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2일 목요일

식구.


검은고양이 까미가 우리집에 '제 발로' 들어와 눌러앉아 살은지 두 해가 되었다.
집안을 휘젓고 다니며 종일 까불고, 나이 많은 고양이들에게 달려들어 놀아달라고 조르는 것을 매일 본다. 볕이 좋으면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졸다가 햇빛이 사라지면 이불을 찾아 드러눕는다. 이 고양이가 처음 내집에 들어왔을 때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흘 동안 잠만 잤던 것이 기억난다. 추웠던 그 해 십일월에, 바깥에서 고생을 했었으리라.

고양이 순이가 떠난지 두 해 넉달이 지났다. 검은 고양이 까미는 순이가 하던 짓을 신기하게 재연할 때가 많다. 나는 까미를 보다가 순이 생각을 했다. 까미를 쓰다듬다가 순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한밤중에 내가 자리에 누우면 검은 고양이가 조용히 다가와 내 팔을 베고 나란히 눕는다. 나는 깜박하고 검은 고양이의 이마를 만지며 '순이야', 하고 불러버린 적도 있었다.

다시 겨울이 시작되었다. 겨울동안 내 식구들이 사료를 잘 먹고, 군것질도 적당히 하고, 내가 없는 동안에도 집안에서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면 좋겠다.


.

2018년 11월 14일 수요일

퀸과 그 영화.


스팅은 50,000이라는 노래에서 세상을 떠난 록스타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We tweet our anecdotes, our commentary
Or we sing his songs in some sad tribute
While the tabloids are holding a story of kiss and tell
That he’s no longer able to deny or refute’

이 곡은 스팅의 앨범 “57th & 9th” (2016)에 실려있다. 이 음반이 발표될 즈음 뮤지션들의 사망소식들이 있었다. 이 곡은 데이빗 보위와 프린스가 세상을 떠난 시점에 쓰여지고 녹음되었다. 그 즈음 글렌 프라이 (Glenn Frey, ‘프리’가 아니다) 도 죽었다. 앨범이 발표된 이후 겨울에는 레미 킬리미스터 (Lemmy Kilimister) 가 사망했다. 스팅은 ‘rock stars don’t ever die, they only fade away’ 라고 노래한다. 그러면서 ‘타블로이드는 죽은이가 더 이상 부인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그의 성적인 사생활 보도를 계속하는 동안, 우리는 트위터에 우리의 일화, 우리의 해설을 쓰거나 슬픈 추모의 마음으로 그의 노래를 부르지’ 라고 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스팅의 저 노랫말을 떠올리게 했다.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고, 이제 누군가에게는 마음에 오래 남을 좋은 영화로 기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이 영화는 너무 상업적이었고, 그 떠들썩했던 광고만큼 가벼웠으며,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감히 생략해버렸다. 네 명의 밴드 멤버들은 스테레오 타입의 단순한 캐릭터로 변했다. 심하게 말하면 이 영화는 큰 돈을 들인 립싱크, 흥행에 대한 강박이 느껴지는 거대한 카라오케 같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기본적으로 사실에 가깝다. 그런데 그 사실들을 어떤 생각으로 비틀어 엮어놓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읽히고 쓰여진다. 그래서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오독과 오해는 진실과 거리를 둔 평가를 가져온다. 이 영화는 그래서 전기(傳記) 영화가 아니라, ‘실화에 기반을 둔 재연드라마’가 되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미디어의 역할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면 그만일 수도 있다. 이 글은 오랜 팬의 입장에서, 퀸과 프레디 머큐리를 다루는 극영화라면 적어도 이 영화보다는 더 나은 작품이길 바랐던 마음으로 쓰는 푸념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여자친구와 뒹굴다가도 피아노를 연주하던 어떤 천재가 마음 착하고 순한 성격의 세 멤버들을 만나 6분짜리 명곡을 만든 록스타가 되고, 사생활의 문제 등으로 밴드를 버리고 솔로음반을 만들다가 Live Aid 공연 직전에 마치 돌아온 탕아처럼 밴드에 다시 합류하여 록음악사에 오래 남을 전설적인 공연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 되어버렸다. 쉽고, 단순하고, 피상적이다.

