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 24일 화요일

나는 날건달인가.

몇 주 전보다는 조금 시간이 나서 읽고 쓰며 보낼 수 있는 것이 좋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는 있다.
나는 자신의 일에는 신중하지 못하면서 남의 잘못과 허물 앞에서 너무 가혹할 때가 있다.
반드시 한 마디씩 던져줘야 직성이 풀린다.
부당한 것을 견디지 못한다.
사실은 그것이 부당한 것인지 당연한 것인지를 남이 판단하도록 하기 싫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사람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도 마지못해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불행하게도 최근 나에게 그런 일은 바로 연주하는 일이었다.

뭔가 잘못 된 것 같지만, 그냥 하루씩 출근하면 돈이 모아지는 그 편안한 일을, 시작한지 일주일 만에 그만뒀다.
그것은 음악도 뭣도 아닌 똥같은 일이었다.
엉터리같은 사람에게 휘둘려 부당함을 참으며 버틸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
고작 그런 일을 하고 싶어서 내가 주변 사람들을 신경쓰게 하고 내가 고생을 자처하며 지금까지 음악을 하려고 애썼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손익을 따지지 않는 경우에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말 한 마디 정도로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있다. 가증스럽다고 해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돼먹지 않은 일, 돼먹지 않은 사람 앞에서 입에 발린 아첨과 맹목적인 순종을 할 수가 없다. 손익을 계산하며 처신하는 것이 제일 싫다.

팀의 리더에게 새 베이스 연주자를 구하라고 했지만, 그쪽에서도 사정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결국 자신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인지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이미 그만두겠다고 통보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 저녁에는 내쪽에서 독촉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남자가 만일 나를 해고하는 입장이었다면 아마도 나에게 잔혹하게 굴었을 것이었다.
내가 그만두겠다고 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난감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새해엔 내가 조금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
나쁜 일을 겪는 이유는 우선 내가 못났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쁜 놈이 나쁜 이유는 당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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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23일 월요일

한 해가 저문다.


2002년을 보내면서, 의미있었던 연주라고는 몇 주 전의 블루스 공연이 유일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으니 한숨이 나온다.
부끄럽기도 하고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새 해엔 더 열심히 해서 좋은 음악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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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18일 수요일

저열한 인간.

低劣하다는 말을 책에서만 보아서 알다가, 살아 움직이는 대상들을 보게 된다.
어쩌면 항상 주변에 있었지만 잘 모르고 있다가 이제서야 알아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수준이 낮고 열등하더라도 자존심은 있는 줄 알았는데.
비열한 수작, 습관이 된 계산벽이 초 단위로 읽혀진다.
모든 결정은 누군가의 등 뒤에서 비누를 갉아 먹는 쥐처럼 한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먼저 결정해버리면 열등함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바들거린다.

새삼 화를 낼 일도 아니고, 역겨워할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로부터 세상을 조금 더 배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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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12일 목요일

혐오감.

세상의 구석에 언제나 박혀있는 인종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마초, 비열함, 개깡다구, 몰염치, 물욕, 명예욕, 혼자 가로채기, 위험할 때에 먼저 도망가기.
강한 자 앞에서 납짝 엎드리기, 약한 자에게 잔혹하기, 여성 경멸론자.
그러면서 늘 여자들에게 당하기.

기본적으로 쪼다.
그 쪼다를 감추기 위해 잔인한 성격 드러내기.

마지막으로는,
결국 끝까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

나는 혐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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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9일 월요일

블루스 공연.


12월 7일. 블루스 공연을 재미있게 마쳤다.

나는 연주했던 순서가 끝나자마자 다시 밤에 연주하는 일을 하기 위해 급히 공연장을 떠나야 했다. 함께 연주했던 사람들에게 미처 인사도 못했었다.
다행히 공연 다음 날에 함께 공연했던 야마다 씨, 케니 씨와 인사를 나누고 밥도 한 끼 같이 먹었다.

