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화요일
이탈리아 방식
2024년 6월 17일 월요일
ASVINE 만년필
만년필은 가볍고 예뻤으나, 중결링부터 캡의 윗쪽까지 세로로 날카로운 것에 긁혀서 난 흠집이 있었다. 품질관리를 잘 해줄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흠이 있는 물건을 받은 건 유쾌하지 않지만, 나는 이런 정도의 물건은 그냥 쓴다.
만년필은 예상했던대로 훌륭하다. 값이 싸서가 아니라, 잘 만들어진 펜이다. 가볍고 잘 써진다.
여섯배 쯤 더 비싼 펠리칸 펜과 나란히 놓아 보았다. ASVINE이라는 브랜드는 펜을 정말 잘 만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V126은 P20보다 더 부드럽게 잘 써지고 소재의 느낌도 더 좋다. 이런 브랜드가 좋은 재료를 써서 고급펜을 만든다고 해도 잘 만들 것 같다. 하지만 거기서부터는 베껴온 모양이 아니라 그들만의 생각과 디자인이 있어야 할 거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보니, 우리에게 좋은 국산 만년필이 없다는 게 많이 아쉬웠다.
2024년 5월 21일 화요일
이탈리안 펜
이탈리아 만년필을 처음 사보았다. 독일 펜들만 줄지어 놓인 맨 끝에 뚱뚱한 펜 한 자루가 함께 놓였다.
hard starting 이 심하여 신경이 쓰였는데, 내가 처음에 잉크를 제대로 넣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펠리칸 펜과 잉크 흡입구 위치가 달라서 닙을 더 깊이 잉크병에 담그어야 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사나흘 이 펜으로만 써보았다.
hard starting이라는 말보다, 펜을 쓰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우리말인 '헛발질'이 훨씬 느낌을 잘 전달한다는 생각을 했다.
2024년 3월 29일 금요일
실리콘 그리스
만년필 한 개가 피스톤이 뻑뻑해져서 실리콘 그리스를 샀다. 공기 비닐에 싸여 하루만에 도착했다. 지난 달에 저것을 사려고 동네 잡화점을 돌아다녔었는데 찾지 못했다. 결국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다.
문제가 생긴 펜은 작년에 중고로 샀던 M200 펜으로, 거래를 하고 펜을 집에 가져와서 보니 내부 상태가 아주 나빴었다. 아마 전주인이 한 번도 세척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피스톤을 힘주어 돌려야 겨우 움직였다. 점점 더 심해져서 이번에야 말로 그리스를 발라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닙파트를 분리하고 잘 세척하여 펜을 말린 후 배럴 깊숙이 그리스를 발라줬다. 이제 원래대로 피스톤은 부드럽게 작동하게 됐다. 만년필에 바르는 그리스 양은 아주 조금만 필요한데 내가 산 것은 85그램이나 되어 너무 양이 많다. 그리스를 다 쓰기 전에 아마 변질되어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나누어 덜어주고 싶지만, 주변에 피스톤필러 방식 만년필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24년 3월 7일 목요일
만년필
이틀 전 주문했던 올해 첫 스페셜 에디션인 M200 Orange Delight 펜이 도착했다. 2월에 발매한다는 소식을 읽었던 것이 1월 마지막 주 일이었다. 수입사에서 드디어 입고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열흘 전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펜상점 웹페이지를 몇 개 띄워놓고 수시로 리로드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화요일 오후, 펜가게에 상품이 올라오자마자 주문했다. 예상했던대로 색상이 밝고 촌스러우며 예뻤다. 만년필은 사진만으로는 그 아름다움이 잘 담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2024년 2월 24일 토요일
잉크 넣기
만년필들을 매일 고루 번갈아 쓰고 있으니까, 잉크를 새로 넣는 주기가 비슷하게 되었다. 배럴의 크기에 따라 M200 펜들이 매달 첫 주, M600 펜들은 40여일 정도에 한 번씩이다. 컨버터 방식의 펜들도 엇비슷하게 잉크를 넣는 주기가 겹친다.
아무리 귀찮아도 펜에 잉크를 넣을 때엔 물로 세척하고 펜을 물에 담그어 두었다가 잘 말리는 과정을 꼭 지킨다. 중고로 샀던 펜 한 개는 집에 가져온 다음 아주 오래 청소하고 닦아야 했었는데, 피스톤이 부드럽게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잘 세척하고 닦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머지 않아 펜을 분해하여 배럴 안에 실리콘 그리스를 발라야 할 것 같다.
