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9일 화요일

겸손해질 수 밖에

 


컴퓨터를 아예 끄고, 책상 위에 아이패드를 가로로 놓아 음악을 틀었다. 몇 주 동안 듣고있는 Romain Pilon의 앨범이다.

어제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30년 전 라이브 영상을 보았다. Joshua Redman이 막 데뷔하여 무서운 젊은이로 등장했을 무렵의 실황이었다. 크리스챤 맥브라이드, 브라이언 블레이드, 브래드 멜다우 들이 풋풋한 어린 모습으로 엄청난 연주를 하고 있었다. 크리스챤 맥브라이드는 플렛이 있는 네 줄 베이스를 치고 있었다. 잊고 지내던 베이스의 기본을 새로 구경했다. 어떻게 리듬을 연주하고 그것을 유지하는지, 화음과 리듬과 곡의 패턴을 훼손하지 않으며 음악적인 유희를 즐기는지,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낮에 밴드 합주를 했다. 밴드의 리더님은 조금 더 늙었고, 몇 곡의 키가 조금 변경되었다. 자기의 변한 목소리에 맞도록 바꾼 것일 게다. 키가 바뀌면 베이스의 선율이 다르게 들린다. 원래 하던대로 해버리면 음악이 너무 무거워지거나 밋밋하게 되어버릴 수도 있다. 밤중에 네 줄 베이스를 꺼내어 스무 곡 전체를 쳐보았다. 새로운 베이스 라인으로 연주하면 좋을 곡들을 골랐다. 합주를 할 때 노래와 악기 소리가 잘 섞이는지 확인하고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원래대로 할 것을 결정했다.

얼마 전에 John Scofield 가 앰프 두 개를 놓고 혼자 연주하는 영상을 봤었다. 노인이 된 그가 보여주는 연주는 완전히 농익어서 어쩐지 슬프게 들렸다. 말년의 클래식 피아니스트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종류의 슬픔이 있었다. 인간이 수십년 동안 매만져 완성해낸 최고의 기량과 정신. 그러나 완성에 가까와질수록 이제는 육체와 마음을 최고의 상태로 유지하는데에 남은 힘을 써서 버텨낼 뿐. 끝이 가까이에 다가온 늙은 인간의 무르익은 연주는 슬프고 아름답다. 겸손해질 수 밖에.


2022년 3월 24일 목요일

애정

 



고양이와 함께 살면 하루에 몇 번씩 신비한 경험을 한다.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가 얼마나 영리한지에 대하여 자주 말한다. 그게 중요한 이유가 뭔지 나는 모르겠다.

혹시 자기들이 영리하지 못하여서 개나 고양이가 사람이 이름을 부르면 알아듣는 것을 보고 똑똑하다고 감탄해주며 위안을 얻는 걸까. 다른 종의 동물과 주거를 함께 하며 고작 기뻐하는 일이 동물의 지능이라니, 지능에 결핍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 건가.

내가 고양이들과 살면서 경험하는 신비로운 일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종의 동물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애정을 표현할 때다. 밥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굳이 쓰다듬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애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다가와 떠나지 않는다.

일찍 죽어서 떠나버린 고양이 순이와 나는 특별한 관계였다. 그 고양이는 나에게, 나는 고양이에게 매일 애정을 표현했다. 고양이와 나만 기억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순이가 죽은지 벌써 오 년이 지났는데도, 자주 그 고양이의 갸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착각을 한다.

고양이 순이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나의 청승만은 아니다. 지금 함께 살고있는 고양이들이 발산하는 애정 덕분에 나는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순이와 꼼이를 가슴 안에서 떠올려 또 한번씩 느껴볼 수 있다.

지금 곁에 다가와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보다가, 내가 잠깐 품에 안고 어루만져줬더니 무릎 가까이에 몸을 말고 누워 잠든 검은 고양이. 고양이 깜이는 옛날에 순이가 그랬던 것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좋아한다는 표현을 한다. 동물과 함께 살면 매 순간 사랑을 빚진다.



2022년 3월 20일 일요일

의미있는 것

 


예전의 나는 작은 기쁨과 고통에 혼자 예민해하여 한 줌도 안되는 감정을 이만큼 과장하곤 했다. 이제는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은 우리에게 무심하다. 원래 세상이란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인간이라는 쪽의 입장에서는 자꾸 이치를 따지고 싶어하고 원칙이니 정의 따위를 내세워 떼라도 써보려 하는 것이지만, 자연・세상・우주는 그런 것에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는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어떤 가치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을 논리인 것처럼 우겨보려고 해봤자, 우리는 점점 더 약하고 보잘 것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된다. 그것을 부조리하다며 계속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이 하는 일이겠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되어지지 않는 것을 해결해달라고 드러누워 소란을 피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 곁을 지키며 밤새 의자에서 몸을 접고 자고있는 고양이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는 일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 뭐 몇 개나 될까.



2022년 3월 18일 금요일

버릇

 


안경을 쓰지 않고 글씨를 써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안경은 돋보기인데, 적당한 거리를 맞추기 어려워졌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지럽다. 내 시력의 문제는 단순한 노안 증상이기 때문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으면 안경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

요즘 읽고 있는 대부분의 책은 모두 전자책이다. 눈이 나빠진 뒤로는 종이책을 읽는 것을 더 어려워하고 있다. 종이의 색에 따라, 인쇄된 글자의 폰트, 서체에 따라 어떤 종이책은 눈을 더 피로하게 만든다. 아이패드로 책을 읽으면 밝기를 잘 맞추고 배경색과 서체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이 편하다. 다만 옛날처럼 옆으로 누워 좌우로 뒤척이며 책 한권을 다 읽어버리는 일은 이제 어렵다.