언젠가 더 좋은 공연을 함께 또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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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3일 화요일

게임 보이.


이른 아침, 좀처럼 이 시간에 외출을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오랜만에 아침 안개를 휘저으며 비몽사몽 집을 나섰다.

새로 일을 시작한 장소에 악기들을 설치해야 하는 일 때문이었다.
함께 차를 타고 가기로 약속한 드러머 친구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던 중에 기이한 소리가 나서 돌아보았다. 그것은 바로 저 아이가 게임을 하며 입으로 웅얼거리고 있던 소리였다.

작은 아이는 게임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의 대사와 외마디 소리,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음향 효과와 심지어 가상의 소품들이 내는 소리들을 모두 입과 손과 발로 내주고 있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게임에 열중하고 있던 그 아이가 얼마나 실감나게 소리를 내고 있었는지, 나는 그것을 구경하며 함께 열중하고 있었다.
분명히 심부름과 관련된 것임이 틀림없었을 오른쪽의 검정 비닐봉투는 이 아이에게 아무런 참견도 못한채 주저앉아 있었다.

아이를 구경하면서 자동판매기에서 커피 한 잔을 꺼내어 마시고 났을 즈음 나는 비로소 잠이 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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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23일 토요일

믹스 커피.


군에 입대하여 부대를 배정받았을 때에, 나에게 주어졌던 최초의 명령은 바로 커피를 타는 일이었다.
함께 입대했던 친구들이 막사의 마루에 엉덩이를 붙인채 하루 종일 '대기'를 하고 있었을 시간에,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부대배치 즉시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었다. 그 때에 직속상관이었던 소령이 나에게 맨 처음 시켰던 일이었다.
나는 먹기 쉽게 봉지에 담겨있는 커피를 종이컵에 털어서 놓고 더운 물을 부은 뒤 그에게 가져갔다.

내 커피의 맛을 본 소령은 곧 두번째 명령을 내려주었다.
나는 뒤로 돌아서서 벽을 보고 말뚝처럼 서있어야 했다.

내가 원래 즐겨 마시는 커피는 설탕과 크림이 섞여있지 않은 검은색 커피이다.
조금 진하게, 적절하게 뜨거워야 맛있게 마실 수 있다.
그러나 봉지에 담겨있는 믹스 커피의 맛이란 역시 달짝지근해야 좋은 것이었나 보다.
나는 그런 커피를 먹어야 할 상황이 되면 조금 묽게, 적당하게 뜨거운 정도로 마셔왔었다.
그런 커피를 남에게 대접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물도 아니고 커피도 아닌 몹시 이상한 어떤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몰랐었다.

이런 내가 학교에 다닐 때에 어느 겨울 내내 낮시간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었다. 주로 그 시간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모두 커피를 주문했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하필 원두커피가 아니라 믹스되어 있는 다방 커피 메뉴가 따로 있었다.
그것을 주문했던 손님들은 내가 타준 커피의 맛을 보고는, 담배만 피우다가 돌아가버렸다.
그렇게 돌아간 손님들 중에 물론 다시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저녁에 가게에 출근했던 카페의 주인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약속했던 한 달을 채웠을 때에, 월급을 주며 인사를 하던 가게 주인은 두 번 다시 나에게 연락을 해오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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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13일 수요일

Bill Evans


스코트 라 파로가 만일 일찍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빌 에반스의 음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빌 에반스의 연주는 스코트 라파로의 생전과 사후의 것이 많이 다르다.
빌 에반스의 피아노 연주가 스코트 라 파로 사후에 활력이 떨어졌다거나 예전과 같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는 글을 읽을 때가 있다. 꼭 그렇지는 않다. 빌 에반스의 연주는 계속 발전했다.

스코트 라 파로가 죽은지 6년이 지난 해에 에디 고메즈와 녹음했던 You Must Believe In Spring 을 듣고 있으면 이상한 평론이나 음반소개 글은 과연 읽지 않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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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 12일 토요일

일기.


