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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일 월요일

공연.


지난 밤 한숨도 잠을 못자고, 근래에 들어 가장 좋지 않은 컨디션이었다.
자주 비틀거려서 혹시 시력때문인가 하여 안경을 계속 쓰고 있었다.
리허설은 공연할 곡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해보았다. 음악에 집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깨가 아프고 몸이 쑤셔도 무대에 올라가 있을 때엔 통증이 잠시 사라진 기분이었다.



일회 공연을 위해 몇 주 동안 네 번 합주를 했다. 덕분에 공연을 잘 마쳤다.
그런데 집에 돌아올 때에 그렇게 졸음이 쏟아질줄은 몰랐다. 운전하며 소리를 내어 말을 해보기도 하고 잠깐 멈춰 서서 찬 공기를 쐬기도 했다. 자꾸 차선을 이탈하며 위험하게 운전했다.
현관 앞에 마중나온 고양이들을 쓰다듬어주기 위해 잠깐 바닥에 엎드렸다가, 정신을 차리고 세수를 한 다음,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



2019년 3월 23일 토요일

공연.


그동안 준비했던 친구들과의 밴드, 첫 공연이었다.
오전에 악기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펴봐야했다. 지난 밤 다른 팀과의 합주를 할 때에 볼륨노브에서 잡음이 심했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나 연주해봤던 공간이었는데 그만 리허설 때에 충분히 준비를 하지 못했다. 내가 뭔가 잘못했구나 하고 느꼈을 때엔 이미 바로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바보같이 모니터 스피커를 귀 가까이에 두고 베이스 캐비넷의 위치를 잘못 놓아뒀다. 공연이 시작된 다음에는 그것을 바로잡을 틈이 없었다. 아주 힘든 상태에서 한 시간 반을 연주해야했다. 평소같으면 겪지 않았을 일이었는데 아마도 내 몸과 정신이 조금 지쳐있었던 모양이었다.


공연장에 태선이가 구경하러 와줬고, 민열이와 하원이 부부가 찾아와 봐줬다. 그들로부터 커피 한 봉지를 선물받았다. 내가 조금 모자랐던 대신 다른 멤버들이 잘해줘서 첫 공연은 순조롭게 마쳤다. 많이 피곤했는데 집에 돌아오니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은 다른 팀과 낮시간에 합주를 해야한다. 선물받은 원두를 갈아 커피를 마셨다.

2018년 12월 7일 금요일

연주.


지난 화요일에는 작년 연말에 공연했던 곳에서 다시 연주를 했다. 평소보다 작은 무대, 객석이 가득찬 아담한 공간의 소리가 좋게 들렸다. 무대는 낮았고 관객의 얼굴 높이에 앰프와 캐비넷이 있었다. PA로 나가는 소리와 별개로, 무대 앞쪽의 사람들이 따뜻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연의 절반 이상은 엄지손가락으로 연주했다.

넓고 큰 공간에서 연주할 때의 즐거움도 있지만, 작은 무대에서의 공연은 언제나 좋다. 나는 좁고 작은 클럽에서 음악을 시작했다. 팔을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에 있는 관객들은 손가락이 줄에 닿는 감촉까지 느끼며 음악을 즐길 수 있다.
하고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살고있는 일이 쉽지는 않다. 어깨는 늘 무겁다. 다만 악기를 챙겨 무대에서 내려올 때까지는 잠시 일상의 시름을 잊는다. 더 나이를 먹어도 내가 처음 그랬던 것처럼 작은 공간에서든 어디에서든 자주 연주를 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연을 마치고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에 찬 바람이 모질게 불고있었다. 바람때문에 더 빨리 타버리고 있던 담배 한 개비가 아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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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5일 토요일

춘천 공연.


오랜만에 잘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가뿐하였다.
미리 챙겨둔 짐들을 들고 일찍 출발했다. 커피를 가득 담아 운전하며 마셨다.
일찍 도착하여 주차를 하고 공연장 부근에 있는 수제햄버거집에서 햄버거와 콜라를 먹었다.
리허설을 마친 후에는 긴 대기시간 동안 멤버들과 근처 커피집에 모여 앉아 한적하게 잡담도 나눴다.