그동안 계속 안경을 쓰고 글씨를 썼더니 더 잘 보이게 하고싶어서 몸을 자꾸 낮춰 웅크리고 있었다. 허리의 통증도 줄여야 하고 손목도 자주 주물러 펴줘야 한다. 더 잘 읽고 보고 싶어서 눈을 찡그리는 것도 하지 않으려고 자주 의식해야 한다.

나이가 들었고, 몸은 변했다. 좋은 자세를 생각하며 스스로 버릇을 만드는 방법 밖에 없다.

2022년 3월 12일 토요일

자코 부트렉


 애플뮤직에 웬 Jaco Pastorius 앨범이 새로 나왔다며 추천음반으로 보여졌다. 또 이곡 저곡 붙여둔 엉터리인건가 보다 하고 듣지 않고 있었다. 사실, 며칠이 지나도록 음악을 집중하고 들을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수상한 앨범의 곡명을 보다가 내가 모르는 타이틀이 있어서 들어보기 시작했다. 이 앨범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특이한 녹음이었다. 음질도 나쁘지 않고 악기 소리 외에 잡음도 없는데 그렇다고 제대로 믹싱을 거치지 않은 듯 밸런스가 좋지 않은 곡도 있었다. 이건 부트렉 같은 것일까.

자코의 연주도 특이했다. 솔로의 구성이 엉성하고 간혹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부분도 들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함께 연주하는 연주자, 편곡, 자코의 솔로 등은 클래스가 높았다. (당연하잖아) 두 곡을 이어붙인 트랙은 라이브 연주이거나 공연을 위해 리허설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정식으로 발매했던 앨범에서 들었던 자코의 완성도 높은 연주가 아니라고는 해도 무시무시한 테크닉은 분명했다. 이런 녹음은 누가 어떻게 보관하고 있었던 걸까. 플렛리스 베이스의 슬러를 사용한 인토네이션은 자코의 지문처럼 그 사람만 낼 수 있는 아름다운 사운드 그대로였다. 말끔한 구성은 아니고 반복되는 프레이즈를 계속 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녹음이나 공연을 앞두고 꼭 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솔로인데도 어느 부분도 화성적으로 틀리거나 이상한 음이 없다. 망설이는 것처럼 들릴 때에도 음악적인 손버릇으로 빈 곳을 메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음색이 대단하다. 



2022년 3월 5일 토요일

선거

 



읍사무소 (명칭은 주민자치센터로 바뀌었지만, 읍사무소가 낫다)에 가서 아내와 함께 사전투표를 했다.

투표소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 서있었다. 내 앞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든 육십대 쯤 되어보이는 여자가 너무 뻔뻔했지만,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싫어서 잠자코 있었다. 내 뒤에 서있던 아내가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하러 나왔는데, 이것이 어떤 결과로 나올지 아직 모른다. 불안감과 함께 희망도 버리지 않는 수 밖에 없다.

투표를 마치고 걷던 중에 빨간 옷을 입은 나이 어린 남자애들이 빨간색 기호를 들고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가까운 옆에 두 명의 중년 여성들이 파란 옷을 걸치고 홍보하며 서있었다.

아내와 첫 끼 식사를 위해 동네를 걷다가 새로 생긴 가게에서 햄버거를 사먹었다. 저녁에 뉴스에서는 이번 사전투표율이 역대 가장 높았다고 했다.

동해 해안을 따라 산불이 아주 크게 났고 여전히 불을 끄지 못하고 있다. 삼척, 동해, 울진, 묵호항까지. 바람이 세게 불어 남동쪽으로 확산하고 있단다. 강를 옥계에서 일어난 불은 방화였다고도 하고.

빨간 옷을 입은 갓 스무살 정도 되어 보이던 사내아이들의 모습이 기억 나면서, TV 화면 속에서 시뻘겋게 타고 있는 불길을 보고 있었다.



2022년 3월 2일 수요일

살아가는 일


 

어느 노인이 별세를 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십대시절부터 계속 들어왔다. 글과 책도 읽어봤었다. 한 마디로 그는 본래의 가치보다 너무 과하게 포장되었다. 내 견해로 그는 '먹물 엔터테이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만나본 적도 없지만 황현산 선생을 떠올리면 이번에 별세한 그 사람과 비교할 것이 많았다. 황현산 선생도 돌아가셨지만 그분의 트위터 계정을 나는 여전히 팔로우하고 있다. 그가 남겼던 트윗들을 모아놓은 책도 나와있다고 하는데 나는 생각이 나면 트위터 계정을 찾아가 다시 읽는다.

황현산 선생은 돌아가시기 불과 한 해 전에 갑자기 무언가에 그리움이 올라와 나무로 된 장기알을 수소문 끝에 구입하면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건가' 라고 썼다. 그 분이 그 장기알을 몇 번이나 장기판 위에 올릴 수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잘 하셨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두 해 전에는 원고와 오래된 책을 스캔하여 새로 제본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스캐너와 제본기계를 구입하셨던 내용도 있었다. 그 트윗 글들을 나를 비롯한 몇 백명이 실시간으로 읽고 있었다.

그는 조동진 씨가 돌아가셨을 때 조동진의 노랫말을 '단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고 하며 고인을 애도했었다. 그 이듬해에 선생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본인도 독자들도 그때는 몰랐었다. '내 신변에 변화가 생겼다'며 잠깐 트위터에 글을 쓰지 않고 있다가 드디어 올린 짧은 글에는, 열심히 치료를 받고 병을 이겨내겠다고 했던 내용도 있었다. 삶과 죽음이 허무하다.

새벽에 뉴스가 업데이트 되면서 감염병 확진자 수가 이십만 명이 넘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죽거나 살아남는 일이 매일 가까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