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30일 수요일

형님 한 분이 돌아가셨다.


좋은 형님 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소식을 듣고 자세한 이야기를 몇 번이나 확인도 했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나고 자꾸 욕이 새어나왔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헤어질때에는 내 건강이 좋지 않았던 때여서, 손을 잡아주며 다음에 얼굴 볼 때엔 반드시 팔팔해져 있어야 한다, 라고 하셨었다.
그냥 마음이 답답하고 자꾸 화가 났다.
그날의 공연이 그 분의 마지막 연주였다는 것도 안타깝다. 자꾸만 그날 밤의 그 북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명복을 빕니다, 라고 말하고 나서는, 동생을 잃은 분의 심정을 헤아려보게 되었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좋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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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28일 월요일

손으로.


평소엔 학생들에게 컴퓨터로 악보를 출력하여 나눠준다. 그런데 컴퓨터에서 만든 악보는 바보스러워서, 속도는 빠르고 힘이 덜 들지만 학생들에게 나눠준 뒤 설명하고 수정해주느라 바빴다.

학생들의 공연을 위해 몇 곡을 새로 편곡하여야 해서, 오선지를 쌓아두고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 곡에 쓰여질 악기별로 모든 악보를 손으로 그렸다. 내가 이것을 맨 처음 했었을 때가 생각났다. 오래전에 다음날 연주할 클럽에서 쓰일 곡 하나를 악기별로 한 장씩, 내딴엔 열심히 악보를 그려서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들고 갔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미처 리허설을 할 시간이 없었어서 그저 테이블에 앉아 고개를 뜨덕이며, 음, 여기에서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말이지? 어쩌구... 하면서 사람들과 의논만 했다. 그리고 무대에 올라갔을때에,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었다. 
내가 그려간 것이 얼마나 엉터리 악보였는지, 도저히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소음만 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동료들의 임기응변으로 곧 악보를 무시하고 눈치껏 곡을 끝낼 수 있었지만, 나는 창피하고 화도 나고 부끄러워서 죽고 싶었다. 그 다음날 기보법 책을 몇 권 사서 한참을 넘겨보며 공부했었다. 그래도 그날의 망신이 두려워서 한동안은 악보를 그려서 가지고 나갈 생각을 못했었다.

나처럼 음악교육을 받지 않은 연주자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실제 나의 rocker 친구들은 악보를 전혀 쓰지도 보지도 않으면서도 복잡하고 긴 여러 곡들의 전체를 다 암보하고 있다. 그들의 연주를 보면 즐거워지고 감탄하게 된다. 왜냐면 이미 악보라는 것에 의존하지 않으므로 연주하는 음악의 본 모양을 제대로 외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리와 기분에 훨씬 더 충실해질 수 있으므로 악보를 펴두고 연주하는 이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feeling이 있다.

나의 경우에도 악보는 시놉시스 정도의 개념일 뿐, 기본적으로는 음악을 외는 것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공연중에 악보를 읽으며 연주한다는 사람들을 불신하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악보에 충실해야하는 클래시컬 음악과 같이 광대하고 드넓은 음의 바다를 헤엄치는 것도 아니면서, 길어야 몇 분 되지 않는 곡들 조차 일일이 악보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험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좋아하는 음악, 몸담고 있는 밴드에서만 연주하며 지낸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직업연주자에게는 악보를 읽어내야만 하는 것이 생활이 된다.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방송 연주에 불려갔을때에 많이 당황했었다. 방송사에서 내민 악보에는 코드 네임이 없었다. 베이스의 음들을 전부 음표로만 그려놓은데다가 분명히 컴퓨터 따위로 출력했던 모양이어서, 네 줄의 베이스에서는 낼 수 없는 낮은 C음이 마구 찍혀 있었다. 부랴 부랴 리허설 도중 각 마디의 첫 음을 유추하여 대충의 코드를 그려놓고, 몰래 화장실에 가서 자세한 코드 네임을 또 그려놓았다. 그러나 방송 녹음이 시작되기 직전에 또 한 번 큰 낭패를 보았었다. 그 사이에 몇 가지가 수정되어서 새 악보를 나눠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나는 코드네임 없이 초견으로 연주해야했다. 그날의 연주는 TV에서도 방영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시청한 후 심각하게 자살을 고려할 뻔 했었다. 아무도 몰랐을지도 모르지만, 내 베이스 소리는 주눅이 잔뜩 든채로, 거의 모든 부분에서 틀리게 연주되어지고 있었다.

나이 많은 선배형님들에게 참 많은 것을 배웠다. 평생 연주해온 그 분들은 심지어 빈 오선지를 가져다놓고 둘러 앉아서, 각자의 맡은 부분을 의논하며 몇 개의 음표를 그려놓는 것 만으로도 리허설이 가능했다. 여러 분의 선배형님들과의 연주를 거치면서 나는 슬쩍 슬쩍 그분들의 악보를 얻어와서는 집에와서 열심히 베껴그리는 것을 수업으로 삼았다. 그런 덕분에 이제는 겨우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한 악보문맹 신세를 벗은 모양이 되었다.

