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8일 금요일

그림, 공연, 커피와 사람.


날짜를 미루었다가 아내의 그림이 전시되어있는 곳에 갔더니... 오늘이 글쎄 마지막 날이었다고. 조명은 이미 꺼져 있었고 하나 둘씩 작품 철수 중.
진작 시간내어 들러서 조금 멋나게 축하 정도는 해주고 싶었는데,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림을 그린 당사자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뭔가 미안해하지 않기도 그렇고... 좀 이상한 상황.

아내는 킬킬 웃으며 그림 옆에서 사진 한 장을 찍고 그 자리에서 벽에 붙어있던 그림을 툭 떼어 내어 집에 가지고 돌아간단다.

나는 공연 리허설 시간에 맞추어 출발을 하느라 서둘러 떠나야 했다.


올해의 마지막 공연.
짧은 분량의 작은 공연이었지만 리허설 때 부터 편안한 앰프 사운드.
(DB751 + 두 개의 DB410 캐비넷. 디렉트 박스 대신 내장된 밸런스 단자를 써보면 어떨까 궁금해했는데 계속 바쁘게 움직이던 스탭분들의 일을 번거롭게 해드리기 싫어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좋은 소리로 한 해의 끝 공연을 할 수 있었어서 기분 좋았다.


공연을 마치고 멤버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마침 친구의 커피집과 가까운 곳이었어서 동료들과 헤어진 후에는 그곳에 들러 하루를 마감하는 커피도 한 잔. 맛은 별로였어서 성의없이 내려준 티가 났지만.

커피집은 친구 녀석의 둥지 같은 느낌이 있었다.
좋은 일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니 더 좋은 일.
갓 볶은 커피향기가 사람을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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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5일 화요일

얼어붙은 겨울.


베토벤을 듣고 있는 새벽.
몇 해 전에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 Wilhelm Bakhaus 라는 분이 1969년에 돌아가신 분이었다는 것을 (너무 한참) 뒤늦게 알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까먹고 조금 전에 베토벤 소나타가 생각이 나서 틀어 둔 채로, '와... 이 사람은 아직 연주를 하시나?'하고 또 찾아봤다가 몇 해 전에 놀랐던 기억을 되찾음. 바보도 아니고.

CD 음반으로 겨우 듣고 있는 20세기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이렇게 좋은데, 쇼팽이 살아있을 때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방 안에서 그의 연주를 직접 들었던 사람들의 감정은 어땠을까.
좋았겠지 뭐. 졸았거나.
완전히 취향의 문제이지만 키스 자렛의 연주 도중에 들리는 신음은 너무 너무 듣기 좋은데 글렌 굴드의 허밍은 어김없이 짜증이 났었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한 주일을 보내고 몸과 정신이 망가져 있었다. 집에 돌아와 손만 씻은채로 쓰러져 다섯 시간 동안 잤다. 갑자기 뺨을 맞으면 갑자기 이성적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뭔가 많이 엉켜있는 채로 기분좋지 않은 곳으로 치닫고 있다가 스스로가 꽤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체험해보면 순간 편안한 정신 상태를 되찾기도 한다.

바로 지금이 그런 느낌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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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하지마.


조금 힘들었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들었는데 문자메세지가 와있었다.
뒤늦게 확인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동안 내가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었던 학생들은 모두 아르바이트를 하며 악기연습을 하고 학교공부와 음악공부를 하느라 하루가 모자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집안 형편이 특별히 어려워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조금의 사치를 부리기 위해서도 아니라, 단지 그렇게 일을 해야 하는 현실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휴일을 누리지 못하는 십대의 시절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내가 미안해요,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다. 그럴 자격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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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4일 수요일

다 보인다, 얘.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자꾸 눈 곁에 뭔가 움직이는 것 같다.
이지가 스피커 뒤에 숨어서 눈이 마주치면 몸을 낮추고 내가 보지 않는 체를 하면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놀고 있었다.