전 주인이 그 펜을 평소에 잘 세척하기만 했어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유일하게 중고로 샀던 그 M200 을 겪은 뒤에 다른 잉크를 넣을 때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말끔하게 세척하고 잉크를 새로 담는다. 이틀 전엔 골든 베릴을, 오늘은 카페 크렘 만년필에 잉크를 넣었다.
2023년 8월 10일 목요일
잉크
2023년 7월 18일 화요일
새 만년필
새 만년필이 도착했다. 금요일 아침에 문자를 받고 미리 주문해뒀던 펜이다. 지난 달 말일에 국내에 발매되었다가 다음 날 아침이 되기도 전에 품절되었던 스페셜 에디션으로, 재입고가 될 때에 알려주기로 했던 분 덕분에 이번에 가까스로 살 수 있었다.
그동안 펠리칸에서 내놓았던 흰색 캡에 마블무늬 펜들을 구경하고 직접 만져보기도 했었지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이 펜을 쥐어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투명하게 속이 보이는 데몬 펜도 처음엔 끌리는 것이 없었다가 M205 Apatite를 사고 난 뒤에 마음이 변했었다. 내 취향은 견고하지도 않고 그 기준도 없는가 보다.
이제 나는 "앞으로 만년필을 더 사는 일이 없을 것" 따위의 말은 하지 못하겠다. 그런 말을 하면서 슬그머니 한 개씩 사버린 것이 열 자루가 되었다. 이번 M200 파스텔 블루 펜은 눈 깜짝할 사이에 거의 모든 곳에서 품절되어버렸기 때문에 살 수 없으면 뭐 할 수 없지, 하고 있었다. 지난 해에 한 번 거래했던 적 있는 곳에 그냥 한 번 구매시도를 했던 것인데, 그곳 사장님이 배려해주어 이 펜을 살 수 있었다. 올해에 사버린 두번째 만년필이다. 작년에 샀던 M200 Café Crème 펜을 손에 넣게 된 것도 우연이 겹쳐 운 좋게 새것을 구입했었다. 그 펜은 독일에서 발송한다더니 정말 오래 기다린 끝에 도착했다. 겨우 잉크를 넣어 글씨를 쓰는 도구일 뿐인데 내가 이렇게까지 하며 소비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2023년 5월 18일 목요일
만년필 수리
지난 주에 펠리칸 펜을 쥐고 있는데 손가락 사이로 잉크가 흘러내렸다. 배럴에 틈이 벌어져 잉크가 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한동안 펜을 계속 닦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여 잉크를 빼내고 펜을 씻은 다음 한참 들여다 보았다.
내가 펜을 노려본다고 뭐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한번 더 만년필을 잘 닦고 보증서가 들어있는 포장상자를 꺼냈다. 수입사에 수리를 맡기는 일을 작년에 해보았기 때문에 당황하거나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다. 수리센터로 만년필을 발송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연락을 받았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펜을 수리하기 전에 담당직원이 전화를 해주고 어떻게 수리할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 정도의 배려만으로도 수리를 부탁하는 쪽에서는 안심이 되고 신뢰감도 생긴다. 보증기간이 남아있기 때문에 정책에 따라 수리비는 무상이었다.
담당자는 배럴이 깨어져 있으므로 교체를 할 것이라면서 펜이 심한 압력을 받았나봐요, 밟혔다거나, 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고 가능한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지만 어쩐지 내 목소리에 섭섭해하는 심정이 담겨서 입 밖으로 나왔다. 그분은 배럴이 깨어진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듯, 곧 말을 이어갔다. 배럴을 새것으로 교체할텐데, 준비되어 있는 부품은 새로 나온 모델 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새 모델이라면 내가 작년에 사서 가지고 있는 M605 펜처럼 불투명한 배럴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잠깐 고민해야 했다. 펜을 들어 빛에 비추었을 때 배럴의 줄무늬 사이로 잉크레벨을 볼 수 있는 것이 이 펜의 특징이며 장점이었다. 불투명한 펠리칸 펜으로 변해버릴 수 있다고는 예상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잠시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아무 서두를 일이 없어 보이는 편안한 음성으로, 그 담당자가 다시 묻고 있었다. 이 배럴로 교체해도 될까요. 나는 그렇게 해주세요, 라고 말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래서 완벽하게 불투명한 배럴로 바뀐 펠리칸 만년필이 돌아왔다. 불투명한 펜을 써본 적 없었다면 많이 어색하고 낯설어할 뻔했다. 어쩐지 더 견고해진 느낌이지 않아, 라고 나 혼자 위로하는 최면을 거는 중이다. 이 만년필만 두번이나 수리를 받았다. 이제 아무 말썽 없으면 좋겠다.
.