학생들에게 줄 악보들을 그리면서도 나는 복잡해졌다. 악보가 연주될 음악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야 하기도 하고, 동시에 작곡/편곡자의 의도에 충실해야 할 의무도 말해줘야 한다. 그들중 대부분은 귀찮아하고 어려워한다. 귀에 의존하고 feeling에 따라야 한다면 뭐하러 이런 악보를 나눠주는거냐고 묻는 친구도 있고, 음표를 정확히 읽겠다고 어설픈 배우가 희곡을 읽는 것 처럼 바보같은 연주를 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개인이 알아서 해야할 부분을 항상 비워두며 그려주는데, 용케도 이것을 간파하는 학생들을 만날 때도 있다.

지난 해 마지막 달에, 친구가 프로듀스한 음반을 녹음하러 갔을때에 그가 나에게 보내준 악보들이 기억났다. 가장 친절하고 세심하게 그려진 악보였는데, 보내준 악보들을 보며 연습을 해서 녹음실에 갔다. 그런데 녹음을 시작하기 직전 내 친구가 넌지시 말해줬다. '알지? 악보는 됐고, 잘 알아서 만들어 쳐보라구.'
부담은 몇 배로 증가했지만, 듣기 좋은 요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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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고양이.


성격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선험적인 것일까.

꼬마 고양이를 데려온지 아직 석 달 열흘도 되지 않았는데, 그동안 꼬마 야옹이의 성격이 거의 형성되었나보다. 이들에게 한 달이란 우리의 한 달과 같지 않을테니 금세 부쩍 몸집이 커진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집안의 다른 어른 고양이들은 여전히 낯선 사람들이 방문하거나 하면 몸을 숨기고 조심스러워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데, 꼬마 고양이는 아예 뛰어나와 인사도 하고 놀아달라며 사람들 곁에 다가가 장난을 청하기도 한다. 집안의 네 마리의 고양이중 유일하게 손님 접대에 적극적이어서 우선은 걱정부터 된다. 고양이의 털을 싫어하는 분들이 대부분일테고,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을지도 모르겠고, 동물이 다가와 친근하게 구는 것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런 것인데, 꼬마 고양이는 모든 것에 아랑곳 없다.

약속없이 불쑥 방문했던 옛 친구들이 돌아갈 때까지 뛰고 구르며 그들 앞에서 장난을 치다가보니 피곤했었는지, 슬그머니 이불 속에 들어가 얼굴만 내밀고 졸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건강해졌고, 그나마 조금은 어른스러워지기도 했고, 언제나 즐거워하고 행복해한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식탐과 미친듯이 놀겠다는 강한 의지는 꺾이지 않을듯. 그래, 그렇게 잘 살아라, 꼬마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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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친구들이 찾아왔다.


밤중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오더니, 그들이 집에 방문했다. 나에게 내 집 근처로 올테니 밥을 먹으러 나오라길래 알았다고 대답한 뒤 옷을 입으려다가, 생각이 바뀌어 집으로 와서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내는 부랴 부랴 음식을 만들어줬고, 친구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마침 떨어지고 없었던 계란이며 뭔가들을 사왔다.

같은 날 낮에는 학생들중 한 명이 손을 다쳐서, 내가 침을 맞으러 가는 길에 두 명을 함께 태워 침 놓아주는 집에 데려갔었다. 그리고 함께 점심을 먹었다. 아직은 때묻을 구석이 때묻은 구석보다 많은 아이들이어서, 나는 그들끼리의 대화를 보며 문득 내 옛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마침 그날 밤에 중학시절 친구들이 찾아올줄이야.
반갑게 만나고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꼬마 고양이는 우리 집에 잘왔다며 낯선 남자들에게 같이 놀자고 엉겨붙어 있었다.

나는 학교를 한 해 일찍 들어가서, 내 친구들은 나보다 한 살씩 많다. 나는 늙어진 그들을 보고 깜짝 놀라는데, 제 나이 먹는 것은 모르고 남의 모습으로 세월을 가늠하는 꼴이다. 
나이가 들어도 어릴 적의 친구들이란 낮에 만났던 고교 아이들의 그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시시콜콜한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웃음지으면서도, 서로 다르게 지내온 이십여년의 세상 일들은 기억을 못하는 것일까. 나는 가끔씩 친구들을 만나면 같은 시절을 같은 나라에서 보내온 것이 맞던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들을 배웅하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해보니, 어쩐지 항상 나는 사람들과 깊게 어울리지 못했던 녀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시절 어느 친구들과도 조금씩은 물과 기름처럼 따로 부유하거나 가라앉는 태도로 살아올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의 격차를 줄여서 덜 외롭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그저 사람을 반가와하면서도 곧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성격인가 보다, 했다.
큰 수술을 받고 있는 녀석이 쉽게 건강해지면 좋겠고, 언제나 후덕하게 살아가는 친구가 그 넉넉함을 잃지 않고 늙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제 집에 들어가 문을 잠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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