1985년 7월 13일의 라이브 에이드 무대의 배경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그리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1984년 1월에 퀸은 13번째 앨범 The Works 를 발매했다. “Radio Ga Ga”와 “I Want To Break Free” 는 큰 성공을 거뒀다. The Works 앨범의 투어는 1984년 8월에 시작하여 다음 해 5월까지 이어졌다. 1985년 1월에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Rock in Rio 페스티벌이 처음 시작되었고, 퀸은 아이언 메이든, 화이트스네이크 등과 함께 그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였다. Rock in Rio 에서의 공연은 영상으로 녹화되어 같은 해 5월에 “Live in Rio” 라는 타이틀의 비디오로 발매되었다. 해를 넘긴 The Works 투어의 일정은 아직 남아있었고, 퀸은 뉴질랜드, 호주와 일본 투어를 계속했다. 이 투어는 4월에 시작하여 오사카를 마지막으로 5월 15일에 끝났다.
프레디 머큐리의 솔로 음반은 4월 29일에 발매되었다. 퀸이 호주 시드니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고있던 중이었다. 멜버른에서의 무대는 조명을 제어하는 컴퓨터시스템의 고장으로 조명도 없이, 폭우 속에서 엉망진창의 공연이 되어버렸다. 닷새 후 이어진 시드니에서의 네 차례 공연까지 마치고 일본으로 날아가 토쿄, 나고야, 오사카의 공연을 했다. 퀸의 멤버들은 모두 지친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두 달 뒤, 런던과 필라델피아에서 16시간 동안 동시에 벌어진 최대의 음악 콘서트 Live Aid 가 열리게 되었다.

퀸은 1982년에 발표한 앨범 Hot Space 를 위한 미국과 일본 투어에서부터 라이브 세션을 도와줄 연주자를 고용했었다. 그는 Fred Mandel이라는 연주자로, 기타와 키보드를 맡아 밴드의 사운드를 보강해줬다. Fred Mandel 은 앨범 The Works 에서 신디사이저와 피아노를 맡았다. 그리고 그는 브라이언 메이가 에디 반 헤일런 등과 함께 했던 Star Fleet Project 에도 참여했다. 이것은 일회성 이벤트의 성격이었고 음반은 “Radio Ga Ga”가 싱글 발매되었던 1983년 11월에 발표되었다. 밴드 멤버의 솔로 음반은 프레디 머큐리가 처음이 아니었고 유일했던 것도 아니었다. 로저 테일러는 1984년 7월에 솔로앨범 Strage Frontier 를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레코딩 세션을 맡은 다른 연주자들이 있었지만 퀸의 멤버들도 함께 참여하여 녹음을 도왔다. 존 디콘은 베이스와 믹싱을 맡았고 브라이언 메이는 “Man On Fire”에서 리듬기타를 쳤다. “Man On Fire”는 퀸의 앨범 The Works 를 위해 녹음되었다가 수록되지 못했던 곡이었다. 이 곡에서 프레디 머큐리는 추가적인 키보드를 연주해줬다.

밥 겔도프는 Live Aid 의 무대에 퀸을 출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퀸이 확답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거의 일년여 동안의 투어로 지쳤기 때문이었기도 했고, 프레디 머큐리의 솔로 음반이 발매된 직후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솔로 음반은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자신의 솔로음반을 홍보하기 위한 프로모션도, 공연의 계획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Live Aid 가 열리기 두 달 전에 끝난 The Works 투어에는 Fred Mandel 의 뒤를 이어 퀸의 라이브 세션 연주자로 참여했던 뮤지션 Spike Edney가 있었다. 그는 Fred Mandel과 마찬가지로 키보드와 기타를 연주했고 코러스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Splike Edney는 바로 밥 겔도프의 밴드 Boomtown Rats 의 전 멤버였다. 그는 Live Aid 의 무대에서도 퀸과 함께 연주했다.
밥 겔도프는 Spike Edney를 통해 프레디 머큐리와 연락을 할 수 있었다. 결국 퀸은 Live Aid 에 참가하기로 결정했고, 출연 약속 시각은 오후 6시 41분이었다.

