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동안 연주를 했다. 강과 넓은 잔디와 나무들이 있어서 소리가 좋았다. 두 시간 넘는 공연을 이어오다 보니 한 시간 동안 연주하는 것이 짧게 느껴졌다.
피곤하지 않은 상태로 쾌적하게 연주하고 싶은 생각으로 하루 전날 도착하여 숙박을 했던 것인데, 낮 시간에 아내와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을 때 예상하지 못했던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여유있게 공연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게다가 며칠 장거리 운전을 계속했더니 어깨에 경련이 생겼고 담이 결렸다. 아니나 다를까 연주하는 내내 조금만 자세를 바꾸면 온몸에 통증이 심해져서 아주 애를 먹었다. 공연을 마치자마자 다시 집을 향해 달려오느라 중간에 과속단속 카메라에 사진도 찍혀버리고 말았다. 하루 전에 공연장 근처에서 숙박까지 했던 보람이 없어져버렸다. 집에 돌아와 고양이들을 살피고, 손흥민 선수가 해트트릭을 하는 경기의 후반전을 실시간으로 보고 난 뒤에 그만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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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 분당중앙공원. 7년 만에 다시 가보았다. 2015년 5월 9일에 그곳에서 공연했었다. 그날에 나는 리허설을 마치고 그 동네가 집이었던 친구 동우를 만났었다. 암 투병 중이었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반가와 하며 함께 밥을 먹었다. 나는 모밀국수를 주문했었고 그는 국물이 있는 무엇인가를 먹었었다. 나는 많이 야위어 있던 그에게 뭔가 더 먹이고 싶었는데 그는 주문했던 것도 다 먹지 않고 남겼었다. 그는 그날 밤중에 있을 공연을 구경하고 싶어했지만 항암 치료 중에 체력이 너무 나빠져서 피로해했다. 그래서 식사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나에게 잘 먹었다고 말하며 "다음엔 내가 밥을 사겠다"라고 했었다. 그리고 두 해가 지난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리허설을 하면서 나는 내 모니터 스피커에서 베이스 소리를 줄이고 전체 음량도 더 내려주기를 부탁했다. 무대가 넓지 않아서 무대 위의 사운드와 베이스 앰프 소리만으로도 연주하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밤이 되어 공연을 시작하고 첫 곡의 E 음을 누르자 마자, 나는 내가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알았다. 베이스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무대 앞으로 드넓게 트인 잔디마당이 펼쳐져 있었는데 낮에는 고요하여 다 들리고 있었던 소리가 공간을 가득메운 관객들이 들어차자 마치 증발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연주를 하면서 몇 번이나 앰프의 노브를 돌려 음량을 올렸다. 앰프에 Limit 경고등이 나올 정도로 볼륨을 올렸는데도 베이스 소리는 공기 중으로 휘발되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리허설을 할 때에 베이스 음량을 줄여달라고 부탁하지만 않았어도 괜찮았을 일이었다. 결국 상상력을 동원하여 연주하기로 했다. 내가 줄을 건드릴 때에 어떻게 소리가 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으니 하던대로만 잘 연주하면 관객들을 향하는 사운드는 엔지니어들이 알아서 잘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의식적으로 몸에 힘을 빼고, 과잉된 연주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공연을 마쳤다. 끝나고 나서 구경했던 분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베이스 소리가 아주 좋았다고 했다. (나빴다고 말해줄 리는 없지만...)
내 소리를 듣지 못한 채로 한 시간 동안 공연해보는 경험을 하였다. 8월의 투어를 모두 마쳤다.
1980년 5월 2일, 전북대학교 학생 천 명이 거리로 나와 경찰과 맞서 돌을 던지며 대치 중이었다. 비상계엄을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최루탄 가스를 발사하는 지프차를 전복시켰다. 전북대학교 정문 앞에도 오백여명의 학생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고 시내로 들어온 학생들은 종합경기장 공사용으로 놓아둔 토관을 굴리며 도로를 차단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싸우고 있었다. 그로부터 이십여일 후에 광주... 그리고 새 군부독재의 노골적인 시작. 다섯 달 뒤에 전국체전이 시작했고 이제 막 개장된 종합경기장에 대한 기사가 언론에 매일 나왔었다. 마치 세상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3만명을 수용하는, 엄청난 비용을 들인, 최대이며 최신인 종합경기장.'
1963년에 지어져 1980년에 대대적으로 증축한 나이 많은 덕진 종합경기장에 공연을 하러 갔다. 공연 전에 경기장 바깥을 걸으며 긴 세월을 지나보낸 콘크리트 건물들을 구경했다.
