가로 걸으면서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면 나무들 사이에 잠시 앉아 있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실망을 하고, 사람에게 상처 받아 외로와지는 것은 알고 보면 나의 탓이다. 나는 뭐 그렇게 사람들에게 기대를 하고 살가와지려고 애를 쓰는 걸까, 싶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사실은 아주 오래 전에 서랍 깊숙히 접어 둔 바람이다.

우울한 어깨를 하고 서울 시내로 향했다가,  그곳에서 노란 나뭇잎들을 보며 겨우 기운을 내었다. 내 어린 시절의 종로길을 걸을 수 있었던 오후가 고맙게 느껴졌다.


광화문에서.


수십만이라느니, 백만이 넘었다느니 하며 사람들은 숫자를 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종로에서 교보빌딩 모퉁이까지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밀려 걸어갔다. 그 넓은 장소에서 앞 뒤의 사람들과 몸이 닿은채로 몇 시간 동안 움직여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 청소년, 젊은이들, 어린이를 안은 여자와 남자들, 휠체어를 타거나 안내견의 도움을 받으며 걷던 맹인들 중 누구도 남을 밀치거나 소란을 피우거나 발을 밟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남한의 사람들은 원래 어깨를 부딪히거나 사람을 밀치거나 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아니었나, 했다.

아니나 다를까, 타인을 몸으로 밀고, 손을 뻗어 사람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사람들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전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떠들었고 아무 말이나 했다. 그러다가 만만해 보이는 상대를 보면 훈계질을 하거나 가르치려 들었다. 모두,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공감하지도 못하고 배우려 하지도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원래 그런 인간들이 나이를 먹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그들은 지금의 세상에 대하여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공손히 사죄하는 일이 먼저여야 옳지 않을까. 쓸데 없는 소리일테지만.


2016년 11월 11일 금요일

빨간 잎.


비 내렸던 날, 먼길을 출발하기 위해 주차한 곳을 찾아갔더니 빨간 잎 한 장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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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3일 목요일

십일월이 되었다.


집에는 낡은 책이 많다.
서적을 구입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아침에 아내가 읽고 있던 책에 대해 말을 걸었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집에 읽을 책이 없어."

원래 그런 거다.
시디나 책이나 구입하고 모아 놓아도 문득 소파에 앉아서 듣거나 읽을 것이 없기 마련이다.

십일월이 되었다.
지난 일요일은 내 고양이 순이가 죽은지 백 일이 되었던 날이었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못했지만, 나는 혼자 강가에 나가서 순이를 떠나 보냈던 아침처럼 긴 의자에 앉아 강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의식을 치르거나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냥 마음 깊이 그리워했다.

십여년 전에 이사를 다니며 가지고 있던 책을 많이 처분해야 했다. 이제는 그것이 아깝게 여겨지지 않는다. 낡은 책은 버려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두 번 다시 펴 보지 않았을 책들이었다.
집안에 무엇을 더 채울 것이 아니라 하나 둘 씩 버리고 잊는 습관을 가져보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