2023년 1월 11일 수요일
잉크
새로 잉크 두 병과 공책 몇 권을 샀다.
카랜다쉬 잉크를 넣어 쓰고 있던 펠리칸 펜에 Diamine Eau De Nil 잉크를 넣었다. 나일 강의 물이라니, 색상의 이름들은 다 근사하다. 새 잉크의 색이 만년필 색깔과 거의 똑같이 보였다. Diamine 잉크를 처음 사보았는데 과연 좋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미 두루 검증되었고 오랜 세월 인기가 있는 잉크는 사면서도 잘 모르고 정보가 부족한 잉크는 구입하기 꺼려하는 이유는 모험심이 없거나 권위에 기대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까.
새로 넣은 잉크가 펜과도 잘 어울리고 종이 위에 그어지는 기분도 좋아서 만족스럽다. 사실 잉크의 차이를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일년 전만 해도 내 일상에 없던 일이었다.
디아민 Diamine 잉크는 원래 발음대로 하자면 '다이어민'이 될텐데 우리나라에선 '디아민'이라고 부른다. 유튜브 영상 중에 어떤 미국인은 '다이어마인'이라고 읽고 있었다. 그 단어가 만들어진 유래를 알면 원래의 영어 발음인 '다이어민'이 가장 납득할 수 있는 읽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지만 디아민이라고 쓰고 읽는 것이 어쩐지 예쁘게 들리기도 하고, 그 철자를 연상하기도 편하여 좋다고 생각했다. 미국인의 '다이어마인'은 그들 나름대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더 편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소리가 통일되지 않고 이름이 여기 저기에서 다르게 불리워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여러 가지로 불리워지고 있어도 가리키는 것은 하나라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다.
2022년 12월 16일 금요일
새 펜, 올해의 마지막 펜
2022년 9월 23일 금요일
청주에서 잤다.
2022년 7월 19일 화요일
강릉, 강문, 초당동
집을 떠나 호텔에서 하루 머무는 일정이 정해졌을 때 당연히 공책과 펜을 가지고 가기로 마음 먹었다. 숙소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가져가지 않았더라면 후회할 뻔 했다.
장거리 운전과 긴 리허설 때문에 피곤했었는데도 호텔 방 안의 책상에서 글을 쓸 때 눈이 아프지 않았다. 책상용 스탠드 조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내 방에서는 밝게 불을 켜놓아도 그림자가 생기고, 한 두 장 종이를 채우면 눈물이 나며 눈이 따갑고 아프다. 밝기와 빛의 색이 괜찮은 조명 한 개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방에서 내다 보이던 풍경은 넓은 논이었고 해송들이 군데 군데 모여 앉아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곳에서 그 소나무들을 보아왔는데, 언제나 흐트러진 차림으로 기대거나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강릉이라면 바다 보다도 늘 소나무들이 좋았었다.
지금은 잘 포장된 도로가 길게 늘어져 있어서 옛날의 해변 모습은 아니지만 나는 그곳을 한 여름에 맨발로 걸어다니기도 했었다. 바다에서 나와서 대충 샤워장 물을 끼얹고, 젖은 옷과 몸 그대로 호수를 끼고 돌아 걸으면 한 여름 볕과 바닷가 바람에 어느새 옷이 바짝 말라 있었다. 높은 방에서 창 밖을 내려다 보다가, 대충 육십여년 전에 저 길을 걷고 있었을 내 아버지를 한 번 상상해 보았다.
2022년 7월 4일 월요일
Souverän M605 Tortoiseshell Black.
무려 5월 말에 해외 필기구점에서 주문했던 만년필이 도착했다. 값을 치른지 한 달 하고도 엿새 만이다.
올해의 'Special Edition' 으로,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잉크를 넣고 써보니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만족스럽다.
이 펜을 손에 쥐고있게 되기까지 사연이 많았다. 이쪽으로는 물정을 모르던 나로서는 생소한 경험들을 하기도 했다. 그 이야기들은 길지만 남들에게는 하찮은 일이어서 한번 죽 써보았다가 지웠다. 가지고 싶어했던 펜을 잇달아 두 자루나 샀고, 그것으로 앞에 있던 과정들의 피로는 사라졌다.
이 펜이 나오면서 펠리칸 만년필 매니아들이 입을 모아 배럴이 불투명하게 바뀐 것을 꾸짖기도 했다. 직접 만져보니 그들의 불평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백여년 동안 지속되었던 반투명한 잉크 뷰 챔버는 사라졌다. 피스톤 필러 방식의 펜이기 때문에 잉크를 넣을 때 제대로 충분히 잉크를 담았는지, 사용 중에는 잉크가 얼마나 남아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졌다.