대화 중에 민열이가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던 이야기를 했다. 그 바람에 각자의 군복무 시절 얘기가 이어졌다. 나는 무슨 말을 보태려다가 그냥 삼켰다. 춘천은 내가 근무했던 고을이었다.
그동안 춘천에 와서 공연을 여러번 했다. 제대 이후 처음 악기를 들고 춘천에 다시 왔을 때엔 기분이 묘했었다. 내 기억 속의 춘천은 밤샘과 야근, 고생스런 훈련, 음악을 듣고 싶어 외출시간 내내 쏘다녔던 중앙로터리 부근 골목길의 냄새들이었다. 2006년에 광석형님과 공연하러 왔던 여름이 기억났다. 몇 년 후부터는 지금의 밴드와 함께 공연을 하러 왔다. 그 후 춘천에서 녹음을 하기도 했고 콘서트를 하기도 했었다. 간혹 누군가들의 세션을 하기도 했다. 오랜 친구들과 블루스 공연을 하러 이곳에 왔던 것이 불과 작년 11월이었다. 그것들이 모두 무척 오래된 일인 것처럼 여겨졌다.

오늘은 그런 감상들은 희미해지고 근화동 공지천 앞 습한 공기를 들이쉬며 줄곧 악기 생각만 했다. 짧은 공연이지만 시작 전에 연습을 하고 싶었었다. 한쪽 손목에 다시 통증이 생겨서 어제 하루는 악기를 손에 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기실은 무대 뒤 천막이었고 그곳은 대화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란했다. 이어폰을 연결할 수 있는 연습용 장치를 굳이 구입해야 좋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감정의 대부분들이 무뎌지고 시큰둥해진 느낌. 설레임도 불편함도 없는 기분이었다.

연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에는 일부러 46번 국도를 타고 느리게 운전하며 음악을 들었다. 처음에는 팟캐스트를 틀어놓았다가 누군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피로해졌다. 가로등이 꺼져 어두운 곳이 많았다. 습한 기운에 앞유리에는 김이 서렸다. 새로 나온 옐로우자켓의 음반과 피아니스트 Shaun Martin 트리오의 앨범을 들었다. 집앞에 도착할 무렵에는 루빈스타인이 연주한 쇼팽을 듣고 있었다. 차분한 토요일을 보낸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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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8일 토요일

음의 높낮이.

악기의 튜닝을 440 Hz 로 해두고 있는 것은 일종의 약속일 뿐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라' 라고 하는 A 음의 높이가 정해져있었을 것 같지만 그것이 지금의 440 Hz 로 약속된 것은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1950년대 이후 레코드 업계라는 것이 범지구적으로 발전한 다음부터 대중음악에서는 440 Hz 에 A 음을 맞추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A 음을 432 Hz 로 튜닝하여 연주하는 것에 대한 갑론을박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왔다.
440 Hz 보다 32센트 낮게 조율하여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에 대한 장점과 단점들이 많은 증거와 논리로 설명되어왔는데, 가끔 그런 글과 주장을 접하고 있어도 나는 뭐가 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역사로, 어떤 이는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하고, 누구는 종교처럼, 어떤 경우에는 명상이나 심리학을 들어서 432 Hz 로 조율한 음악이 훨씬 더 인간에게 이롭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자연에 더 가까운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도 하고 수학적으로 정확한 비율이므로 음의 주파수가 보다 더 음악적이라고도 했다. 물의 진동과 같기 때문에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고도 하고 심지어 건강하게 해준다고도 했다.

그런 것은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했던 것처럼 인간이란 그것이 신비로울 수 있다면 뭐든지 창작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작가적 능력을 지닌 동물인 것이다. 피라밋의 비율이 현대의 생활에 은연 중 숨어들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신문가판대의 가로 세로 치수를 재어 복잡한 수식을 새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복잡할수록 좋고 알 수 없을수록 신비롭기 때문에 뭔가를 믿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쉽다. 그런 것에 한쪽으로만 경도되기 쉬운 것이 바로 사람이고, 그러므로 종교와 다단계 판매업에는 불황이 없다.