국민학생이었을 때부터 나는 일기를 써왔다.
맨 처음 컴퓨터를 가지게 되었을 때에 책받침만한 플로피 디스켓을 번갈아 끼워 컴퓨터를 부팅하면서 했던 일은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보석글'을 가지고 끄적이던 일기쓰기는 결국 너무 번거롭고 경제적이지 않았다. 다시 공책에 쓰는 일기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매킨토시를 가지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개인용 컴퓨터로 일기를 쓰는 일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동할 수 있는 랩탑이 없었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다시 공책에 일기를 썼다.
언젠가부터는 그 두 가지의 일이 이러저리 섞여버려서, 컴퓨터 안에 텍스트 파일로 쌓여가는 일기가 따로 있고 여전히 공책에 적어두는 일기가 한쪽에 따로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기록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조차도 다시 읽어볼 일이 별로 없는 일기를 나는 왜 계속 쓰고 있는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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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 8일 화요일

악보 보기.


나는 악보를 볼줄 모르는 연주자였다.
지금도 악보를 빠르게 읽지 못한다.
낯선 장소에 도착하여 허둥지둥 악기를 꺼낸 후 대뜸 악보 한 장을 건네어 받는다고 해도 아무 문제없이 초견이 가능한 경지는 아직도 멀었다.
함께 연습하는 분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더니 믿어주지 않았다.
내가 먼저 고백하기 전까지는 '저 녀석이 악보를 못본다'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동안 나는 눈치와 임기응변, 음악을 외는 습관으로 해왔었다.

나는 한번도 음악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학교의 음악시간이란 교과서 제목 뿐인 '음악'이었다. 음악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저 분이 정말 음악을 좋아하기는 할까 의심스럽기만 했었다.
나중에 나 혼자 화성공부를 할 때에도 나는 악보를 볼줄 몰라서 영문자로 되어있는 코드 이름을 기초로 무조건 음과 패턴을 외는 식으로 해왔었다.
무대에서 연주를 하기 시작한 후에, 그제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심정으로 악보를 보고 그리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연주해야 한다면 악보를 볼줄 아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악보는 연극의 대본과 같다. 음악을 부분마다 잘라서 이름을 붙이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악보를 볼줄 몰라도 얼마든지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다. 또 멋진 곡을 만들 수도 있고, 남에게 가르쳐줄 수도 있다. 그러나 악보를 볼줄 알게되면 연습하는 동안 일일이 말로 설명해야 할 시간에 몇 곡이라도 더 연주해 볼 수 있게 된다.

가끔씩 악보를 보는 바보들을 만날 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어정쩡하게 교육을 받았거나, 교육은 잘 받았지만 음악을 어정쩡하게 하고 있는 이들이다.
음악을 좋아하여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악보에 표시되지 않았다고 하여 연주할 부분에서 쉬고 있거나 하지는 않는다. 엉터리로 기보된 악보대로 연주하면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모를 수 없다.
싱코페이션을 악보대로 연주하는 연주자들 보다는 악보는 상관하지 않으면서도 제 맛을 내주는 블루스, 재즈 연주자들이 좋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연극배우가 각자의 대본을 손에 들고 공연하지 않는 것과 닮았다고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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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27일 금요일

새 악기를 샀다.


펜더 재즈 베이스를 한 개 더 샀다.
가지고 싶었던 플렛리스 베이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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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18일 수요일

내가 잘 못하는 것.


어떤 날은 조금 쉴 틈도 없이 등을 떠밀리는 약속들이 생길 때가 있다.
도대체 하루에 한 가지의 일을 하는데도 늘 시간에 쫓기는 상황은 뭘까.
자신의 일정을 귀신같이 잘 관리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오전에 다섯 개, 오후에 다섯 개의 약속을 빈틈없이 처리하고 저녁에는 사람들과의 모임에 참석하며 밤중에는 스스로를 위해 운동을 한다고 했다.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늘 잠이 부족한 이유는 업무 때문도 연습 때문도 아니다.
시간관리를 잘 못하고, 무슨 일이든 너무 느리게 배우기 때문이다.
잠을 덜 자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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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5일 목요일

그것은 네가 할 일.