많이 재미있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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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9일 금요일

불조심.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동생의 집 아래층에서 작지 않은 화재가 났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아내는 낮 부터 동생 집 앞에서 함께 걱정을 하며 소화현장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동생네는 피해가 없다고 했지만, 불이 나고 비어있던 다른 집에서 숨지고 만 개가 한 마리 들려 나오기도 했다고 들었다.
위험한 일을 목격했는데도 나이 어린 조카 아이들은 의연했다. 저녁에 찾아가 만났을 때에 아이들은 장난하듯 말을 던졌지만 사실은 제일 먼저 집에 남아있던 동물과 벌레들을 걱정했다고.
정서적인 균형감은 그 녀석들 엄마인 동생의 생활에 배인 정서 덕분일 것.
여러가지로 다행.
하지만 어릴적 부터 늘 동생보다 덜떨어지고 안정된 정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 라는 녀석은 여러가지로 안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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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병인지도.


학생들의 악기가 한데 모여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 악기들의 주인들이 저마다 그들의 꿈을 이루고 맨 처음 가슴 두근거렸던 느낌을 잃지 않았으면 정말 좋겠는데.
지나친 자기객관화 탓인지, 그저 계절의 탓인지... 우울함이 도져서 정작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떠날 생각을 일삼는다.
갑자기 지쳤다기 보다는, 오래 전 부터 아닌척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며 버텨왔을지도 모르겠다.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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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5일 월요일

Jazz


금요일 낮.
하루 내내 집에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오후에 전화를 받았다.
담백한 통화. "연주하러 올 수 있냐?", "네, 갈게요."

몇 번 대리연주를 하러 불려갔던 재즈클럽에 또 다녀왔다.
생활의 여건이 되지 않아 정기적으로 클럽 연주를 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한 달에 몇 번 정도 이런 류의 Gig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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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졌다.


아직은 늦가을이라고 해도, 11월.
자전거에 올라타고 달리면 체감 온도 -5도.
겨울의 매서운 추위보다 이런 날씨가 더 춥게 느껴질 수도 있다.

어제도, 오늘도 밤을 새우고 늦게 일어나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러 나오겠느냐는 전화를 받고 아주 약간 망설이다가 뛰어 나갔다. 겁도 없이 여름옷을 그대로 입고 집 밖에 나왔다가 다시 들어와 외투를 한 벌 더 입고 나갔다.
오후 네 시 반.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을 보며 출발.

항상 들러서 커피를 한 잔 하는 카페에 무슨 파티가 있었던 것인지 야외에 테이블과 의자들이 나와 있었다. 땀에 젖었기 때문에 야외의 테이블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잠깐 앉아 있었더니 추웠다. 달릴 때에는 손과 발이 시려웠다.

엿새 만에 자전거를 타고 나왔는데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겨울용 옷과 장갑 등을 사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전거를 닦아서 집 안의 한 쪽에 보관해두고 겨울에는 쉴까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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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9일 월요일

리허설을 마친 후.

어린이대공원 돔아트홀에서 리허설을 마치고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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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이 언다고 했다.


어제 밤을 새워버리고 잠에서 깨어났더니 이미 오후였다.
바깥의 날씨는 좋아보이는데 어쩐지 몸이 축축 늘어져서 집에서 뒹굴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을 때에, 종남이가 전화를 했다. 자전거를 타고 워커힐 쯤에서 만나면 어떻겠느냐고.
방금 전 까지 무릎이 아프고 피곤해서 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섬 주섬 옷을 챙겨입고 눈 반짝이며 자전거 펌프를 들고 서두르는 나를, 곁에 있던 아내는 미취학 어린이를 쳐다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서 서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하는 덕소의 산마을을, 의외로 쉽게 스윽 넘어버렸다. 바람이 불어서 살짝 휘청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 만나서 커피 한 잔, 국수 한 그릇. 이야기를 나누고 났더니 이미 어두워져있었다. 쌀쌀해진 강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게 돌아왔다.
수요일 부터는 0도로 기온이 내려가고 주말에는 드디어 영하의 날씨가 된다고 들었다. 추워지면 자전거는 한쪽에 세워두고 이제 좀 정적인 생활을 해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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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마지막 공연.