1985년 7월 13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퀸의 무대는 굉장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솔로 음반에서 싱글 커트된 대여섯 곡의 노래들이 히트를 하고 있었고, 퀸의 미래에 대해 의심하는 가십성 기사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퀸이 무대에 오른 것에 놀라와했고 더욱 반가와했다. 이 이벤트에서 퀸은 웸블리 스타디움의 프라임 타임에 등장하여 밴드의 존재감을 새롭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퀸은 라이브 에이드 쇼를 ‘훔쳐버릴’ 정도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날 퀸의 21분짜리 라이브는 전설로 남아 마땅했다. 자신들의 장비를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출연하는 뮤지션들 모두 무대에 설치되어 있는 오디오 장치와 조명과 PA 들을 그대로 썼다. 똑같은 환경에서 퀸의 무대는 공연장과 TV 앞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그들의 앞 순서는 U2였고, 그들의 뒤에는 데이빗 보위와 The Who, 그리고 엘튼 존이 기다리고 있었다. 뒤에 이어졌던 거물들의 라이브 역시 훌륭했지만, 퀸이 휩쓸어버리고 간 무대 이후 이어진 쇼들은 평범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아직 해가 떨어지기 전의 시간이어서 퀸의 무대는 조명의 효과도 없었던 것까지 고려한다면 아무리 감탄해도 지나치지 않는 무대였다.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은, 이미 그 당시 프레디 머큐리는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고, 그러므로 1986년에 준비되어있었던 밴드의 스타디움 투어를 그 언제보다도 훌륭히 해내고 싶어했었다는 것이었다. 라이브 에이드에서 보여준 밴드의 저력과 인기는 그대로 다음 해의 공연으로 이어졌고, 1986년의 투어야말로 밴드의 전성기라고 해도 좋을만큼 대단했다. 라이브 무대에서 가성을 삼가고 목의 상태를 유지하는데에 신경을 썼던 프레디 머큐리는 적어도 1986년 투어에서는 마치 모든 것을 쏟아내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나중에 알고보니, 성큼성큼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굴하지 않았던 비범한 음악인의 남은 시간들이었다는 것이 팬으로서 한층 더 가슴 아프고 슬프게 여겨졌었다. 1979년에 나왔던 두 장짜리 라이브 앨범 Live Killers 가 앨범 The Game 직전까지의 퀸의 모습을 잘 담고 있었다면, 프레디 사후 발매된 Live at Wembley ‘86 앨범은 밴드와 프레디 머큐리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뮤지션으로서의 프레디 머큐리를 보여주는데에도 모자랐지만 자연인으로서의 파로크 불사라를 묘사하는데에도 부족했다. 그는 적어도 영화 속에서 그려진 것 보다는 훨씬 더 대접받아야 할 가치가 있었다.