최근에 밴드 공연을 앞두고 밴드리더님이 진지하게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하는 곡들에 한하여 432 Hz 로 바꾸어 해보고 싶다는 제안을 하였다.
살다보면 크고 작은 우연을 겪는데, 이번에도 그러했다. 우리는 그 이전에 이것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음악의 튜닝을 바꾸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442 Hz 로 연주한다고 하면 그것에 맞추면 되고, 콘서트홀의 피아노가 443 Hz 로 튜닝되어 있다고 하면 그것에 맞춰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노래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약간의 피치 간격도 민감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나처럼 귀가 바보인 베이스 연주자에게는 그냥 조금 높거나 낮거나의 차이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음의 높이가 다르니 기분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겠지 뭐,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침 내 컴퓨터가 수명을 다 하여 멈춰버리는 일이 생겼고, 나는 새 아이맥을 구입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새 매킨토시 컴퓨터에서는 더 이상 그 유명한 매킨토시 시동음 Startup Chime 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그 사실을 알고서는 분한 마음도 있었다.
맥을 켠다는 것은 그 시동음을 듣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컴퓨터에 전원을 넣고 오에스를 부팅한다는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고 떼를 쓰고 싶었다. 좀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 음은 수십년 동안 맥 유저들이 듣고 있었던 친숙한 음악이었고 유대감을 느끼게 해주는 합창이었다.
그 시동음은 묘했다. 단지 단순하고 짧은 화음일 뿐인데 언제나 듣기 좋았다. 기계에서 나오는 음이라기엔 따뜻했고 어딘가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소리였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긴 부팅시간을 기다리기 직전에 들을 수 있는 수업 종소리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없다면 맥이 아니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상징적인 소리였다.
스티브 잡스가 살아있었다면 아무리 오에스의 작동 방식이 달라졌다고 해도 없애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건 좀... 동의하기 어렵다. 뭔가를 없애버리는 것을 제일 잘 하던 사람이 그 사람이었으니까.

그 매킨토시의 시동음이 바로 432 Hz 튜닝이었다.


432 Hz 에 관한 다양한 주장과 논박에 대해서는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고 아직도 큰 관심은 없다. 그러나 맥의 시동음 만큼은 내 인생 속에서 큰 의미를 지닌 소리였다.

공연을 앞두고 합주를 할 때에 나는 뭔가 진지한 기분으로 베이스를 432 Hz 로 튜닝했다. 긴 시간 합주를 했지만 그날은 무엇이 다른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지난 주 토요일, 부산에서 공연을 할 때에 우리는 공연의 전반부를 432 Hz 로, 후반부의 일렉트릭 사운드는 440 Hz 로 연주를 하였다. 공연을 하고 있을 때에는 미처 잘 알지 못했다가, 공연을 마친 후에서야 비로소 오늘의 연주가 이전의 것과 뭔가 달랐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멤버들끼리 그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경험을 나누었다.

그것 역시 단순히 음 높이가 조금 낮아졌기 때문이니까 그런거지, 라고 해버리면 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독특한 경험이었다.

집에 돌아와 존 레논의 Imagine,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 메탈리카의 Nothing Else Matters 와 너바나의 Come As You Are 를 들어보았다. 모두 432 Hz 튜닝으로 녹음된 음악들이었다.
다시 들어보아도 역시 나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워낙 좋은 노래여서 편안한 것인지,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친숙한 것인지, 듣기 좋은 이유가 과연 조율한 음의 높이 때문인지 나는 단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결론은 잘 모르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제는 사라져버린 매킨토시의 시동음은 언제나 나를 기분좋게 해줬었다.
그리고 지난 주말의 공연 중 그 튜닝으로 연주했던 시간은 이전의 연주보다 따뜻하고 편안했었다. 어떤 음악은 특정한 튜닝이 더 편안할 수도 있고 어떤 음악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 경험하기 전에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던 일이다.




아쉬우니까, 맥의 시동음을 파일로 여기에 저장해둔다.