공연을 다 마쳤다.
또 지나갔고 떠나 보냈다.
오래된 공연장의 습한 기운에 가을비의 축축함이 잘 어울렸다. 서늘하고 눅눅하여 음삭소리에도 습기가 맺혔다.

좋아하는 앰프가 선물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울리고 있는 앰프의 소리가 등을 토닥여주는 것 같이 좋았다.

Aguilar DB 751
집에서 나갈 때에 아길라 톤해머를 챙겨가려고 손에 들었다가 다시 놓아두었다. 공연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톤해머가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다이렉트 박스는 얼마든지 좋은 것이 많지만, 연주하는 사람의 기분을 알아주는 스탭분들의 마음 씀씀이에 정말 고마와했다. 공연을 마친 후에도 조금 더 쳐보고 싶었을 정도로 그날의 소리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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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8일 일요일

가을 밤 가을 낮


음악에 관련되지 않은 일로 밴드 멤버들이 모였다. 다음날 공연이 있어서 그냥 집에 올줄 알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주점으로 이동했다.
술을 먹지 않는 두 사람은 옆 식당에 들러 심야 모밀국수를 한 그릇 씩 먹었다.
요기를 하고 다시 술집으로 돌아갔더니 벌써 비워져 한쪽에 줄 서있는 술병들.
그리고 끊이지 않는 이야기들.

마침 오래 전 연주하던 클럽이 근처에 있어서 잠시 술자리에서 나와 그곳에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 세월은 흘렀고 사람들은 나이들었다. 금요일 밤인데도 가게 안이 비어있었다.
불꺼진 무대 위에도 나이 먹은 악기들이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다른 분들의 소식을 전해 듣기도 하고 푸념 섞인 사장형님의 농담에 웃어도 보였다.
습기 머금은 바람이 여의도의 골목을 쏘다니고... 어쩐지 나도 잠깐 생각을 놓아두고 독주라도 한 잔 걸치면 괜찮을 기분이었다.


낮에 잠깐 타고 나갔던 자전거 덕분에 조금 마음이 안정되었던 것인지, 머리 속은 덜 복잡해진 느낌이었다. 혼자 아스팔트 잘 닦인 도로를 미끄러져 달리다가 오늘 같은 날씨라면 그 친구, 그 형도 어디에선가 자전거를 타고 있을지도 몰라, 했는데 과연 그랬었더군.

마른잎이 길 위에 뒹굴고 땀이 식으면 으슬으슬해지는 계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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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3일 화요일

일요일 산책.


지난 밤 장거리 고속도로 운전으로 (다른 곳은 다 멀쩡한데) 무릎에 탈이 났었다.
구부리면 아픈 증상인데 네 시간 씩 이틀 연속 운전을 하는 바람에 낫고 있던 것이 다시 약간 아프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고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일이 없으니 게으름을 피우며 잠을 많이 자두고 싶었다.
아내가 만들어준 최소한 동북아시아에서는 제일 맛있을지도 모르는 스파게티를 먹었다.
이제부터 축 늘어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재근형으로 부터 문자메세지가 왔다.

'원식아, 날씨가 좋다. 나는 강 건너에 와있다.'
'지금 나갈게요.' 라고, 답장을 보내드렸다.

그래서 약 15km 떨어진 강건너의 강변카페에 도착했다.
카페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물기를 닦으며 나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왕복 30km의 거리였지만 돌아올 때엔 어쩐지 무릎의 통증이 많이 없어진 느낌이어서 괜히 집을 지나쳐 삼십분 정도 더 달렸다. 조심하겠다는 생각을 잠시 잊고 속력을 내다가 정신차리고 다시 천천히.

집에 돌아와 잠깐 멍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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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1일 일요일

진주에 다녀왔다.

토요일에 진주에서 공연을 하고 한 시간 전에 집에 왔다.
지금은 새벽 두 시 오십 분.

