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28일 화요일

여유

 

다른 목적 없이 사람들을 만나러 외출을 해보는 것이 오랜만의 일이었다. 가게 안에 하나 둘 손님들이 들어오더니 자리가 가득 차고 점점 소란스러워져서 피로감을 느꼈지만,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소음이 가득한 작은 공간 바에 앉아보았던 것도 정말 한참만의 일이었다. 소음 속에서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JBL 4307 에서 나오는 고음이 나를 기분 좋게 해준 것인지, 내가 기분 좋게 한 잔 홀짝거리느라 음악이 더 좋게 들렸던 것인지.

가게에서 나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시원한 밤길을 걸었다. 초조한 마음도 바쁠 것도 없는 기분에 잠깐 취해 있었다. 그것은 현실을 잊고 괜히 부려보는 여유일지도 모르는데, 여유 좀 부리며 살면 뭐 어떤가 싶고.

2023년 2월 25일 토요일

우연

군포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을 했다. 몇 년만에 다시 가본 장소였다. 이곳은 잘 지어지고 세심하게 관리되는 극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그곳에 갔을 때에도 똑같은 느낌이었다.

예민한 일에 사로잡혀 새벽 시간을 허비하고 아침에 잠들었다가 나는 그만 알람이 울리는 것을 꺼버린 다음 잠을 더 잤다. 하마터면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못할 뻔 했다. 아내는 오전에 외출했고 고양이들은 거실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상한 일은 내가 벌떡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가 갑자기 방에 전등이 켜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별안간 밝은 불빛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기 때문에 낭패를 겪지 않을 수 있었는데, 왜 마침 그 순간에 불이 저절로 켜졌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 나를 도왔다.

전날에 허리 통증이 심하여 힘들어 했었는데, 정신없이 서둘러 나와 공연장에 도착하여 리허설을 마치고 난 다음 갑자기 팔과 등에 근육경련이 일어났다. 어떤 물질이 내 몸을 돌아다니며 골탕을 먹이려는 것 같았다. 아무리 스트레칭을 해도 나아지지 않더니 대기실에 있는 낮은 의자 위에 반듯하게 누워 쉬고 난 다음에야 통증이 사그라들었다. 공연을 시작한 뒤에는 아프지 않았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었나 보다.

어제 나는 하드디스크에서 육 년 전 같은 장소에서 찍었던 사진을 꺼내어 보았다. 아이폰 7로 찍었던 사진이었는데 리허설을 준비할 때의 장면인 줄 알고 인스타그램에 게시하면서 사운드체크, 리허설이라는 해쉬태그를 써놓았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 확인해보니 리허설이 아니라 공연이 끝난 후 무대를 정리하는 순간의 사진이었다. 사진 정보에 시간이 기록된 덕분에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23년 2월 17일 금요일

금요일 밤

 

양구에서 두 시간 분량 공연을 했다.

집에서 두 시간, 내가 기억하는 길은 어디에도 없고 긴 터널과 잘 닦인 도로를 달려 공연장소에 도착했다. 삼십년 전에 군복을 입고 가보았던 이후 처음이니까 변하고 바뀐 것은 당연할 일이었다.

관객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연주가 끝날 때까지 피로한 줄 몰랐다. 체육관의 잔향도 적당한 추위와 알맞은 열기도 무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조금 가벼운 악기를 가져간 이유는 오늘은 도중에 의자에 앉지 말아보자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선 채로 연주를 잘 마쳤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전보다 심하진 않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쉽지 않다.

시력이 더 나빠졌는지 이젠 밤중에 운전하는 것이 어렵다. 안경을 새로 살 때가 되었다. 불빛이 없는 길을 지날 땐 갑자기 작은 동물이라도 튀어나오면 잘 피하기 위해 속력을 줄이며 달렸다. 오랜만에 아이팟에 3.5mm 잭을 꽂고 자동차 오디오에 연결하여 음악을 들으며 운전했다. 앰프와 모니터 스피커 앞에서 큰 음량을 들으며 조금 전에 공연을 마쳤는데 귀를 쉬게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위험하지 않다면 아예 이어폰을 귀에 꽂았을지도 모른다.

좋은 음질로 좋은 음악을 듣는 것이 십대 시절 이후 계속 열중하는 몇 안되는 취미인 것이 나는 좋다. 오래된 아이팟은 운전하며 조작하기 곤란했다. Shuffle로 음악을 틀어놓고 곡이 시작될 때마다 반가와했다. 내 의도였다면 고르지 않았을 음악들이 튀어나오는 것이 재미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지하주차장에 빈 자리가 아주 많았다. 금요일 밤이란 이렇구나, 했다.


2023년 2월 11일 토요일

청주에서 공연

 

토요일이었지만 도로 정체가 심하지 않아서 예상보다 일찍 공연장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사운드 체크를 하고 연주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리허설을 하면서 비어있는 객석을 자주 보지는 않는데, 오늘 그 장소에서는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두리번거리며 공연장 내부를 보려고 했다.

앞서 진주에서 공연했던 장소와 비교되는 것이 많은 곳이었다. 건설사가 소유한 지역 민영방송사에서 겨우 십년 전에 지은 건물인데 두 주 전에 가보았던 삼십오년이 된 극장보다, 후졌다. 무슨 철학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 설계, 그리고 아무도 세심하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운영 태도가 보였다.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하느냐고 화를 낼지 모르지만, 그렇게 느꼈던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돌아와서 관련방송사에 대한 것들을 찾아 읽어보니 그 건물로부터 받았던 인상이 과연 그럴만 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뭐, 훌륭한 장소가 아니면 연주하기 싫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보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 정도로 해두자.

공연은 잘 마쳤다. 관객들이 아주 좋아해줘서 예정에 없었던 곡을 더 연주하기도 했다. 장소야 어쨌든 사람들이 좋아하면 그만이긴 하지만, 그 사람들의 기호가 까다로와지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음악의 수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청중들이고 자본과 권력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사람들 밖에 없는 거니까.

돌아올 땐 Fourplay의 삼십년 전 앨범 두 장을 죽 들으면서 운전했다. 요즘은 가지고 있던 음원들을 애플뮤직 보관함에서 지우고 시디에서 새로 무손실 음원들로 리핑하거나 다운로드 하여 다시 듣고 있는 중이다.

2023년 2월 3일 금요일

커피

 

지하철을 타고 혜화동에 가서 몇 년 만에 친구와 만났다.

집에서 매일 아침에 커피를 내려 마시고 있지만 외출하여 커피집에 앉아 잔에 담긴 커피를 맛보는 건 오랜만에 해보는 일이었다. 마침 새로 다운로드 하여 지하철에서 듣고 있던 음악은 1994년에 나온 데이빗 베누아와 러스 프리맨의 앨범이었다. 구십년대 후반 어느 겨울날에 나는 지금 앉아있는 커피집 길건너에 있던 레코드점에서 GRP 컴필레이션 시디를 한 장 샀었는데, 그 안에 있던 한 곡이 바로 The Benoit / Freeman Project 앨범 수록곡 중 하나였다. 그 당시엔 이 앨범을 구하지 못하여 궁금해했었다.

삼십여년이 지난 뒤 겨울 오후에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앉아서 그때 사지 못했던 음반을 이제서야 들어보고 있었다. 커피는 식기 전에 마셨다. 그리고 일몰 시간이 되기 전에 집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