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26일 토요일

반가왔다.

사람을 만나고 친구로 여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주 얼굴을 본다거나 가까운 곳에서 늘 마주친다는 것은 습관이 되어버린 일상일 뿐일지도 모른다. 일 년에 한 번, 혹은 몇 해에 한 번, 전화 통화나 해본다거나 하는 사이일지라도 확 하고 반가움을 느끼게 되는 사람이 있다. 상대방의 본래의 모습과 상관없이 나 혼자서 꾸며놓은 호감이라고 해도. 
사람끼리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은 대충 그렇게 두리뭉실한, 이유가 부실한 감정의 털뭉치일지도 모른다. 여러번 감겨 단단해졌다가도 한 순간 풀어져버리고 만다거나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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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가 다쳤다.


벌써 새벽 다섯 시. 낮에 일하러 가기 위해서는 진작 잠들었어야 했는데 아직도 테이블 앞에 앉아서 컴퓨터의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있다. 먹다가 남은 식은 커피가 조금, 텅 빈 담배갑이 한 개, 그리고 무릎 위에는 한 시간이 넘게 그르릉 소리를 내며 비켜주지 않는 고양이 순이가 앉아있다.

오늘 아침에 바쁘게 움직이는 중에 아내가 크게 놀란 소리를 냈다. 
그리고 고양이 순이가 피를 뚝뚝 흘리며 도망치고 있었다. 열 두 살 고양이와 또 티격태격 싸움이 났던 모양이었는데, 상처를 입었는지 진한 빨간색의 피가 바닥에 여기 저기 떨어져있었다. 급히 붙잡아 살펴보았더니 그만 발톱 한 개가 통째로 빠져있었다. 발가락 끝에 발톱 대신 붉은 핏방울이 맺혀있었는데 그것이 조금씩 흐르면서 쉽게 멎지 않았다.
나는 손에 잡히는 옷자락으로 얼른 고양이 발을 감싸고 꼭 눌려 지혈을 했다. 소독약을 바르려니 몸을 비틀고 발을 휘두르며 달아나려 했다. 겨우 소독을 하고 내 딴엔 피를 멈춰보겠다고 다시 발을 붙잡았는데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겁이 났었다.

소독약을 몇 번 더 바르고 약이 마르는 동안 털을 빗겨주며 달래고 있었다. 정작 두들겨 맞아 털이 이리 저리 뽑혀버린 쪽은 열 두 살 짜리 불쌍한 연장자 고양이였는데, 단지 출혈이 있었다는 이유로 가해자 고양이 순이는 졸지에 보살핌을 받았다. 소독약이 마르고 나니 고양이 발에서 피가 멎었다. 순이는 어쩐지 무엇인가 허전한 느낌인지 발톱 한 개가 사라져 가벼워진 발을 흔들어도 보고 툭툭 털어보기도 하며 이내 어슬렁 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이 깊었다. 지금은 날이 새도록 순이는 계속 내 곁에 와서 치대고 있다. 피를 보았던 발은 발톱만 없어졌을 뿐 괜찮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순이는 내 무릎 위에서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몸을 부비고 있다. 자꾸 내 손을 핥는 통에 피부가 벗겨질 것 같다. 안아주고 쓰다듬어주느라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내 다리는 저려오고 검푸른 하늘은 밝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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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마쳤다.


끝나고 나서 이것이 중요한 한 부분의 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 전의 리허설과 공연이 공부가 되어, 더 잘 연주할 수 있었다. 준비하고 있을 때에는 몰랐었던 어떤 것이 이 공연 속에 있었다.
방송에 필요한 분량을 훨씬 초과하여 미리 준비되지 않았던 곡들도 연주했다. 가능한 베이스의 음을 적게 사용하기 위해 며칠을 신경을 썼지만, 공연 시작 전에는 그런 마음도 비울 수 있었다. 이것은 음을 더 쓰고 덜 쓰고 따위의 문제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엉뚱한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꾀를 부려 무엇인가 완성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쓸모없었다. 연주하는 내내 나는, 천천히 산보를 하듯이 그저 한 음과 한 음 사이의 공간을 거닐고 있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편안했다.
무대에서 내려온 뒤에 중요한 어떤 것을 또 한 개 마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이루어낸 것도 완성시킨 것도 없었다. 분명히 나는 영원히 이루어내지도 완성해내지도 못할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한꺼번에 수 백 개의 음을 뿌려야하는 비밥을 연주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서너 개의 음을 반복해야하는 노래를 연주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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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5일 금요일

볕을 즐기는 꼼.