금요일 저녁, 진주로 떠나기 몇 시간 전에도 재활을 위해 자전거를 탔다. 조금 따뜻한 날씨였어서 오랜만에 땀을 흠뻑 흘렸다. 개운해진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두 시간을 잤다.

지방도로를 달리다보니 가보지 않았던 곳에도 들러보게 되었다.

일몰을 보며 집에 왔다. 떠날 준비를 마친 것은 밤 아홉 시.
자동차에는 아직도 여덟 개의 기타들과 페달보드들이 잔뜩 실려있었다. 밤길을 달려서 진주에 도착했다. 예약해둔 숙소에서 푹 자고 싶었는데 어쩐지 잠을 이루지 못하여 고생을 했다.

토요일 아침 아홉시에 호텔에서 나왔다. 진주의 중앙시장 안에 있는 제일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맛있는 국밥을 한 그릇 먹으니 그제서야 잠이 쏟아졌다.
밥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한 시간을 잤다.
리허설을 위해 이동하던 오후에는 하면옥에 들러 진주냉면을 맛보았다.

나는 어릴적에 이것을 먹어본 적이 있었다. 잊고 있다가 음식을 먹기 시작했을 때에 기억이 났다.

공연장은 옛 진주성 안에 있는 진주국립박물관이었다.
리허설 시간에 맞춰 도착하느라 인근 커피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조금 미리 와서 박물관 구경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도착해서야 했다. 냉면집은 검색하여 찾아다닐줄 알면서 이런 것에는 무심했다니.
남강이 굽어 흐르는 주변 풍경이나 겨우 마음에 담아왔다.
정작 필요할 때에는 사진을 찍어둘 생각도 못한다.
오랜만에 진주에서 살고 있는 손정일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하며 사진 한 장 찍어둘 것을.

해외의 리뷰에서 좋은 평을 받고 있길래 평소에 궁금해 했던 SVT-7 PRO를 만났다. 과연 좋았다.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앰프였다.

서늘해지는 밤공기를 맡으며 공연을 마쳤다. 커피 한 잔 더 마실 시간도 없이 짐을 챙겨 싣고 다시 집으로 출발해야했다. 고속도로를 쉬지 않고 달려 집에 도착했다.

이제 시월도 열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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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9일 금요일

하늘 푸르다.


많이 잤다.
아침에 일어났다가 다시 더 잤다.
어제는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숨쉴 때 마다 자각하게 될 정도의 상태였다.
잘 자고 일어났더니 고양이들이 몸을 부비며 인사를 해줬다.

음향업체의 창고에 보관중이었던 악기들을 찾아왔다.
창문을 열어두고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점점 온기가 사라지고 있는 바람 냄새를 맡았다.



오후에 시간이 났다.
그리고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갈 것인가 자전거를 탈 것인가를 고민했다.
햇빛은 인자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나, 하고는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고 집을 나섰다.
엿새 만에 타보는 자전거.

가는 길에도 맞바람, 오는 길에도 맞바람이었다.
그늘진 도로에서는 추위를 느꼈다.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국도로 달리고 있었다. 다녀보지 않았던 길이었기도 하고 무릎에 무리를 주고 싶지 않아서 느릿 느릿 산보하듯 달렸다.
친구들과 선배들의 조언대로 기어를 가볍게 해두고 회전수를 적당히 늘리는 방법으로 요령껏 달렸다.

어느 마을에 멈춰서서 잠시 쉴 곳을 찾았다. 바람도 피하고 의자도 준비되어 있는 버스 정류장에 털썩 앉았다.
아직 여름용 옷과 신발이어서 서늘함이 많이 느껴졌다.
겨우 한 해 만에 맡아보는 가을향기인데 무척 새로왔다.
기껏 피어있던 꽃들은 강바람 들바람을 얻어 맞으며 그럭 저럭 버텨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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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조용한 강변.

조용했다.
여름에 사람들로 붐비던 강가의 길이 비어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 아니었다면 한참 더 앉아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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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 중.