Mac Startup Ch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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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30일 토요일

공연 리허설.


곡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공연 길이는 짧지 않았다.
스무 곡 넘게 연주했던 적이 자주 있었어서 아마 오늘 정도의 공연은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집에서 페달보드를 펼처놓고 케이블을 연결하다가, 역시 이번에도 꼭 쓸 것만 챙겨가자고 마음먹었다. 페달보드를 사용하지 않은지 아마도 일 년은 넘었을 것 같다.


오랜만에 잠을 잘 자고 일어났던 덕분인지 좋아하는 앰프가 준비되어있던 까닭인지 리허설과 공연 내내 전혀 힘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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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13일 일요일

성남에서 공연했다.


성남에서 오랜만에 밴드의 단독공연을 했다.
다른 모든 것이 잘 준비되어있었다. 딱 한 가지, 내가 나흘 동안 잠을 잘 자두지 못했었다.
자꾸 몸이 붓고 졸리웠다. 공연 직전에 따뜻한 커피 한 컵을 입에 털어넣었다가, 공연 도중에 뻔뻔하게 화장실을 다녀와야했다. 내가 참여하지 않는 그 한 곡이 마쳐지기 전에 다행히도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상습적인 셈이다. 이런 경험이 벌써 몇 번째인가 싶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어쿠스틱 기타를 몇 곡 연주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일론 스트링 기타소리가 좋았다. 객석에서는 어떻게 들렸는지 알 수 없지만, 기타를 치고 있는 동안 나는 기분이 좋았다.

십여년 동안 좋은 사진을 매번 찍어주고 계시는 꼬마야님께 감사드린다. 그 분이 아니었다면 그동안 우리가 연주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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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31일 수요일

Jeff Lorber



제프 로버가 그래미 상을 받았다. Best Contemporary Album 부문에서 수상했다.
상을 받은 음반은 작년에 발표된 Prototype 이다. Nathan East, Pau Jackson, Jr., Dave Mann, Larry Koonse, Chuck Loeb 등이 함께 참여했다. 물론 메인 리듬섹션 연주자는 Jimmy Haslip 과 Gary Novak 이다. 드럼과 베이스의 탄탄한 리듬이란 것이 무엇일까 궁금하다면 이 앨범을 들어보면 된다.

제프 로버가 활동한 세월이 오래였어서, 나는 그동안 그가 그래미 상을 몇 번은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알고 보니 여섯 번이나 지명되었다가 처음 그래미 상을 받게 된 것이었다. 나는 애플뮤직 덕분에 이 앨범을 빠르게 들어볼 수 있었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 Jeff Lorber 가 만들어왔던 음악의 완성품이라는 느낌이었다.

버클리 출신의 많은 연주자들이 좋은 음악을 만들어왔는데, 그 중에서도 제프 로버는 그의 업적에 비해 평가가 덜 되어왔다는 생각을 했었다. 70년대에 버클리를 거쳐갔던 뮤지션들의 꾸준한 활동은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끼쳐왔다.

그는 14년 전 겨울에 그의 아내로부터 신장을 이식받았다. 신장에 관련된 유전병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누이도 신장이식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훌륭한 연주자의 음악에는 음악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기운이 녹아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허비 행콕과 칙 코리아에게서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누구의 음악을 듣고 영감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이번에 상을 받은 크리스찬 맥브라이드의 빅밴드 앨범과 이 음반을 차례로 들으며 새벽을 보냈다.

2017년 11월 4일 토요일

본 것 몇 가지.

영화 몇 편을 보았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일찍 시작한 한국영화가 있었다.
유튜브에서 그 영화의 예고편을 보았을 때에 나는 그 영화가 후질 것을 미리 알았다.
그리고 그 영화의 첫 장면이 시작되었을 때에 나는 과연 이 영화가 유치할 것도 알 수 있었다.
좋은 배우들을 데려다가 쓸데없이 써먹는 영화들은 언제나 있었다.
음악도 유치했다.