연주를 시작하니 선선해진 밤 공기 때문인지 넓은 공간 덕분인지 소리가 아주 좋았다. 집중하며 연주할 수 있었다. 그렇긴 한데 역시 반쯤 자고 있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공연을 하고 다시 집에 돌아오며 고속도로를 달렸던 것들이 한데 섞여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집에 돌아오자 그대로 드러누워 자버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정신이 맑아졌는데 제일 먼저 기억 났던 것은 전주에서 먹었던 육회비빔밥과 생선구이 정식이었다. 일부러 가장 평점이 낮은 식당을 골라 찾아간다고 해도, 전주에서 먹는 음식은 전부 다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안산 문화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을 했다.
여기에는 7년 전에 왔던 적이 있었다. 그 땐 객석이 천 육백석이었던 해돋이 극장이었다. 이번에는 칠백여석 규모인 달맞이 극장에서 연주했다. 오늘은 날씨 때문이었는지 평소보다 더 졸음이 쏟아져서 혼이 났다. 리허설을 마치고 비어있는 대기실을 찾아내어 잠깐 누워있어야 했다.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정신을 차리느라 고생했다. 리허설을 할 때에 앰프의 음량이 점점 줄고 있어서 원인을 알아내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알고 보니 내 페달들을 연결하고 있는 케이블이 접촉불량이었다. 오래 사용하지 않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케이블과 악기의 잭 등에 접점부활제를 뿌려 잘 닦아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펜더 엘리트 모델은 패시브 모드로만 사용했다. 앰프는 암펙 SVT- 4 Pro 였다. 그 앰프가 나에게 익숙했기 때문에 연주하기에 편했다.
집에 돌아왔을 땐 그대로 누워 잘 생각이었는데 그만 축구중계가 생각나고 말았다. 졸음을 참으며 전반전의 끝 부분과 후반전을 보고 나서, 깊이 잠들었다가 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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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만에 치악체육관에 가보았다. 나는 잘 못 기억하고 있었다. 치악체육관에서 연주했던 것이 2003년인 줄 알았는데, 2004년 1월의 일이었다. (2004 1월...)
공연장에 가면 그 건물에 대해 읽어보는 것이 습관인데, 이곳은 1980년에 개장했다고 적혀있었다. 문득 어딘가에 갔을 때에도 같은 해에 완공된 건물이라고 했었는데... 하다가, 여의도 KBS 별관이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동양방송에서 세워 4월부터 새 건물을 본사로 삼아 사용하다가 그 해 11월에 언론통폐합으로 빼앗겼던 그 건물이었지, 따위의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치악체육관은 붉은색 벽돌이 인상적이었다. 이십여년 전에 왔을 땐 눈이 많이 내렸었는데, 그 때에도 붉은 벽돌과 지붕이 기억에 남았었다. 대기실로 사용하는 방의 문앞 복도에 반짝 하고 햇살이 들어오는 것이 보여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리허설을 마치고 잠이 부족했던 나는 우선 자동차 뒷자리에 몸을 접고 누워서 토막 잠을 잤다. 자동차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막 잠이 들 때에 어떻게 하면 노이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답을 찾은 것 같았다.
무대 위에는 Aguilar 앰프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려 DB751 하이브리드 헤드가 와있었다. 750와트를 내주는 앰프였다.나는 앰프의 게인과 마스터 볼륨을 1 이상 올릴 수도 없었다. 그만큼 출력이 세었기 때문이었다.
네 시 반에 잠을 깨고 대기실에서 펜더 엘리트 베이스의 프리앰프 노이즈에 관한 글들을 검색하며 도시락을 먹었다. 도움이 되는 글은 찾을 수 없었다.