공활한데 높고 구름은 많았던 가을하늘.
정색을 하고 바로 앉아서 큰 음량으로 음반을 한 장 죽 들었다. 마지막 곡이 시작될 즈음 일어나 어슬렁거리며 나갈 준비를 했다.
여름에 자주 다니던 노란 담벼락이 있는 집에 들렀다.

가을에 막국수 말고 먹을 게 뭐 있나, 라는 마음가짐으로 맛있게 한 그릇을 먹었다.
여름철 내내 사람들이 가득했던 식당에 손님은 나 한 사람이었다. 아주머니는 아예 곱배기 만큼 가득 국수를 내어주셨다.
이제 먹는 양이 줄어서 이렇게 많이는 못 먹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틀렸다. 마지막 한 가락의 국수도 남기지 않고 싹 비웠다.

오늘도 지방도로를 따라서 화물차와 버스를 아슬 아슬 피하며 삼십여 킬로미터를 산책했다. 아프던 무릎은 점점 낫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팠다.

내일은 밤중에 합주연습을 마친 직후 진주로 출발할 예정이다. 토요일에는 진주에서 야외공연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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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6일 화요일

병원


지난 달에 자전거의 뒷 드레일러가 갑자기 비뚤어져서 변속을 아무리 해도 소음이 나고 있었다. 알고보니 행어가 휘어있었다. 한참 언덕 오르는 일에 무슨 사활을 건 사람처럼 지랄 열중을 하던 때 였다.
정비해주시는 분이 '도대체 얼마나 힘을 주고 타셨던 건가요'라고 했었다.

그리고 갑자기 이십여년 전 이야기.
재미없고 흥미없다는 군 시절 이야기.
짐을 싣고 내리는 트럭 위에서 무거운 상자가 떨어져 그 모서리에 무릎을 맞았었다. 많이 붓고 아팠었는데 미련한 천성으로 그냥 대충 뭔가를 발라두고 낫기를 기다렸었다.
공교롭게도 그 후에 단단한 물건이라든지 쇠 같은 것에 하필 그 아픈 무릎이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며칠 후에는 금세 아물고 괜찮아져서 잊고 지냈다.

몇 년 전 부터 그 무릎이 이유없이 아팠다.
병원 가는 것을 아주 무서워한다는 핑계로 파스나 붙인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그 때 마다 그냥 넘겼었다. 조금만 운전을 오래 하거나 하면 점점 통증이 심해졌는데, 아내가 병원에 가지 않을테냐고 말할 것이 두려워 웬만하면 참았다.

부산 공연 전날, 한 두 시간 자전거를 타고 나가서 유유히 돌아와 집 앞에서 멈췄을 때에, 딱 신호가 왔다. 바르게 편 상태에서 조금만 무릎을 굽혀도 심하게 아팠다. 통증 참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건 정말 심한 통증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엄살을 보태면 걸을 수 없이 아팠다.

더운물로 찜질을 했다. 구멍난 옷을 덧대어 꿰메듯 파스를 덕지 덕지 붙였다. 그 상태로 사흘 동안 공연을 하고 왔더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발로 병원에 갔다.
이미 오래 전 부터 병원에 가자는 아내의 말을 못들은체 하며 지냈었기 때문에 칭찬도 못받고 특별히 위로도 못받는 상태이지만, 어쨌든 솔선(?)하여 병원으로...


방사선 촬영에는 (잘생긴) 뼈만 예쁘게 나왔는데, 특별한 소견이 없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 뭔가 어려운 이야기를 잔뜩 들었지만 하여간 정상은 아닐테니 치료를 꾸준히 받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 약도 사 먹고 물리치료도 시작했다.