1980년 퀸의 앨범 The Game 에 수록되었던 “Another One Bites The Dust” 의 성공은 1982년에 발표한 앨범 Hot Space 를 만드는데에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 마이클 잭슨은 “Another One Bites The Dust”를 통해 퀸과 가까와졌고 밴드가 로스앤젤레스에 들를 때에 자주 만나며 공연장을 찾기도 했다. 앨범 The Works는 로스앤젤레스의 Record Plant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 이것은 밴드의 첫번째 미국에서의 녹음이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 이전까지 하지 않았던 스타일의 음악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나머지 멤버들은 그와 반대로 퀸의 음색이 변질되어버리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었다. 프레디 머큐리가 런던과 뉴욕의 클럽을 다니며 유흥음악으로서의 댄스뮤직과 Funk, 디스코 사운드에 빠져들게 되는 것에 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 그의 개인 매니저 폴 프렌터였다. 나머지 세 멤버들이 폴 프렌터가 프레디 머큐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매우 싫어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네 사람 모두 영리하고 재능이 넘치는 뮤지션들이었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조금 더 특별했다. 그는 오페라와 지미 헨드릭스, 70년대의 록 사운드와 흑인음악과 성공회 교회의 찬송과 페르시아 문화권의 민요까지 몸안에 담고 있었다. 그는 펑키와 디스코, 클럽의 댄스음악을 새롭게 탐구하고 싶어했다. 완벽주의자로서 좋은 음악이라면 무엇이든 가져와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고 싶어했다. 애정행각과 사치스런 파티, 그리고 폴 프렌터의 천박한 의도와는 별개로 그 과정은 프레디 머큐리라는 음악인에게는 중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The Bird (1988) 와 대비하여 생각하게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재즈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미국의 근현대사, 그리고 찰리 파커라는 인물에 대한 진중한 탐구를 그대로 영화에 옮겨주었다. 그런데 The Bird 처럼 영화를 만들면, (단지 음악이 비밥재즈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기 어렵다. 진중함과 깊이를 포기하는 대신 드라마와 로맨스, 자극적인 즐거움을 선택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어할 수 있는 영화를 판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뒤의 것 - kiss and tell 에 집중했다.

예를 들어 “Bohemian Rhapsody” 라는 곡이 영화에서처럼 특출난 재능을 가진 밴드의 리드보컬이 순박한 멤버들을 부리며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전작인 앨범 Sheer Heart Attack 을 통해 보컬 오버더빙과 오페라틱 구조의 song structure 를 더 공부할 수 있었던 밴드의 힘이었다던가, 관객들과 주고받는 보컬 임프로비제이션이 “Now I’m Here” 의 라이브에서부터 꾸준히 진화하고 변화하여 프레디 머큐리의 중요한 무대 연출 중 하나가 되었다던가, 프레디 머큐리의 뮤지션으로서의 면모는 단지 비범한 보컬 뿐 아니라 그의 출중한 피아노연주였다… 등의 이야기를 아주 짧은 인서트 정도만 삽입하였어도 영화적으로 잘 전달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모두 집어넣었다면 영화는 복잡해지고 사람들은 지루해했을지도 모른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어쨌든 위대했던 록밴드를 다시 소환하는데에 공헌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데에는 영화 자체보다도, 자신들이 위로받고 행복해했던 음악들과 그 음악을 만든 그룹 퀸에 대한 애정이 오래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뉴욕타임즈에 록음악 비평을 쓰는 A.O. Scott 은 이 영화를 소개하며, “유튜브와 레코드를 보고 듣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그의 의견에 매우 동의한다.




.

2018년 11월 2일 금요일

TV Live Show.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서 공연을 했다.
TV 생방송인줄을 하루 전에 알았다. 그리고 완공된지 몇 년이 지난 그곳에 나는 처음 가보았다.
전날 리허설을 할 때에도 뭔가 순조롭고 좋은 기분이었다. 생중계로 준비된 공연이었는데 음향과 진행 등이 모두 좋았다. 모든 것이 잘 되어있어서 어쩐지 생경한 느낌이었다는 것이 우스웠다. 원래 다 그래야 하는 것 아니었나 싶어서.

요즘 어머니의 병간호 때문에 밤마다 병원에서 보내고 있는 중이다. 무대 위에서 뭔가가 불편했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악기연습을 충분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인줄 알았다. 곡이 계속 진행되면서 불편했던 이유가 어깨와 허리 통증 때문인 것을 알게 됐다. 그러고보니 몸과 마음이 편했던 적이 아주 오래 전의 일처럼 여겨졌다.

더 많이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 연말까지 남은 공연은 두어개 뿐이다. 엄마가 회복하시고 가족들이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면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