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29일 수요일

고양이 순이와 함께.


깊은 밤, 음악을 꺼두었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꼬마 고양이는 침실의 문을 열어달라고 졸랐다.
그 녀석을 들여보내고 책상 앞으로 돌아오니 소리도 없이 고양이 순이가 의자 위에 올라와 앉아있었다.
비켜달라고 할까봐 순이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채 눈을 감고 그르릉 소리를 크게 내고 있었다. 손으로 궁둥이를 찔러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나는 의자 뒤에 서서 남은 연습을 했다.
수다쟁이 고양이 순이는 내가 의자를 포기한 것을 눈치채고는 안심하는 표정을 하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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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24일 금요일

고양이가 꼬질꼬질해졌다.


꼬질꼬질해져있던, 목욕 직전의 막내 고양이 녀석.
일주일 전의 모습이었다.
요즘은 글쓰기도 안하고 사진 정리도 못하고... 책상은 언제나 큰 가방이 엎질러진 것 처럼 너저분하다.

요즘 낮에는 볕이 좋아서 집안의 식물들은 창가에 모여 고개를 쳐들고, 고양이들은 따사로운 곳에서 잠들거나 어두운 방을 찾아 들어가 잠들어버린다. 밤 새워 인형을 만들던 아내도 잠을 청하러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그런 샘나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악기를 들고 시간에 쫓겨 나가야할 때가 자주 생긴다.
나도 낮에 푹 자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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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21일 화요일

글을 읽기.


엉성하게 아는 것은 사실은 잘 모르는 것이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를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못한다. 나는 은어를 남발하는 어린 친구들의 인터넷 글쓰기를 보면서는 그 솔직함과 객기에 가끔 손뼉을 쳐줄 때가 있지만, 문장이 되어지지 않는 비문을 늘어놓으면서 글을 씁네 하고 있는 자의식 과잉의 어른들의 글을 보면 기분이 상한다.

그런 글을 옮겨와서 조목조목 빨간줄 쳐주며 지적질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요즘은 그것에도 흥미를 잃었다. 모두 최근에 읽게 되어버린 네이버 블로그의 몇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하다. 모르면 모르겠다고 하라는 것이고, 무리하여 무엇인가 써보고 싶다면 그냥 솔직하게 좋다, 싫다를 말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솔직한 글쓰기이다. 음악에 대한 글이라면서 그 안에 음악은 없고 후지기 짝이 없는 국내 음반 속지 작가의 문체를 흉내내어 창의력이라고 우기고 있었다.

다른 글들, 예를 들어 이 음반 저 음악 평을 올리는 사람이 나름 음악관입네 늘어놓고 있는, ‘영어로 노래해야 묵직한 하드록이 완성된다’라는 주장이나, '단편소설보다는 장편소설을 육성하고 문학상을 시상해야한다'는 참신한 외침, 소리의 파장에 대한 용어는 배웠어도 여전히 음악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어떤 사람의 명반과 명기 오디오 타령 등등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기도 성가신 일이다.
그 중에서 엊그제 읽어버리고 말게 되었던 한 개의 잡글은 내가 직접 했던 작업에 관한 일이었으므로 몇 자 적어놓고 싶어졌다.

예를 들자면 이런 문장, “약간의 조율 이후 강하게 치고 들어오는 Girl Walking의 개러지성은 다분히 계산적이고 ‘우두두다다’의 그루브는 맨체스터나 런던 외곽 쪽 밴드들의 그것을 노련한 기술자들이 따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같은 것... 
두어 시간 동안은 볼펜으로 이마를 때려가며 혼낼 수도 있겠다. 그런 글은 일기장에 써두면 좋겠다. '개러지성' 같은 말은 왜 만들어서 사용하는걸까. 그것은 허세일 뿐이다.

그런 사람에게 ‘우두두다다’라는 곡의 편곡이라는 것이 녹음을 시작하기 불과 몇 십 분 전에 완성되었고, 밴드 멤버들의 합주로 겨우 한 번 녹음한 것이 음반에 수록되었다고 말해준다면 뭐라고 할까.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Girl Walking이라는 연주곡의 시작부분을 조율하는 장면으로 여겼다는 것도 좋게 보자면 귀엽다. 사실은 그 곡도 최종편곡이랄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단 한 번 연주한 것으로 테이크했었다.

그 사람이 영국 출신 밴드들의 음악을 정말 좋아한다면, 그 ‘맨체스터나 런던 외곽’의 밴드들에 대해 실례를 제시하고 우리의 작업물과 비교하여 실증을 내놓을 수 있어야 좋다. 도대체 런던 외곽의 밴드들이라니... 어느 지역까지 해당하는걸까.
뉴저지 인근의 재즈 밴드들의 사운드를 흉내내었으므로 The Bad Plus는 따라쟁이들이다, 라고 써도 욕을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뉴욕의 음악팬들은 부업으로 음악평론을 쓰며 그 비싼 담배값을 벌 수도 있겠다.