역시 자전거 때문일까요, 라고 여쭸더니, '무슨 선수도 아니라면서... 그 정도로 갑자기 무릎이 아프지는 않아요'라고 하셨다. 약간 찔림.
하여간 뭐든지 적당한 정도로 하는 걸 아직도 못배웠다.
겨우 몇 십년 사용했다고 잔고장이 나는 사람의 몸이라니, 내구성 빵점이다...라며 투덜거리고 있는 중이다. 아직 많이 써야하니까, 치료를 잘 받고 관리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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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5일 월요일

부산 공연.

악기를 미리 차편으로 보낼 수 있었던 덕분에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갔다.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몇 년 만에 지하철을 타보았다. 갈아타거나 출입구를 찾아야 할 때에 바짝 긴장을 했다. 스스로 내가 멍청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 지레 겁을 먹는다. 그만큼 조심하게되 된다.

리허설을 위해 공연장에 도착했더니 이미 모든 준비가 되어있었다.
완벽한 음향, 악기와 앰프와 모니터의 위치, 연주하는데에 필요한 것이 다 갖춰진 상황이었다. 이런 때에 매우 고맙다.

공연장에는 이런 것이 펼쳐져 있던 모양이었다. 다른 분이 찍어주신 사진이었다.

무대 위의 조건이 좋았기 때문에 첫날의 리허설도 좋았다.


이번 부산행은 밀면집 투어를 했다.
첫날 도착 후 저녁을 밀면으로 먹었다. 공연 후 저녁은 냉면을 먹었다. 둘째날에도 두 끼 식사 중 한 끼는 밀면을 먹었다. 귀가하는 날 부산역으로 가는 길에 남천동에 들러 또 밀면을 먹었다.

부산국제영화제도 끝났다. 공연을 마친 후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이 끝난 것을 늦게 알았다.
일하느라 좋아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며 지낸다.

첫날의 공연을 마치고 나왔더니 공연 시작 즈음 사직구장에서 지고 있던 롯데자이언츠가 그 사이 역전승을 했다고 했다. 부산 전체가 신나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시간도 많았고 렌트카도 있었어서 부산 시내를 돌아다닌다거나 심야 드라이브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급히 휴식이 필요했다. 호텔로 기어들어와 쓰러져버렸다.
다음날에도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값 비싼 호텔 사우나에서 급찜질을 했다. 맥을 못추고 침대에 쓰러져있다가 일어났더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두번째 날 공연장에 도착했을 때의 하늘. 하늘에 구름들이 흩어지고 모이길 반복했다.

공연을 잘 마쳤다.
성취감이 있었다. 이번 공연은 만족스러웠다.
두어 시간 공연 중 한 시간 반을 플렛리스로 연주했다.
개운한 기분이었다.

콘트롤룸에서 찍어준 사진이었다.
어쩐지 공연 후에 내 얼굴이 좀 그을린 것 같았다. 사진을 보니 아예 조명으로 태닝을 시켜줬던 것이었구나.

부산역으로 향하는 길에 잠시 멈추어 바람소리를 들었다.
이틀 동안의 공연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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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3일 토요일

산책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어제밤에 하다가 말았던 일을 마쳤다.
창문으로 찬 공기가 들어왔다. 그런데 햇빛이 밝고 하늘은 맑았다.
세수하고 옷을 챙겨 입고, 자전거 바퀴의 공기압을 체크하고 가방을 등에 메었다.

지난 밤에 들렀던 능내역에 다시 도착.
조용한 역사 담벽에 햇빛만 요란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여름 내내 몇 번이나 지나다녔던 곳.
이제는 슬슬 동네 골목 돌아다니듯 산책 삼아 들러보는 곳이 되었다.

인위적으로 꾸며놓은 세트와 같은 장소라고 해도 뭐 어떤가 싶었다.
자전거로 달려와 편안한 마음으로 쉴 곳이 있는 것을 고마와했다. 벽에 기대고 앉아 쵸코바 한 개를 먹고 물을 마셨다.
그래도 된다면 볕을 받으며 앉은채로 잠깐 졸았으면 좋겠을 정도로 따사로왔다.


