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8일 월요일

만년필

 



나는 손끝이 약하다. 악기를 연주할 때 걸핏하면 검지손가락의 손톱이 들려버리거나 손가락 끝을 다친다. 그런데 겨우 펜을 쥐고 글씨를 쓰다가 손끝이 다칠 줄은 몰랐다. 굳은살이 있어도 이 모양이다.

만년필에 관련된 영상들이 재미있어서 매일 찾아보고 있었다. 어떤 도구, 어떤 취미이거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자기가 재미있어하는 것에 객관적이지 못하다. 그냥 그것이 좋고 그 일에 몰두하여 재미있으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할 것 같은데, 자신의 선택과 취향에 자꾸 비싼 값을 매기려고 한다. 다른 기준, 보편적인 동의, 억지로 쥐어 짜낸 급조된 철학 같은 것으로 장식해주지 않으면 자기의 취미가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버릴까봐 겁을 내는걸까. 나는 그런 모습들을 악기에서도 보았고 자전거를 탈 때에도 체험했다. 당연히 만년필의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모든 인간의 문화는 그렇게 과몰입하는 사람들의 쓸데 없는 짓들 덕분에 풍부해진다. 뭘 저렇게까지 하는가 싶은 사람들의 경험과 실패가 쌓여 그 분야의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한편 나는 갑자기 펜을 사느라 너무 돈을 썼다. 이쯤에서 멈춰야 좋겠다.



2022년 2월 20일 일요일

글씨

 


지금 나의 필체는 '93년 가을에 지금의 이 모양으로 바뀌었다.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에는 내 글씨가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


나는 '93년 여름에 군에 입대했다. 여섯 주 동안 훈련을 받고 무슨 영문인지 자동차에 실려 하루는 이쪽 부대로 다른 날에는 저쪽 부대로 실려다니다가, 바람이 선선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부대에 배치를 받았다.

나는 상황실, 나중에는 지휘통제실이라는 명칭으로 바뀐 부대 안 사무실에서 근무를 했다. 밤을 새우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야근을 하지 않는 날에는 지휘통제실을 밤새 지키는 근무를 했다. 아침부터 밤, 새벽까지 매일 빈 종이에 자와 볼펜으로 양식을 그리고 공문의 내용을 작성했다. 온갖 서류와 체크리스트에 싸인을 했다. 낮에는 종일 타자기로 문서를 만들고 지도를 그리거나 암호를 관리했다.

내가 제일 많이 했던 일은, 부대장과 상관 장교들의 지시내용을 간결하되 충분하게 요약하고, 문장을 잘 다듬어 문서로 만드는 것이었다. 제일 많이 받아서 책상 위에 일거리로 쌓아두고 있었던 것은 직속상관인 중령의 메모였다. 그는 뭔가 생각이 나면 연필이나 싸인펜으로 종이에 빼곡하게 내용을 적어 내려 보냈다. 그것을 하사관이나 장교들이 받아와서 말없이 내 앞에 '원고'를 놓고 가는 일도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부터는 중령이 사무실에 들어와 직접 나에게 메모 더미를 내밀며 '일'을 독촉했다.

그 시절에 그 중령의 갈기듯 빠르게 쓴 메모의 글씨가 나에게 전염되었다. 해야 할 일은 많고, 가능한 시간을 아껴 많은 것을 빨리 적어야 했다. 자음과 모음을 죽 이어서 속도감 있게 써내려가는 그 장교의 손글씨체는 효율적이었다. 다음 해 여름 무렵에는 내 글씨가 그의 글씨와 많이 닮아져 있었다. 다른 사무실의 동료가 수상한 문서를 들고 와서 나에게 상관의 싸인을 대신 해줄 수 없느냐고 말하여 난처했던 적도 있었다. (아마 말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군에서 복무했던 경험이 강했기 때문이었는지 그 뒤로 삼십여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지금 이 필체의 단점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전역을 한 후 몇달이 지났을 때에 우연히 찾아와 함께 커피를 마시던 군대 후배로부터 그 장교가 훈련 중 차량사고로 순직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참을성 있는 사람이었다. 나와 큰 인연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분의 명복을 빌었다.