십 몇 년 전에 시작하여 몇 해 동안 HBO에서 방영했었다는 미국드라마를 보았다.
The Wire 였다.
좋은 시리즈물이었다.
음악도 훌륭했다. 에피소드 마다 그것을 잘 드러내는 음악들이 들렸다.
영어자막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나중에 검색하여 알고보니 방언과 은어를 잘 골라서 대사에 끼워넣었다고 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재미있게 볼만 했던 드라마라는 것을 잘 알았다.

이 시리즈물에서 인상 깊었던 캐릭터는 Omar Little 이었다.
인기를 끌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 배우가 묘사하는 인물이 입체적이었다. 훌륭했다. 그 배우에 대해 찾아 읽어보았다.
Michael Kenneth Williams 라는 인물이었다.
예상했던대로 가장 많이 인기를 모았던 캐릭터로 이 배우의 이름이 알려져있었다. 얼굴에 세로로 길게 나 있는 상처가 그의 실제 흉터라는 것도 알았다.

이 배우는 약국에서 일을 하다가 자넷 잭슨의 앨범 Rhythm Nation 1814를 듣고 각성하여 직장을 그만뒀다. 그 후 댄서가 되기 위해 배우고 커리어를 쌓기 위한 일을 하다가 Tupac 의 비디오에 출연하면서 배우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음악이 어떤 사람을 다른 예술의 길로 이끌고, 그가 다시 음악과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 예가 많이 있었다. 이 배우의 인생도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미국에서 흑인배우의 쓰임새가 따로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겠지만, 마이클 윌리엄스는 오마 리틀의 연기를 통해 그 영향을 더 넓혔다.
나는 자넷 잭슨의 음반을 틀어두고 노랫말을 검색하여 훑어 보았다.
80년대 끝물에 나왔던 앨범으로 당시의 사운드가 잘 담겨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을 가사의 내용들이라고 했다.
이 음반은 미국 내 흑인들의 머리속을 각성시키고, 그것에 영향받은 배우를 만들어 낸 앨범이 되었다. 그 배우는 이후 미국 흑인들의 메세지를 쏟아내었던 힙합 뮤지션과의 인연으로 다른 많은 힙합 아티스트들의 댄서로 활동하였고, 나중에는 TV 시리즈의 중요한 캐릭터를 맡았다. 다시 그 영향이 미국의 흑인과 다른 인종들에게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것은 좋은 스토리라고 생각했다.

나의 작은 나라에서는 위와 같은 좋은 스토리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영향이 미약하고, 그저 볼티모어의 작은 코너에 지나지 않을 음악시장터 안에서 서로 생존을 위해 약을 파는 것 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한 것 같았다. 그것에는 어떤 새로운 생각도, 반성도, 각성도 이루어지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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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2일 금요일

전주에서 공연했다.


길고 긴 하루였는데, 짧게 지나갔다.
고속도로 운전을 일곱 시간 했다. 다른 도로까지 합친다면 여덟시간 동안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덜 피곤하였다.

날씨는 맑았다. 전주에 있는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이라는 곳은 몇 년 전에도 왔었다. 그 때에 함께 출연했던 신해철 씨의 팀이 리허설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구경했었다. 야외공연장을 내려다보며 해철이형의 죽음을 떠올렸다.

리허설이 고단했다. 그곳이 잔향이 많은 곳이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처음부터 앰프의 음량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 그 때에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결국 공연이 시작되었을 때에 케이블 불량으로 소리가 나지 않는 일을 겪었다. 긴 시간 동안 운전할 때에도 멀쩡했는데, 순간 갑자기 하루의 피로가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다급할 때에 도와줬던 스탭에게 다가가 수고하셨고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분에게도 긴 하루였을 것이다.
내가 가지고 다니는 케이블의 길이가 짧은 것이 늘 신경 쓰였었다. 한 달 전 부터 길이가 긴 좋은 케이블을 새로 구입하려고 했다가 그만뒀었다. 역시 한 개 사두어야 좋은 것일까 하는 고민만 하나 더 늘었다.

밤중에는 고속도로를 달리며 애플뮤직에 담아둔 새로 나온 음반들을 들었다.
운전하며 음악만 들었던 것이 하루 중 제일 좋은 일이었다.