어릴 적에 어떤 기타 연주자가 자신의 기타에 줄을 갈아 끼우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 악기라는 것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그가 악기를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느릿느릿 새줄을 감고 있던 모습이 꽤 인상깊었었다.
감동이라고 말해도 좋을 어떤 느낌이 그 장면 안에 있었던 것 같았다.
줄을 다 감은 뒤 그가 새줄을 튕겼던 순간의 그 소리가 상쾌했었다.

나중에 내가 내 악기를 가지게 되었을 때에, 줄을 새로 감는 순간이 되면 괜히 나 혼자 엄숙해지곤 했었다. 자주 악기를 닦거나 손질을 했고 줄을 갈아 끼우는 일은 진지했다.

그런데 자신의 기타에 줄을 끼우는 것도 귀찮아서 버릇처럼 남에게 시키는 이들을 보게 되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 튜닝조차 남에게 떠맡기는 기타 연주자를 봤다.
그런 행동은 음악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권위를 위해서일 것이다.
너무 바빠서라면 줄을 갈아주거나 튜닝을 해주는 사람을 고용하면 좋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좀 덜 된 사람들이 아닌가, 했다.

그런 연주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겉멋이다.
내실은 없다.
그런 주제에 시기심은 제일 많다.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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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1일 일요일

즐거운가.


혼자 외로운 연습시간을 보낸 후 새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또 만나고, 다시 함께 긴 시간 연습을 하고, 고민하고 기다리다가 무대에 오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를 바드득 갈며 참아야 할 일도 많다.
그런데 그래도 즐거운가, 하고 가끔씩 나에게 물어볼 때가 있다.
잘 모르겠는걸, 하다가도 연주를 하는 순간만큼은 그래도 즐겁다.
이것이 병이라면 큰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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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7월 31일 수요일

여름밤.


어디엔가 들어가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일을 해본지 오래였다.
하지만 여름밤 더위가 너무 지독했다. 깡통음료를 들고 거리에 서있는 것이 힘들었다.
사막에서 물을 찾듯 들렀던 한 카페 벽에는 자전거가 걸려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자전거를 좋아했었다.
그만 잊고 있었던 것이 기억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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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7월 22일 월요일

Charlie Haden

찰리 헤이든의 이름을 맨 처음 알았던 것은 팻 메스니와 오넷 콜맨의 앨범 Song X 를 듣게 되었을 때였다.
팻 메스니와 찰리 헤이든이라고 하면 이제는 누구라도 The Beyond The Missouri Sky 를 떠올리겠지만, 내 기억 속에 찰리 헤이든과 팻 메스니가 깊은 인상을 남겨줬던 연주는 Song X 앨범에 있는 Mob Job 이라는 곡이었다.

극단으로 치닫는 것 같은 오넷 콜맨과 많은 음반을 내왔던 찰리 헤이든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과의 어떤 연주에서는 어쩌면 그렇게 절제된 베이스 연주를 할 수 있는지 놀라울 때가 있다. 마치 언제 어디서라도 금세 다른 어떤 음악이 되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는 정말로 '더 많은 음'을 쳐야 할 이유가 없는 타입의 연주자일지도 모른다.

찰리 헤이든의 연주는 항상 함께 연주하고 있는 솔로 연주자의 연주를 더 빛나게 해준다고 느껴왔다. 정해진 화음을 벗어나거나 페달톤으로 단음만을 지속시켜줄 때에도, 그의 베이스에 엉겨붙는 다른 사람들의 연주는 어쨌든 한껏 더 빛이 난다.
연주자의 연주라는 것은 그 사람의 인성이 반영된다고 생각한다. 아직 찰리 헤이든의 성품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지만 말이다.