막내 고양이 꼼은 올 봄 내내 햇볕 따사로운 베란다 끝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했다.
낮동안 봄볕을 들이마시고 해가 떨어지면 봄 냄새를 맡으며 뒹군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이제 집안에서 제일 덩치가 큰 고양이가 되어버렸다.
우리와 함께 살게 되어서 정말 좋다, 라고 고양이가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그다지 생각이 깊어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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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인형.


공연 직전 대기실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아내는 고양이를 만들고 있었다.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니 몸통만 있었던 실뭉치가 두 마리의 고양이로 변해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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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4일 목요일

동네 멍멍이.


한낮에, 바람은 서늘하고 햇빛은 따뜻해서 좋았다.
날씨가 좋군요~라고 하는듯 동네의 개 한마리가 길가에서 졸고 있다가, 아내가 다가가니 반가와하며 연신 하품을 했다.
햇볕이 들면 한숨 졸고, 바람이 불면 기지개를 펴고, 그렇게 사는 것은 행복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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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1일 월요일

이불 속의 고양이.

고양이 꼼은 가끔 저렇게 이불 속에 들어가 코만 밖으로 내어놓고 잠들어 있다. 
잘 들여다보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 때도 있었다.
이 고양이는 넉살 좋고 만사에 걱정이 없다. 내 자리를 되찾기 위해 툭툭 밀어서 다른 쪽으로 굴려놓으면 그 자세 그대로 계속 쿨쿨 잔다. 결국 아침까지 함께 자고 있을 수 밖에 없을 때도 있다.
귀엽고, 정 많은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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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8일 금요일

순이와 음악.


어제 제법 피로했어서 조금 많이 잤어야했다.
오늘은 공개방송이 있어서 오후 부터의 리허설과 공연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잤어야했다.
그런데 그만 이른 아침에 깨어버리고 말았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왜 잠이 모자란 날에는 늘 더 일찍 잠을 깨어버리게 되고 마는 걸까.
오늘 아침에는 고양이 순이 때문에 일찍 깨었다. 창밖이 밝아질 때부터 어찌나 칭얼거리고 몸을 부비는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덥썩 안아서 들고 나와버렸다. 나는 소파에 앉아 졸았고, 순이는 두 시간째 무릎 위에서 내려가지도 않고 그릉그릉거렸다. 그러더니 얄밉게도 햇빛이 따사롭게 내리고 있는 테이블 위에 자리를 잡고 잠들어버렸다.

고양이 순이는 피아노 음악을 좋아한다. 
나와 순이가 작은 오피스텔 방에서 살 적에 어린 고양이 순이를 혼자 두고 나오기가 안스러워서 작은 음량으로 라벨이나 빌 에반스의 피아노를 틀어두곤 했었다. 그 후에 잠시 더 작은 방에서 한 달을 머물때에는 아예 하루 종일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고 문을 닫으면 곧 어둠속이었다. 불을 켜두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순이가 걱정되어 컴퓨터의 모니터를 켜둔채 피아노 음악을 틀어두고 외출을 하곤 했었다.
정말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고양이 스스로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겠지만, 과거의 기억 때문인지 순이는 피아노 음악을 틀어두고 있으면 표정이 온화롭다.
최근에는 우연히 Keith Jarrett 의 La Scala 음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들었다. 도중에 순이가 잠든줄 알았는데, 마지막 곡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그루밍을 했다.
순이가 좋아하는 피아노 음악 목록에 이 음반도 함께 넣어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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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4일 월요일

방안의 고양이 꼼.