따사로운 볕, 푸른 하늘, 그리고 조용한 의자.
집에 돌아오니 한 시가 넘었다. 잠깐 산책삼아 다녀오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뭐가 조금 아쉬워서 집에 돌아와 아내의 자전거를 타고 또 동네 한 바퀴.

한적한 나홀로 자전거 산책을 마쳤다.

이제 금요일, 토요일에는 부산에서 공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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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1일 목요일

합주


금요일, 토요일에 부산에서 하게될 공연 준비를 했다.
마지막 연습이었다.
특별히 준비한 노래들이어서 시간이 걸렸다. 멤버들이 한데 모여 연습할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서 합주의 기간이 길어졌다. 오늘의 소리도 괜찮았다. 어서 공연장에 가서 리허설을 하고 싶어졌다.

이번 공연에서는 플렛리스 프레시젼을 주로 쓸 예정이다.
악기의 상태도 최상이다. 모든 준비가 잘 되었다.


공연 음향팀의 배려로 공연에 쓰일 악기들을 음향팀에게 맡기고 우리는 간편하게 기차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연습을 마친 후 악기들을 모아 내 차에 싣고 음향팀에게 전달했다. 자동차에 가득찬 악기들을 보니 (전부 내 것도 아니면서) 뭔가 배가 불러진 느낌이어서 한 장 찰칵.

어제 여주에서 어쿠스틱 기타 강의를 하다가 떠올랐던 노래가 입에 붙어서 오늘도 집을 나서며 계속 그 노래를 흥얼거렸었다.
개에 대한 노래였는데... 연습실에 도착을 했을 때에 마중나와줬던 개들이 있었다.


'백구'를 흥얼거리고 있었는데 눈앞에 갑자기 백구가 한 마리 쨘.
햇빛을 즐기고 있었구나. 먼지 많지 않은 곳에서 놀으려무나.
차 조심하고.
주차하고 있는데 뒷 바퀴에 바짝 붙어 따라오는 바람에 진땀을 흘렸다.

연습 후 돌아올 때에는 다른 녀석이 큰 길 까지 따라나와서 배웅해줬다.
이런 바람직한 개들을 봤나. 어쩐지 네가 제일 잘생겼더라 했다.
다음에 올 때엔 뭔가 먹을 것이라도 사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초저녁에 악기를 실어 나르느라 하남에 들렀을 때에 거기에서도 개 한 마리를 만났다. 이 개의 집 앞에 (마음 속으로 양해를 구하고) 잠시 주차... 맘씨 좋게 생긴 개는 짖지도 않고 창문 열려있던 내 차를 봐주고 있었다.

오후 내내 무척 심심했으니 웬만하면 좀 놀아주고 가라는 꼬리짓을 못본체 하고, 손 흔들어 인사만 해주고 왔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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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왔더니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바삐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눌러 쓰고 자전거를 타고 달려나갔다. 일요일 이후 일하느라 자전거를 탈 시간이 없었다.
금요일 부터 돌아오는 일요일 까지는 부산에 다녀와야하니까 또 시간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밤이 되면 뭐 어떠랴, 하며 자전거 타고 서쪽으로 내달렸다. 무슨 급한 약속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라색으로 물든 하늘 빛이 하도 고와서, 달리다가 사진을 한 장 찍어볼까 하고 잠시 멈췄는데, 아뿔싸 아이폰을 집에 두고 나갔었다. 전화야 뭐 잠시 없어도 되지만 아까운 광경이었는데 하는 수 없이 그냥 마음 속에 남겨뒀다.
능내역 까지 달릴 때에는 맨얼굴로 가는 바람에 길목을 지키고 날던 하루살이 떼들을 얼굴로 들이 받으며 달렸다. 먹고 싶지 않아서 입을 앙다물고 페달질... 그야말로 하루살이의 소나기를 맞았다.
깜깜하고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능내역에서 되돌아 집으로 올 때엔 가방에서 고글과 버프를 꺼내어 얼굴을 칭칭 감싸고 어디 한 번 다 덤벼보라는 듯 달려왔다. 집에 오니 아주 개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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