잘 다듬어진 편곡의 현악기들과 함께, 피아노와 보컬 모두 일품인 Shirley Horn 의 목소리로 Folks Who Live On The Hill 을 들었을 때에 너무 좋아 그 자리에서 열 번은 다시 들었다. 찰리 헤이든의 앨범 The Art Of The Song 에 실려있는 곡이다.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오래된 노래이고 가사가 아름답다. 지금까지 몇 사람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들어봤었는데 셜리 혼의 노래가 제일 훌륭하게 들렸다. 감동적이었다. 어딘가 마음에 와서 철퍼덕 붙어 버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 이유는 노래의 편곡 때문일 수도 있고, 셜리 혼의 음색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찰리 헤이든의 해석이 담겨있는 연주 덕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가수의 목소리를 더 듣기 좋게 해주는 노래 반주를 하는 베이스 연주자,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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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7월 16일 화요일

악몽.


대학을 졸업한 후에 군에 입대했던 나는, 부대 사벼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다.
그 얘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 구나.

아무튼 그랬었는데, 군에서의 나의 임무는 뭐였냐하면 바로 야근이었다.
거의 매일 밤, 정말 매일 밤을 새우며 사무실에서 일을 했다. 낮에는 낮의 업무대로 바빠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뭐하러 그렇게 일을 해주었는지 모르겠다.

게으른 것은 자랑이 아니다. 그것은 잘 안다.
군 복무 내내 나는 내 군화를 닦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신병 시절 소속 부서의 상관이었던 소령의 군화를 닦는 일은 해봤었다. 정작 나 자신은 제복을 다려서 입거나 전투화를 광나게 닦는 일을 질색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내 것은 다리지도 닦지도 않고 지냈다. 사실은 제복을 다리고 군화를 광내는 일이 제일 우스꽝스런 짓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그것을 보다 못한 동료들이 내 옷과 신발을 다려주고 닦아주려고 했지만 그나마 별로 오래 가지 못했다.

제대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지난 주에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다.
흙이 잔뜩 묻은 채 오래도록 굳어서 걷는데에 무겁기까지 했던 내 전투화.
이젠 정말 신을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래 신을 일이 없을 것을 기대하며 군화를 닦아 놓았다. 8년만에 닦여진 신발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일년에 한 번 두 번, 다시 군에 입대하는 악몽을 꾼다. 어떤 꿈에서는 야근을 마치고 난데없이 적군과 마주쳐 전투를 시작하는 꿈도 꿨다. 트라우마이고, 무엇보다도 끔찍한 악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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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7월 7일 일요일

떠나고 싶어졌다.


염증이 나던 중에 납득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이는 상대방에게 더 끌려다니고 싶지 않아서 연주하던 곳을 그만뒀다.
나는 사회에 부적응자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사회라면 내가 다른 곳으로 떠나면 될 것 같다.

집에 돌아와 하루를 보냈더니 맥이 풀리고 의욕이 없어진다.
언젠가 물결을 가르며 집에 돌아오던 여행길이 생각났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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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28일 금요일

"The Judge" Milt Hinton


밀트 힌튼이 세상을 떠났다. 조 헨더슨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마치 만나본 적이 있고 알고 지냈던 분이 죽은 것처럼 마음이 안 좋았다. 밀트 힌튼도 그랬다.

밀트 힌튼은 1910년생이다. 두 해 전인 2000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90세를 살았으니 장수한 셈이다. 이 분은 재즈라는 음악이 기지개를 펼 때에도, 전성기를 누릴 때에도,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을 때에도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 한 가운데에서 그는 언제나 연주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연주했던 사람들의 이름은 늘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다.
그와 연주했던 이들의 이름을 보고 있으면 이 사람은 편견도 아집도 없는 자유로운 사고를 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별명은 The Judge 였다.
밀트 힌튼은 사진작가로서 많은 전시회도 열었었다. 다양한 매체에서 그가 찍었던 재즈 연주자들의 사진을 볼 수 있다. 미국과 유럽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었고 그의 사진들에 대한 평도 좋았었다. 그의 사진집은 이제 인터넷에서 20달러에 살 수 있다. 흑백사진들도 좋고, 재즈 연주자들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있는 것도 흥미롭다.