어두운 방 안에 들어섰을때, 깜짝 놀랐다.
새어들어오는 빛을 맞으며 고양이 꼼이 조용하게도 앉아있었다.
언제나 심심한 어린 고양이가 나를 보더니 반가와하며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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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을 선물받았다.

까만 고양이가 주인마님의 새집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부디 건강하게, 어리광 잔뜩 부리며 잘 살길. 몇 개월간 함께 지내며 즐거웠다.

명색이 새집 첫 방문이었는데, 그만 한밤중에 생각없이 빈손으로 다녀오고 말았다. 그런 주제에 돌아올때엔 오히려 선물을 잔뜩 받아들고 나왔다. 염치라고는 전혀 없는... 손님이 되었다.

조금 이상하지만, 그런 미안한 마음으로 얼른 커피를 만들어서 한 잔씩 예쁜 컵에 따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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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2일 토요일

사진.


하드디스크를 정리하면서 사진파일들도 함께 정리하고 있었다.
내가 찍은 사진들에는 사람이 담겨있는 사진들이 별로 없었다. 
온통 고양이 사진들뿐.
날씨 좋은 봄날에 카메라 들고 밖으로 나가서 사진을 찍으며 다니거나 하는 생활은 전혀 없고, 집안에서 엎어져 자거나 노닐고 있는 고양이들이나 촬영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아내와 나, 두 사람이 함께 담겨있는 사진은 거의 없다.

한번도 '놀러' 나가본 적도 없으니 당연다. 
사진은 무슨 사진. 최근 오랜만에 함께 했던  '낮의 외출'은 겨우 아는 분의 결혼식이었다. 그나마 서둘러 돌아와 한 사람은 집에 두고서 나는 일하러 갔었다.

아내와 함께 산보도 다니고, 가까운 사람들도 먼저 찾아다니며 만나며 지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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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0일 목요일

죽음을 생각했다.


학생 시절에 친하게 지냈던 미국인 선생님이 계셨다. 전공과목 교수님이었고, 당시에도 이미 나이가 지긋했던 여자분이었다.
중미 대륙의 한 가운데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평생 동안 바다를 구경해본 적 없이 살아오다가,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다시 대학을 졸업한 뒤 난생 처음 비행기에 몸을 싣고 바다를 굽어보며 도착한 곳이 한국이었다고 했다.

전공과목의 선생과 학생 관계라고는 했지만 그분과 가까와져서 자주 만나게 되었던 것은 음악 때문이었다. 그 무렵 부터 나는 재즈를 깊이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분은 재즈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와 정보를 알고 있었다. 어릴적 부터 재즈를 즐겨 들었고 미국 시골의 옛 음악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꽤나 음악광이었어서 공연장에 찾아다니는 것을 무척 즐겼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는 내가 그를 집에 초대하여 가족들과도 잘 알게 되었고, 내가 입대했을 때엔 내 가족들과 함께 부대에 면회도 와줬었다. 그 사이 한글을 많이 공부하여 한글을 적어서 보이며 자랑하기도 했었다.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그 선생님이 자신의 사진들로 전시회를 열었던 기억도 난다. 그의 사진들을 구경하며 수다를 떨었었다. 충분한 의사소통이 되었을리가 없었을텐데도 나는 아주 많은 대화의 내용을 지금까지도 기억을 하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그가 우리나라를 떠나게 되었을 즈음, 나는 음악 연주를 하기 위해 악기를 들고 다니며 별 소득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몇 번의 기회들은 모두 이상하게 꼬인채로 엉망이 되어버렸고, 그만 사기도 당했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신도 겪었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취업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어느날 정신을 차려보니 백수건달에 패배자의 모습으로 보였다.
마지막 그와 만났을 때에 그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줬었다. 자신은 꽤 많은 나이에 이혼을 한 뒤,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나머지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다시 대학에 입학을 하고, 마음을 먹고 카메라를 구입했었던 일들을 들려줬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면, 앞으로도 계속 힘들고 불만족스러울 것이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죽음을 생각한다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겪는 고달픈 일들도 기쁘다, 라고 말했었다.