'포맷팅에 대한 음반의 강박', '신세대적인 키치함이 아닌 7080 빵가게 데이트 이야기', ‘텍스트와 아키텍쳐가 충돌하는 어색한 순간’ 등등의 문장들... 그런 것을 삼가는 것이 글쓰기 연습의 좋은 기초가 된다. 이런 비문을 늘어놓는 수준이라고 해도 음악을 좋아하며 자신만의 기준과 취향은 있을 수 있다. 일기를 열심히 쓰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될 일이다.
더 읽고 더 배우는 사람들은 늘 겸양을 떨기 마련이다. 자신의 감상과 주장을 말하고자 할 때에도 자세와 태도가 있어야 한다.

그 사람에게 참고가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에릭 클랩튼이 슬로우핸드로 불리워지게 된 것은 손이 느려져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만 몇 천원 정도 여유가 생기시거든 몇 달 전 출간된 에릭 클랩튼의 자서전을 사 읽어보면 좋다.

내 결론은, 그분이 그냥 이렇게 짧게 써놓았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김창완밴드는 별로 새로운 것 같지도 않고, 나는 잘 모르겠다. 난 그냥 옛날 산울림이 더 좋다."

솔직하고 명쾌하며 흠을 잡을 수 없는 글이 된다. 그런것이 정직한 글쓰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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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2일 일요일

인천 공연.

꼬마야님의 사진.
4월 10일. 인천공연.
우습기 짝이 없는 공연기획이었다.
대중들의 수준과 기획자들의 심안을 두고 무게를 재어본다한들 좋은 대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밴드가 홍대앞의 공연장에서 벌였던 것과 같은 강한 사운드의 록음악을 연주하고 있을 때에도 눈을 반짝이며 몸을 들썩이고 즐거워했던 나이 지긋하신 관객들의 표정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한 가지는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관객들은 언제나 즐길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것을 업으로 삼는 이들은 대부분 고인물이 썩어가듯 그나마 차지한 자리를 뭉개고 퍼질러져있다는 것이다.
열광해주던 관객들을 위해 한 곡을 더 연주했을 때에 나이든 어르신 분들의 몸짓에 깜작 놀랐다. 그분들에게는 단지 음악을 제대로 즐길 기회가 부족했던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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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0일 금요일

TV 쇼.


유튜브만 반나절 들여다 보아도 악기와 음악에 대한 느낌을 배울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궁금한 것이 있다.
TV 방송에서 퍼즈와 디스토션 기타 소리가 제대로 전파를 타고 방영이 되어버리면 법에 저촉되거나 회사의 윤리강령 같은 것에 위배되거나 그런 것일까? 어째서 보컬 50%와 노래 반주 50%라는 틀을 유지하기 위해 그 비싼 기계와 전기를 소모하고 있는 것인지 늘 궁금해하고 있다.

프로그램을 만들 때에 인터넷 검색이라도 해보면 어떨까. 최소한 출연하는 사람들에 대한 잠깐의 사전조사라도 해본다면 괜찮은 대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뭔가를 기대하고 쓰고 있는 글은... 물론 아니다.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도 전기기타에 플로그 조차 꽂지 않은채 '라이브 생방송'이라며 음악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음악채널'도 있으니까, 그에 비하면 훌륭하다.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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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7일 화요일

상상마당 공연.


그저께 4월 5일, 상상마당에서 공연을 했다.
일요일이었다.
나는 금요일 부터 다시 감기몸살에 시달렸다. 끙끙 신음소리를 내며 생일이었던 토요일을 비참하게 보냈다.
토요일에 쉴 수만 있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라고 투덜거렸다. 두통과 오한을 참느라 고생스러웠다.


공연 전에는 여덟 시간 지속된다는 강력한 타이레놀을 두 알 먹었다. 그 기운으로 공연을 마쳤던 것 같았다.
일거리가 있는 한 쉴 수 없는 비정규 일용직인 나는 몸뚱이라도 튼튼해야 한다. 힘이 드니까 자꾸 이를 악물었었는지 어금니 쪽이 아팠다. 진통제는 정말 강력했다. 연주하고 있던 90여분 동안 몽롱한 기분만 느꼈고 통증은 전혀 없었다. 공연을 마치고 대기실의 의자에 앉자 마자 다시 춥고 떨리는 것이 시작되었다. 여덟 시간 지속이라는 광고문구는 거짓이거나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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