지금은 브랜포드 마살리스와 함께 연주한 곡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브랜포드 마살리스가 레스터 영에게 헌정하는 곡이다. 레스터 영의 별명은 President 였다.

베이스와 색소폰으로만 연주하고 있는 이 음악 Three Little Words 는 앨범 Trio Jeepy 에 수록되어있다.
귀를 씻고 싶을 때에 종종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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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27일 목요일

아침.


밝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잠을 자지 못하면 종일 고생이다.
낮에 전화벨이 울려서 모든 흐름이 깨어졌다.
전화기를 진동으로 해두고 살기로 했다.

문자메세지를 보내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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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25일 화요일

녹음실.


녹음할 것은 다 끝났는데 일하러 가기는 싫고.
괜히 짐을 챙기지 않은체 뭉개고 앉아 있었다.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길래 지금까지 했던 것을 지우고 다시 하자고 해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녹음실에 있는 시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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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아무리 하찮은 곡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자작곡이라고 말하며 건네어 주는 악보를 받으면 일단 더 관심있게 보기 마련이다.
평범하고 그럴듯한 구석이 없어 보이는 곡이라고 해도 누군가의 작곡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더 신경 써서 연주하게 된다. 한 개의 음이라도 만든이의 의도를 곡해하지는 않을까 하여 긴장하기도 한다.

간혹 터무니 없이 엉터리 같은 곡도 있지만, 그것은 만든이의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인 연주자들을 더러 보게 된다.
타인의 곡을 시덥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의 연주는 숙련된 기술자일 수는 있어도, 무엇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런 이들은 뭔가 만들었다고 해도 기껏해야 잠재적 표절이다. 스스로 능력이 없으니까 외국곡이나 이미 유명해진 남의 것과 비슷해져야 안심하는 것이다.

모든 음악들은 다 누군가들의 자작곡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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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21일 금요일

반성.


주변의 모든 일들을 마음에 두고 고려하며 늘 사려 깊게 행동하기란 어렵다.
자신이 모르고 저질로 버린 짓을 뒤늦게 알게 된 다음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부끄럽고 자기혐오가 일어난다. 스스로가 고약하다고 생각되어 미워지게 된다.

모든 사물을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일만큼은 함부로 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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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20일 목요일

커피가 좋다.


몸에 나쁘니까 끊어라, 먹지 말아라, 멀리 해라, 습관을 고쳐라.
그런 이야기를 점점 더 많이 듣는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기호품들은 전부 다 몸에 나쁘다고들 한다.

담배와 커피를 더 이상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런 경고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따르지 않기로 했다.
두 가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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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9일 일요일

Barney Kessel


이 앨범은 재즈잡지의 애독자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던 세 명을 모아 기획하여 만들었던 것으로 시작했다. 이 음반 이후 몇 장이 더 나와있다고 했다. 들어본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재즈잡지는 아마 Down Beat 지였을 것이다.

정신없이 빠르고 현란한 연주들을 밤새 들은 후에 이 음반에 있는 두번째 곡 Satin Doll 을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겸손해질 수 있다.
레이 브라운의 하모닉스로 시작하는 편곡이고, 바니 케슬의 정교한 기타연주가 촛불처럼 고요하게 이어진다. 고요하지만 음악으로 가득한 방을 닮았다.

기타 트리오 음반 중에는 이렇게 편안한 음색으로 채워진 앨범들이 있다. 따뜻하고 균형이 잡혀있으며 함께 하는 연주자들과 아직 누구인지 모르는 청중을 고루 배려하는 연주이다.
왼쪽에는 기타, 오른쪽에는 베이스와 드럼이 들리도록 녹음되어있다.
1957년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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