언제나 그의 말을 떠올리며 열심히 살아왔다....라는 것은 약간 거짓말이고, 그후로도 나는 늘 실수하고 실패하고 시련을 겪거나 만들어내며 지냈다. 별로 순탄하게 해낸 일도 없이 나이를 먹어왔다. 목숨을 걸고 열심히 했던 것 같지도 않고, 생계를 위해 피땀을 흘려본 적도 없지만 어쨌든 한 가지, 계속 연주하는 일을 하기 위해 애를 쓰긴 했었다. 죽음을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그 선생님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두 개의 메일이었다. 먼저 한 개를 보낸 후, 잠시 후에 또 하나의 메일을 보냈던 모양이었다. 나는 한참동안 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걸었던 적도 없었어서 메일을 열어보는 순간 미안함에 가슴이 뜨끔했다. 놀랍게도 아직까지도 그분은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짧은, 생일 축하 메세지와 일상적인 안부의 글.
그리고 다른 메일을 열었더니,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p.s. I am sending this message to all my friends:
when I die, you will receive an email from a friend in USA. Please remember me and in your own way, send me on my way into the fullness of light..... .


내 부모님들 보다 훨씬 연상이었으니,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고 있지만 아마도 연세가 많을 것이다. 그렇구나...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의 편지에 등장할 수 있는 문장이라고는 해도, 그 몇 줄의 글자들이 마음에 박혀 몹시 아파졌다.
나는 내 멋대로, 짧은 몇 줄의 메일 때문에, 그가 곧 죽음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인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를 물었지만 그저 '뭔가'를 보내주고 싶으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는 회신 뿐이었다.

그럴 수 있다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서 만나 뵙고 싶다고 생각했다. 살다가 언젠가는 한 번 더 만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이, 아아... 십수년 전의 그날의 인사가 영영 마지막이었구나, 라는 기억으로 바뀔지도 모르게 되었다. 또 한 통의 이메일이 왔다. 역시 짧은 두 줄의 문장. 우편물을 보냈으니 받아보고 나의 사진을 몇 장 보내달라고 했다. 전화를 할 수도 있을텐데, 그분도 나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망설이고 또 망설인다. 목소리를 들으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것 보다도 전화를 받지 못하는 상태라면 전화를 걸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단어를 고르고 골라 긴 시간을 들여 또 메일을 적어 보낸 후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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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4일 금요일

운동화.

햇빛이 밝은 어느날 오전에 창문 앞에 운동화 두 켤레가 젖은채 놓여져 있었다. 
아내가 세탁을 해둔 모양이었다. 운동화의 끈들은 높은 곳에 깨끗한 빛을 띠며 주렁 주렁 걸려있었다. 고양이들은 걸려있는 신발끈을 가지고 놀고 싶어하여 수염을 세우고 실룩거리며 발돋움질을 했다.

나는 혼자 지내면서 운동화가 더러워지면 집 근처의 세탁소에 가져다 맡기곤 했었다. 오랜만에 햇빛에 말려지고 있는 깨끗한 신발들이 낯설게 보였다. 쉬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주인이 다른 저 신발들은 각각 참으로 먼 길을 걷고 걸어서 겨우 여기에서야 만났다. 오랜만에 끈을 풀어둔채 서로 걸터 앉아 쉬고 있는 참이다.

바짝 마르면, 운동화를 꿰어 신고 끈을 옴팡지게 묶고서 어디론가 놀러 나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본 적이 언제였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산을 오르고도 싶고 하릴없이 쏘다니고도 싶다. 무엇을 하겠다고 이렇게 메마르게 살고 지내는건가. 일이고 뭐고 다 됐다고 하고 몇 주일 떠나고 싶기도 하다. 그냥 며칠이거나 하다못해 몇 시간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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