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23일 수요일

공연 후에.


잠을 못잤다.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불빛이 스며들지 않는 반지하 방인데, 그렇게 어두운데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무리 좋지 않은 상태의 앰프였다고 해도 어제의 공연처럼 연주하기 어려웠던 적은 없었다. 내가 기술적으로 너무 몰라서 그랬던 것이었을까. 기분이 몹시 가라앉았다.
매일 매일 사람들 앞에서 연주해왔다. 하지만 생활을 위해서 '소리를 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공연의 질이 떨어지면 심한 자책감이 든다. 베이스만 훌륭하다면 후진 밴드란 없는 것이다.

수 년 전에 어떤 가수의 라이브 음반에 그날 아주 형편없었던 내 연주가 영구히 박제되어 판매되어버린 적이 있었다. 불에 달군 낙인이 몸에 찍힌 기분이었다. 어제 공연을 마치고 나서, 나는 비슷한 기분으로 마음이 괴로왔다.

한참만에,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 일을 그만두는 것이 좋을까 고민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어제 오후에 먹었던 김치볶음밥 이후 아무 것도 먹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스웠다. 머리속에 가득했던 고민이나 잡념도 배가 고픈게 느껴지면 잠시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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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1일 월요일

적막하다.

이사를 하기 위해 잠시 머물고 있는 방에는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텔레비젼도 라디오도 없다. 종이신문도 없다.
집에 돌아오면 고요한 정적 속에서 고양이와 마주 앉아 잡담을 하다가, 움베르토 에코의 신간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열흘 후에 또 이사를 할 생각을 하니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새벽, 근처에 있는 PC방에 들렀다.
사람이 없어서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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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10일 목요일

양철통.


병주가 혼다 씨의 프로토타입 '물건'을 선물해줬다.
저 안에는 단지 전선이 두 가닥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악기와 앰프 사이에 저것을 통과시키는 것 만으로 음질이 좋아진다. 이렇게 말하면 역시 대부분 믿지 않겠지만.

지난 번 '나무인형' 해프닝의 시리즈 격으로 나는 이것을 양철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정식 상품으로 출시되면 어떤 이름이 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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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없다.

정신이 없다.
군대에 있을 때에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는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많은 양의 일을 반은 용기로, 반은 오기로 하룻밤 사이에 다 해치웠던 적이 있었다.
결국 그 후에 나는 군인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었다. 탈진이었다.

그 일은 드문 경우였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나의 체력은 항상 충분할 정도로 양호한 것 같다. 문제는 스트레스인 것 같다. 정신적인 자극이 몸의 상태를 지나치게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 심란한 일들이 계속 생겨나지만, 해야하고 부딪혀야 할 일들을 모메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고 있다.

한 달 가까이 잠이 부족하고, 내일이 이사하는 날인데, 짐을 꾸려놓지도 못했다.
밤에 연주가 끝나면 다른 장소에서 새벽까지 연습이 있다.
쉬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더 편하게 지내보겠다는 바람도 그다지 없다. 그냥 스트레스를 적게 받으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내일은 비가 내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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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9일 수요일

고양이의 죽음.


나와 함께 살던 놈도 아닌데, 계속 마음이 안 좋다.
자꾸 상실감을 느끼고 떠내보내고 무엇인가 잃게 되는 일을 겪다보면 언젠가는 완전히 무감각해질 수도 있게 될까.

마음이 고요할 수 없는 봄이 오고 있다.
이틀 후에는 살고 있는 장소를 떠나서 이사를 한다.
여름, 가을을 내다보며 사람들과 연습하고 준비하는 일들이 있다. 그러는 도중에 계속 마음이 심란해지는 일들이 반복된다.

다음 달에는 또 한 번 이사를 한다. 문득 부대이동 준비를 갖춘 지휘통제실에서 야간근무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몸이야 어디에서든 눕히면 되겠지만 마음은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아직도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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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5일 토요일

적당히 기운을 차렸다.


언젠가 심한 일을 겪고 있을 때에, 혹은 심한 일을 겪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을 때에, 혼자 남은 공간만 생기면 내 입에서 온갖 더러운 욕설들이 나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곤 했었다.

마치 동화 속의 저주받은 주인공 처럼, 입만 열면 개구리와 뱀과 동물의 내장들이 튀어나오는 것 처럼, 혼자 운전을 하거나 방안에서 담배를 피울 때에도 욕설들이 조합되고 창작되었었다.
혼자 상소리를 퍼붓던 시절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둘 수 있었다. 욕설은 훌륭한 역할을 해주긴 하지만 역시 사람은 그의 태도에 따라 일상도 변한다. 계속 욕을 오물거리고 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사람에게서 얻는 스트레스와 생활 때문에 세금을 내듯 겪어야하는 문제들이 비구름처럼 몰려와있다. 이제는 예전처럼 그다지 화도 나지 않고 욕설이 입에서 나오거나 하지도 않는다. 적당히 지쳐서 흐느적거리는 것도 간혹 약이 될 수 있는 모양이다.
이제 적당히 기운을 차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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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4일 금요일

깜짝 놀란 순이.


순이 덕분에 혼자 낄낄 웃고 있을 때가 많아졌다.
이불 뒤에 숨어서 장난을 하길래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나봤더니 저렇게 깜짝 놀라했다.
고양이는 정말 사랑스럽구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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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3일 목요일

그 형님의 기타.


경천 형님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질 때가 많다.
워낙 낙천적인 사람이고, 언제나 마음을 열어둔 채 세상을 바라본다. 그 나이대의 사람들에게서는 만나보기 힘든 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무 때나 불쑥 찾아가도 마치 누구와도 친구가 되어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표정으로 맞아주신다.
지난 밤에는 무척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잠시 경천 형님을 찾아갔다가 기분이 한결 나아져서 돌아왔다. 형님의 서른 여섯 살 넘은 기타를 사진으로 찍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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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일 수요일

영화.

Mean Creek을 보고 좋아했는데, 좋아하는 취향의 영화를 또 볼 수 있었다.
Million Dollar Baby를 보았다.
극장에 앉아서 여유롭게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지금의 나의 생활패턴으로는 당분간 먼 이야기이다. 지금은 책상 앞에서 마음대로 담배를 피우며 영화를 보는 편이 더 좋다.

영화는 좋았다. 다만 선입견을 버리고 들여다보려해도 감독이 지닌 마초근성은 숨겨지지 않았다. 나쁘다 좋다라는 의미는 아니고 어쨌든 그랬다는 것이다.
영화는 따뜻했다.

영화 중간에 매기의 가족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런 가족이 어디에 있어'라고 하며 영화를 위해 과장한 시나리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가족은 어디에나 있다.
나는 가까운 곳에서 목격했었다.
내가 관찰해야했던 그 가족들은 영화 속 매기네 가족들과 닮았다.
그리고 반드시 그런 가족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영화 속의 프랭크와 같이 크고 작은 가족간의 슬픔들을 몇 개씩 가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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