문제는 노이즈가 생기고 있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리허설을 하는 동안 내내 악기의 톤을 정돈할 수 없었다. 이런 상태면 그냥 한 개의 악기만 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오늘은 내 자리가 유난히 좁고 베이스 앰프가 워낙 세기 때문인가 하였다. 가깝게 놓여있는 모든 스피커와 마이크가 액티브 모드일 때 악기의 픽업을 타고 잡음을 유발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향감독님이 '음악이 진행되는 동안엔 괜찮다' 라고 말했던 것의 의미는 여전히 노이즈가 있지만 연주하는 동안엔 음악소리에 묻혀서 감추어지는 정도라는 뜻이었을 것이었다. 그것을 해결해주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연 시작 직전에, 나는 자동차에서 잠을 청할 때에 떠올랐던 생각대로 악기를 패시브 상태로만 연주하기로 결정했다. 노이즈 문제도 사라질 것이고, 베이스의 톤은 가지고 갔던 MXR 페달로 쉽게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운드 체크를 할 때에 듣기 싫은 소리를 발견하면 욕심을 버리고 가능한 거슬리지 않는 톤을 사용하는 것이 언제나 정답이었다. 그래서 베이스의 스위치를 끄고 전부 패시브 모드로만 연주하였더니, 그 결과가 아주 좋았다. 공연 내개 마음에 드는 톤이 나와주고 있었고, 두 악기의 음량 차이도 적어서 편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 일부러 찾아와 의논해준 젊은 엔지니어 덕분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혼잡하여 미처 그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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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공연에는 펜더 재즈를 가지고 갔다. 이번에는 낮은 D음을 쓸 곡이 없었기 때문이었기도 했고, 몇 달 전 이 악기의 상태가 나빴던 것을 그동안 잘 고쳐놓았기 때문에 큰 공간에서 소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공연을 만든 방송사 쪽에서 무대 위에서 입을 의상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을 때 나는 십 년 전에 검은색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공연했던 사진을 골라서 보내줬다. 그 옷차림은 이렇다 할 색감이 없으니 펜더 재즈 베이스의 선버스트 바디가 의상의 일부로 보여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매 꼬마야 님이 찍어주심. |
제주 공연장은 매진이라고 하더니 과연 관객석에 빈 자리가 없었다. 공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공연장에 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청중들이 가득 찬 극장에서 연주하는 것이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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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도로정체를 겪었다. 내비게이션 앱은 서울역에 도착할 예정시간을 점점 늘리고 있었고 꽉 막힌 도로는 뚫리지 않았다. 한 시간 십여분 동안 길 위에 갇혀 있었다. 손에 땀이 나고 입이 말랐다. 겨우 정체구간을 벗어난 뒤에는 정신없이 차를 달렸다. 몇 년 만에 과속도 했고 차선을 위반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 시간에 역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기에는 무리였다.
아내에게 전화하여 도움을 청했다. 아내가 빠르게 판단하여 다음 기차를 예약해줬다. 매니저님에게 급히 전화하여 사정을 설명했다. 아내가 기차표를 예약해주기 전까지 나는, 그대로 차를 돌려 고속도로를 달려 부산까지 갈 마음을 먹고 있었다.
아내가 급하게 예약해준 기차는 몇 군데 들르지 않는 급행이었다. 나는 앞서 출발했던 일행과 큰 차이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리허설을 마치고 저녁 여섯 시가 다 되어 하루의 첫끼를 먹었다. 굶고 있다가 먹었기 때문에 맛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부산의 돼지국밥은 이제 높은 수준으로 평준화가 되어있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맛있는 국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일정을 마치고 부산역에서 다시 기차에 올라탔다. 좌석에 앉으니 몸이 의자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에어팟을 귀에 꽂고 Fourplay와 Chuck Loeb의 음악을 들었다. Mendelssohn의 바이올린 협주곡 앨범도 들었다. 다시 서울역에 도착하니 한 시 반. 낮과 달리 텅 비어있는 강변북로를 달리며 큰 음량으로 멘델스존의 음악을 다시 들었다. 음악이 끝날 무렵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루가 참 길었다.
집에 돌아와 찬물로 여러번 세수를 하고, 내일 학교에서 수업할 자료를 완성했다. 지난 주에 만들어두긴 했었으나 내용이 부실했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준비해야 했다. 모든 것을 마치고 알람을 서너 개 설정한 다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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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나 고속도로를 달렸다. 전주에서 공연을 했다.
공연장은 4년 전에 공연했던 야외무대였다. 건물도 풍경도 낯이 익은데 다만 사람들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고 공연장에 들어가기 위해 백신접종을 마쳤다는 증명을 확인받아야 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와 악기를 한 번 살펴봐야했다. 부쩍 기온이 낮아졌기 때문에 짧은 시간 무대 위에서 연주했을 뿐인데도 악기의 튜닝이 심하게 달라져있었다. 밤이 되어 공연을 시작했을 때에는 손이 차가와져서 내가 힘을 조절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근육을 다친 손가락에 통증이 너무 심했다.
관객들도 함께 추위를 견디며 야외공연장에 모여 앉아있었다. 아직은 예전처럼 일어나 호응을 하거나 마음껏 즐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판데믹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새벽에 서울역으로 돌아와 주차장에서 자동차 시동을 걸고, 강변북로를 따라 집까지 오면서는 음악도 틀어두지 않았다. 가끔 차창을 열면 서늘한 공기가 마스크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사는 곳도 심야가 되면 주차하기가 어려워진지 오래됐다. 집에 도착했더니 지하 주차장에 좋은 자리가 한 군데 비어있었다.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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