2017년 7월 15일 토요일

성주에서 공연.


매우 잠이 부족했던 하루였다.
공연 시작 5분전까지 몸이 무겁고 계속 졸음이 쏟아졌다.
처음 몇 곡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곡들이어서 나는 연주하며 잠들 뻔했다.
덥고 눅눅했던 여름날이었다. 무대 위와 대기실에는 에어컨이 충분히 가동되고 있었다. 아마 적당한 실내온도와 조명의 따스함 때문에 잠을 쫓기 힘들었나 보다.

이 날은 계속 졸리운 상태로 공연을 마치고 빗길을 약 백여 킬로미터 운전했다. 휴게소에 들러 진한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에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남았던 구간은 함께 차를 타고 갔던 윤기형님이 운전을 해주신 덕분에 안전하게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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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4일 화요일

마포에서 공연.


그 극장이 개관하던 때에 그곳에서 공연을 했었다.
그 사이 몇 번은 연주를 하러, 몇 번은 다른 공연을 구경하러 갔었다.
10여년 밖에 안되었는데 내부가 많이 낡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누군가가 무관심하거나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인가 보다, 했다.

공연에서 연주할 곡들은 열 여섯 곡이었다. 긴 시간일 줄 알았는데 끝나고 보니 금세 시간이 지나갔다.

염리동길에서 저녁식사 후 들렀었던 커피집의 커피가 아주 좋았다. 그 근처에 가게 되면 다시 찾아가보아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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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일 월요일

공연 다녀왔다.


목포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영암에서 열린 콘서트에 참여했다.
이 사진은 공연 도중에 키보드 앞에 앉아 있던 상훈씨가 찍어줬다.
자신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생경했다.

목포역에는 세월호 유가족을 위한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일을 마치고 다시 용산역으로 도착했더니 자정이 넘었다.
강변북로에는 사나운 속도로 택시들이 달렸다.
동네 어귀에는 술에 취한 사람들이 편의점 앞에 앉아 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월이 지나갔다.


2017년 2월 25일 토요일

공연


군포에서 공연을 했다.
악기업체에서 가져온 베이스 앰프가 아주 좋았다.
펜더 수퍼 베이스맨이었다. 내가 쓰기에 제일 잘 맞는 앰프였다.
그 진공관 앰프의 음색을 계속 듣고 싶어서 공연이 더 길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오래전 이태원에서 연주할 때에 사용했던 앰프는 펜더와 어쿠스틱이었다. 그 시절 생각이 났다.

다만 공연 시작 후 처음 서너 곡을 지나는 동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있었다. 낫지 않고 있던 왼쪽 팔꿈치와 손가락에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 깜짝 놀랄만큼 아팠다. 간신히 틀리지 않고 연주를 하긴 했지만 한동안은 손가락 끝이 저려왔다. 줄을 누를 때 마다 아팠다.
잠시 곡과 곡 사이의 시간 동안 손가락을 주물렀다. 감각이 무뎠다. 나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점차 통증은 사라졌고 공연은 잘 마쳤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손가락 끝에 감각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중이다.

시간은 흐른다. 운전을 하며 생각했다.
'아직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제 점점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일들이 생길 것이고 어느날 아침에 갑자기 늙게 되겠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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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7일 토요일

부여에서 공연.


부여 국립박물관에 있는 공연장에서 공연을 했다.
아담하고 작은 공연장이었다. 잘 설계되어 있었고 잔향이 적었다.
리허설을 할 때에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공연 중에도 사운드가 좋을 것이라고 예상해 볼 수 있었다.

부여 박물관 건물도 아름다왔다. 채광과 자연스러운 조명이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나는 점심을 먹고 혼자 박물관의 전시물들을 구경했다.


플렛리스 베이스로 전부 연주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리허설을 마쳤었다.


무대 가까운 곳에 출입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잠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는지 손이 많이 시려웠다. 손이 굳어서 정확한 피치를 유지하느라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결국 공연 후반의 몇 곡은 재즈베이스로 연주했다.