나는 지금의 내 글씨를 교정하든지 하여 언젠가는 다른 필체로 바꾸고 싶다. 뭔가를 오래 끄적일 때마다 군대 시절 그 사무실의 퀘퀘한 냄새가 떠오르곤 한다.


 

2022년 2월 17일 목요일

밥 제임스 트리오

 


지난 연말에 이 앨범이 나온 후 몇 주 동안 계속 들었다. 유튜브에 있는 그의 채널에 스튜디오 라이브 레코딩 영상이 올려졌다. 여러 번 반복하여 보았다.

세련되고 고급스럽다. 깔끔한 보이싱에 완벽한 편곡이다. 그것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녹음 기술, 모든 것이 좋았다.

피아니스트의 완벽한 편곡과 연주로 꾸미는 음악이기 때문에 리듬 파트의 모든 부분도 잘 짜여진 편곡 안에서 움직인다. 트리오 편성을 기타를 포함시켜 쿼텟으로 만들고, 일렉트릭 베이스로 악기를 바꿔 놓으면 그대로 Fourplay의 음악이다. 세 악기의 인터플레이도 전부 피아니스트의 편곡에 따라서 간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우며, 통제 범위의 안쪽에서 연주한다.

예전에는 이런 종류의 음악적 통제의 느낌이 답답했었다. 일부러 라이브 음반을 듣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잘 고르고 다듬은 스튜디오 앨범이 더 좋을 때가 많아졌다.

이 앨범은 유튜브에 올려진 영상 그대로 스튜디오 라이브이다. 재즈 앨범을 감상하고 그 연주가 녹음되는 현장도 구경할 수 있으니 참 좋다고 생각했다.



2022년 2월 10일 목요일

음악 듣기

 


집안에 오디오를 둘 곳이 없어서, 그리고 어차피 음량을 크게 하여 음악을 들을 수도 없어서 스피커와 앰프를 떼어 놓은지 오래됐다. 음악을 듣는 일은 아이팟에 이어폰, 아이폰에 블루투스 이어폰, 책상 앞에서 오디오 인터페이스에 헤드폰으로 하고 있은지 오래다.

집중하여 듣는 시간이 점점 줄더니 음악을 골라 자리를 잡고 앉는 것도 마음 먹어야 하는 일이 됐다. 문제는 책상 앞에 앉으면 자꾸 뭔가 다른 일을 함께 하게 되고,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라도 하게 된다. 음악만 들으며 앉아 있는 일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은 아닐텐데.

그래서 온전히 음악만 듣는 시간은 오히려 운전을 할 때다. 혼자 먼 길을 운전하는 것이 여전히 즐겁게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그것도 우선은 안전하게 운전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알고 보면 제대로 집중하여 음악만 듣는 일을 하기가 참 어렵다.

십대 시절에 한참 음악에 빠졌을 때엔 음질도 좋지 않은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 앞에 앉아서 눈을 감고 몇 시간 동안 음악만 들었었다. 음악을 재생하는 기기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을 가지게 된 지금, 이제는 그 어린 시절만큼 몰입하여 음악을 듣지 못한다.

이 한 장의 음반 만큼은 오늘 작정하고 들어보겠다고 마음 먹고 침대에 누워 귀에 유선 이어폰을 끼웠다. 앨범을 다 듣고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더 듣고싶은 음악들이 생각나고 졸음은 멀리 달아나버렸다.



2022년 2월 4일 금요일

겨울 아침

 


설 연휴가 지나가고 겨울날 아침. 난방을 충분히 하여 따뜻한 바닥 위에 고양이들과 사람이 뒹굴고 있었다. 창문으로 햇볕도 쏟아졌다. 하도 조용하여 나는 커피를 한 잔 따라 손에 들고 방으로 들어갈 때에 뒷꿈치를 바닥에서 떼고 걸었다.

아내는 곁에 함께 누워있던 고양이 깜이가 깨어나자 천천히 사진을 한 장 찍고 있었다. 푹 자고 일어난 고양이의 털이 유난히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