그런데 사람은 적응하기 마련이니까 나에게는 그게 대수로운 일은 아닌 느낌이다. 펜을 오래 쓰다보면 미세한 중량의 차이를 느낄 수 있게 되어 아마 잉크가 바닥나기 전에 새로 채우거나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쓸모 없는 상상도 해보았다.
성능도 좋고 보기도 참 좋다. 택배를 받은 직후 나는 아내에게 미리 준비해둔 긴 변명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아내는 끝까지 들어주는 대신 '이제 새 잉크도 사기 시작하겠군.'이라고 했다.
.
2022년 6월 29일 수요일
M200 Café Crème
2022년 6월 19일 일요일
22, Seoul Pen Show
'펜 쇼'에 처음 다녀왔다. 나는 잠을 안 자고 커피 석 잔을 마신 후에 아내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갔다. 행사가 열리는 충무아트센터에서 오래 전에 공연을 했었기 때문에 그곳에 주차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요일 낮 지하철은 쾌적했다.
행사 장소는 넓지도 좁지도 앉은 홀이었는데 오전부터 이미 사람으로 가득했다. 문 밖에서 보이는 것은 온통 사람들, 펜 보다 사람의 숫자가 더 많아 보였다. 성황이었다. 펠리칸 펜들을 잔뜩 진열하고 계셨던 분이 최고였다. 나는 그 앞에 세 번이나 가서 제일 오래 머물렀다. 사람들이 가득하여 비좁았기 때문에 마냥 그 자리에 눌러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몇 개 집어들고 잉크를 찍어 써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잘 참았다. 종이에 몇 줄 선이라도 긋기 시작했다면 분명히 한 개 정도는 사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처음 가보는 행사였어서 더 그랬겠지만 나는 아주 재미있게 구경했다. 아내는 연필깎이를 샀다. 나는 아무 것도 사지 않은 나를 속으로 칭찬했다. 그대신 그동안 사진으로 보았던 펜들을 직접 보며 조금 더 공부해 볼 수 있었다. 가을에 다시 행사가 열릴 때엔 얼마 정도 돈을 챙겨서 갈지도 모르겠다.
행사장 길 건너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왔다. 허리에는 통증이 심하고 졸음이 쏟아져서 힘들었는데도, 오랜만에 걸어다니며 사람 많은 곳을 경험했더니 기분이 좋아졌다. 다녀오길 잘 했다. 혼자였다면 또 귀찮아하며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꺼이 함께 동행해준 아내에게 고마와했다.
.
2022년 4월 18일 월요일
글 모음
이번 생일에 아내가 만년필을 선물해줬다. 부담없고 가벼운데 품질도 좋다. 이 달에는 이 펜으로 많이 썼다.
펜으로 써둔 것이 늘어나고 있어서 공책의 글들을 텍스트 파일로 저장해 보려고 방법을 찾아보았다. 아이폰 카메라에 비춰진 손글씨를 인식하여 번역할 수 있으니 손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스캔하거나 촬영한 이미지 파일을 구글에서 열면 가능했다. 필기한 글씨를 인식하는 정확도도 훌륭했다. 너무 알아볼 수 없게 흘려 쓰지 않는다면 손글씨를 텍스트 파일로 바꾸어 저장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PDF 파일로도 바꿀 수 있는데, PDF 문서에서도 단어별로 검색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더 생각해보니 매일 써둔 글들은 이미 너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일일이 촬영하거나 스캔하여 잘못 인식된 글자를 고쳐서 분류하고 저장하는 것은 좀 바보같은 짓 같았다. 시간을 많이 빼앗길 것이고 그러느니 처음부터 컴퓨터로 쓰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와 공책은 공책대로, 블로그에 담아둘 것이나 생기면 컴퓨터로 쓰기로 했다. 뭐 대단한 기록이라고, 더 단순하게 살아도 부족하다.
2022년 3월 18일 금요일
버릇
안경을 쓰지 않고 글씨를 써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안경은 돋보기인데, 적당한 거리를 맞추기 어려워졌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지럽다. 내 시력의 문제는 단순한 노안 증상이기 때문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으면 안경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
요즘 읽고 있는 대부분의 책은 모두 전자책이다. 눈이 나빠진 뒤로는 종이책을 읽는 것을 더 어려워하고 있다. 종이의 색에 따라, 인쇄된 글자의 폰트, 서체에 따라 어떤 종이책은 눈을 더 피로하게 만든다. 아이패드로 책을 읽으면 밝기를 잘 맞추고 배경색과 서체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이 편하다. 다만 옛날처럼 옆으로 누워 좌우로 뒤척이며 책 한권을 다 읽어버리는 일은 이제 어렵다.