돌아오는 길에 졸음이 쏟아졌다.
휴게소에 몇 번 들러 차에서 토막 잠을 잤다.
나는 적당히 피로를 회복할 즈음 다시 깨어나 운전하는 것을 반복했다. 이제 이 패턴은 완전히 익숙해졌다.

열흘 조금 지나면 해가 바뀐다.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리며 올해에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을 떠올렸다.
어떤 일들은 잠깐 잠이 들었을 때에 지나가버린 꿈처럼 여겨졌다.


2016년 12월 3일 토요일

안양에서 공연.


내비게이션이 예측해줬던 그대로 46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몇 번 연주해보았던 평촌 아트홀이었다.

앰프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리허설을 마칠 때 까지 편안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내가 공연을 하고 있을 시간에 아내는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집에서 나올 때에 구형 아이폰 두 개를 원격 카메라로 켜두고 나왔었다. 집안의 고양이들을 들여다 보니 모두 자리를 잡고 잠을 자고 있었다.


공연을 마친 후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아직 서울 시내에 남아 있던 아내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운전을 했다. 지하철 역에서 아내를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낮 동안 종일 잠을 자던 고양이들이 현관 앞에 달려와 반겨줬다.

사람 둘은 피곤하여 드러누웠다. 개운하게 자고 일어난 고양이들이 어둠 속에서 뛰어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이 달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2016년 10월 21일 금요일

서교동에서 연주를 했다.


친구들과의 블루스 팀 공연은 드문 드문 계속 하고 있다.
금요일 저녁에 서교동의 클럽에서 블루스 공연을 했다.
연주를 하고 있는 시간은 즐겁기 때문에 언제나 짧게 느껴진다.

금요일 서교동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건물 사이에서, 자동차의 바닥에서 길고양이들이 사람들의 발을 피하며 다니고 있었다.
어디에나 음악 소리가 들렸다.
해가 저물면 불빛들이 거리를 밝혔다.

연주를 마치고 혼잡한 도로를 빠져 나오면서 아무도 부르지 않을 노래와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2016년 10월 3일 월요일

산꼭대기에서 연주를 했다.


신불산 간월재에서 연주를 하고 왔다.
리허설을 하기 위해 하루, 공연을 하기 위해 하루를 보내고 왔다.
억새가 가득한 아름다운 능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산악 자전거들도 많이 보였다.


이곳은 5년 전에 인공시설물을 설치하는 것을 두고 반대의 의견이 많았던 장소였다.
능선에 올라가 보니 이미 매점과 휴게소와 전망을 볼 수 있는 데크가 다 지어져 있었다.
당시 시민단체가 반대했던 이유가 기억 났다. 아름다운 능선이 인공 시설물들로 망가질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나는 그 주장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산꼭대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공연을 구경하는 일은 근사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을 사업으로 삼아 아름다운 능선의 고요와 스산한 바람소리를 어지럽혀야 할 이유는 없다. 구조물들이 없었고 등산객이 적었던 시절의 간월재는 지금의 모습 보다 더 아름다왔을 것이다. 나는 직업을 핑계로 그곳에서 잔뜩 소음을 내어버리고 온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탓은 아니지 않느냐고 하기에는 가슴 속이 떳떳하지 못했다.
이런 것은 하지 않을 수록 좋다. 지역 발전을 위한 사업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선 철학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아마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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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3일 토요일

파주에서 공연을 했다.


파주에서 공연을 했다.
포크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하고 있는 행사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전에도 연주하러 왔던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탁 트인 넓은 장소였다.
리허설을 할 때에 사진을 찍었다.
행사장에서 반가운 옛 동료들, 언제나 지나가며 인사하고 지내는 연주인들을 만났다.
덥고 습했던 탓이었는지 몸이 쉽게 지쳤다.
집에 돌아오는 길이 멀게 느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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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8일 금요일

블루스 연주


낙성대에 있는 클럽에서 J-Brothers와 연주를 했다.


덥고 눅눅한 날씨였다.
관객이 가득했다면 분위기가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덥고 더 습했겠지.
연주를 마치고 강변북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비릿한 강바람이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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