그동안 계속 안경을 쓰고 글씨를 썼더니 더 잘 보이게 하고싶어서 몸을 자꾸 낮춰 웅크리고 있었다. 허리의 통증도 줄여야 하고 손목도 자주 주물러 펴줘야 한다. 더 잘 읽고 보고 싶어서 눈을 찡그리는 것도 하지 않으려고 자주 의식해야 한다.
나이가 들었고, 몸은 변했다. 좋은 자세를 생각하며 스스로 버릇을 만드는 방법 밖에 없다.
2022년 2월 28일 월요일
만년필
만년필에 관련된 영상들이 재미있어서 매일 찾아보고 있었다. 어떤 도구, 어떤 취미이거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자기가 재미있어하는 것에 객관적이지 못하다. 그냥 그것이 좋고 그 일에 몰두하여 재미있으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할 것 같은데, 자신의 선택과 취향에 자꾸 비싼 값을 매기려고 한다. 다른 기준, 보편적인 동의, 억지로 쥐어 짜낸 급조된 철학 같은 것으로 장식해주지 않으면 자기의 취미가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버릴까봐 겁을 내는걸까. 나는 그런 모습들을 악기에서도 보았고 자전거를 탈 때에도 체험했다. 당연히 만년필의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모든 인간의 문화는 그렇게 과몰입하는 사람들의 쓸데 없는 짓들 덕분에 풍부해진다. 뭘 저렇게까지 하는가 싶은 사람들의 경험과 실패가 쌓여 그 분야의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한편 나는 갑자기 펜을 사느라 너무 돈을 썼다. 이쯤에서 멈춰야 좋겠다.
2022년 2월 20일 일요일
글씨
지금 나의 필체는 '93년 가을에 지금의 이 모양으로 바뀌었다.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에는 내 글씨가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
나는 '93년 여름에 군에 입대했다. 여섯 주 동안 훈련을 받고 무슨 영문인지 자동차에 실려 하루는 이쪽 부대로 다른 날에는 저쪽 부대로 실려다니다가, 바람이 선선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부대에 배치를 받았다.
나는 상황실, 나중에는 지휘통제실이라는 명칭으로 바뀐 부대 안 사무실에서 근무를 했다. 밤을 새우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야근을 하지 않는 날에는 지휘통제실을 밤새 지키는 근무를 했다. 아침부터 밤, 새벽까지 매일 빈 종이에 자와 볼펜으로 양식을 그리고 공문의 내용을 작성했다. 온갖 서류와 체크리스트에 싸인을 했다. 낮에는 종일 타자기로 문서를 만들고 지도를 그리거나 암호를 관리했다.
내가 제일 많이 했던 일은, 부대장과 상관 장교들의 지시내용을 간결하되 충분하게 요약하고, 문장을 잘 다듬어 문서로 만드는 것이었다. 제일 많이 받아서 책상 위에 일거리로 쌓아두고 있었던 것은 직속상관인 중령의 메모였다. 그는 뭔가 생각이 나면 연필이나 싸인펜으로 종이에 빼곡하게 내용을 적어 내려 보냈다. 그것을 하사관이나 장교들이 받아와서 말없이 내 앞에 '원고'를 놓고 가는 일도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부터는 중령이 사무실에 들어와 직접 나에게 메모 더미를 내밀며 '일'을 독촉했다.
그 시절에 그 중령의 갈기듯 빠르게 쓴 메모의 글씨가 나에게 전염되었다. 해야 할 일은 많고, 가능한 시간을 아껴 많은 것을 빨리 적어야 했다. 자음과 모음을 죽 이어서 속도감 있게 써내려가는 그 장교의 손글씨체는 효율적이었다. 다음 해 여름 무렵에는 내 글씨가 그의 글씨와 많이 닮아져 있었다. 다른 사무실의 동료가 수상한 문서를 들고 와서 나에게 상관의 싸인을 대신 해줄 수 없느냐고 말하여 난처했던 적도 있었다. (아마 말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군에서 복무했던 경험이 강했기 때문이었는지 그 뒤로 삼십여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지금 이 필체의 단점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전역을 한 후 몇달이 지났을 때에 우연히 찾아와 함께 커피를 마시던 군대 후배로부터 그 장교가 훈련 중 차량사고로 순직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참을성 있는 사람이었다. 나와 큰 인연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분의 명복을 빌었다.
나는 지금의 내 글씨를 교정하든지 하여 언젠가는 다른 필체로 바꾸고 싶다. 뭔가를 오래 끄적일 때마다 군대 시절 그 사무실의 퀘퀘한 냄새가 떠오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