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FountainPen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FountainPen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4년 3월 29일 금요일

실리콘 그리스

 

만년필 한 개가 피스톤이 뻑뻑해져서 실리콘 그리스를 샀다. 공기 비닐에 싸여 하루만에 도착했다. 지난 달에 저것을 사려고 동네 잡화점을 돌아다녔었는데 찾지 못했다. 결국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다.

문제가 생긴 펜은 작년에 중고로 샀던 M200 펜으로, 거래를 하고 펜을 집에 가져와서 보니 내부 상태가 아주 나빴었다. 아마 전 주인이 한 번도 세척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피스톤을 힘주어 돌려야 겨우 움직였다. 점점 더 심해져서 이번에야 말로 그리스를 발라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닙파트를 분리하고 잘 세척하여 펜을 말린 후 배럴 깊숙이 그리스를 발라줬다. 이제 원래대로 피스톤은 부드럽게 작동하게 됐다. 만년필에 바르는 그리스 양은 아주 조금만 필요한데 내가 산 것은 85그램이나 되어 너무 양이 많다. 그리스를 다 쓰기 전에 아마 변질되어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나누어 덜어주고 싶지만, 주변에 피스톤필러 방식 만년필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24년 3월 7일 목요일

만년필


 이틀 전 주문했던 올해 첫 스페셜 에디션인 M200 Orange Delight 펜이 도착했다. 2월에 발매한다는 소식을 읽었던 것이 1월 마지막 주 일이었다. 수입사에서 드디어 입고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열흘 전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펜상점 웹페이지를 몇 개 띄워놓고 수시로 리로드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화요일 오후, 펜가게에 상품이 올라오자마자 주문했다. 예상했던대로 색상이 밝고 촌스러우며 예뻤다. 만년필은 사진만으로는 그 아름다움이 잘 담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2024년 2월 24일 토요일

잉크 넣기


 만년필들을 매일 고루 번갈아 쓰고 있으니까, 잉크를 새로 넣는 주기가 비슷하게 되었다. 배럴의 크기에 따라 M200 펜들이 매달 첫 주, M600 펜들은 40여일 정도에 한 번씩이다. 컨버터 방식의 펜들도 엇비슷하게 잉크를 넣는 주기가 겹친다. 

아무리 귀찮아도 펜에 잉크를 넣을 때엔 물로 세척하고 펜을 물에 담그어 두었다가 잘 말리는 과정을 꼭 지킨다. 중고로 샀던 펜 한 개는 집에 가져온 다음 아주 오래 청소하고 닦아야 했었는데, 피스톤이 부드럽게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잘 세척하고 닦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머지 않아 펜을 분해하여 배럴 안에 실리콘 그리스를 발라야 할 것 같다.

전 주인이 그 펜을 평소에 잘 세척하기만 했어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유일하게 중고로 샀던 그 M200 을 겪은 뒤에 다른 잉크를 넣을 때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말끔하게 세척하고 잉크를 새로 담는다. 이틀 전엔 골든 베릴을, 오늘은 카페 크렘 만년필에 잉크를 넣었다.

2023년 8월 10일 목요일

잉크

 


만년필이 여러 개가 되었지만 쓰는 사람은 나 혼자이니까 잉크 소모가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일년 반 동안 62.5ml 펠리칸 잉크와 57ml 파커 잉크, 그리고 30ml 디플로마트 잉크를 다 비웠다. 아직 쓸 잉크는 많이 남아있지만 이렇게 빠르게 빈 잉크병들이 생길 줄은 몰랐다.


지난 달부터 펜에 잉크를 새로 담을 때마다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7월에만 열 한 번 잉크를 충전했고 이 달 들어서는 이미 일곱 번이나 만년필에 잉크를 새로 채웠다. 뭘 이렇게 많이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글씨는 비뚤고 글은 조잡한데. 남아있는 잉크로 내년까지 충분히 쓰겠지만 다음 해에 잉크가 몇 병 정도 남을지는 계산하기 어렵게 됐다.


펜으로 매일 글을 쓰는 것에 열중하는 사이에 내 홈페이지에 사진과 글을 올리는 양은 줄었다. 키보드를 두드려 글을 쓰는 것에 흥미를 잃은 것은 아닌데, 남이 읽어도 좋은 내용으로 글을 다듬는 것에 공들이지 않게 되어버린 것 같다. 몇 해 전만 해도 펜을 쥐고 매일 뭔가를 쓰고 있는 생활을 하게 될 줄 몰랐다.
다 쓰고 난 빈 잉크병들은 버리지 못하고 책상 위에 놓아뒀다. 비어버린 잉크병을 특별히 쓸 데가 없을텐데 그냥 먼지가 앉도록 놔두고 있다.



2023년 7월 18일 화요일

새 만년필


 새 만년필이 도착했다. 금요일 아침에 문자를 받고 미리 주문해뒀던 펜이다. 지난 달 말일에 국내에 발매되었다가 다음 날 아침이 되기도 전에 품절되었던 스페셜 에디션으로, 재입고가 될 때에 알려주기로 했던 분 덕분에 이번에 가까스로 살 수 있었다.

그동안 펠리칸에서 내놓았던 흰색 캡에 마블무늬 펜들을 구경하고 직접 만져보기도 했었지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이 펜을 쥐어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투명하게 속이 보이는 데몬 펜도 처음엔 끌리는 것이 없었다가 M205 Apatite를 사고 난 뒤에 마음이 변했었다. 내 취향은 견고하지도 않고 그 기준도 없는가 보다.


이제 나는 "앞으로 만년필을 더 사는 일이 없을 것" 따위의 말은 하지 못하겠다. 그런 말을 하면서 슬그머니 한 개씩 사버린 것이 열 자루가 되었다. 이번 M200 파스텔 블루 펜은 눈 깜짝할 사이에 거의 모든 곳에서 품절되어버렸기 때문에 살 수 없으면 뭐 할 수 없지, 하고 있었다. 지난 해에 한 번 거래했던 적 있는 곳에 그냥 한 번 구매시도를 했던 것인데, 그곳 사장님이 배려해주어 이 펜을 살 수 있었다. 올해에 사버린 두번째 만년필이다. 작년에 샀던 M200 Café Crème 펜을 손에 넣게 된 것도 우연이 겹쳐 운 좋게 새것을 구입했었다. 그 펜은 독일에서 발송한다더니 정말 오래 기다린 끝에 도착했다. 겨우 잉크를 넣어 글씨를 쓰는 도구일 뿐인데 내가 이렇게까지 하며 소비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2023년 5월 18일 목요일

만년필 수리

 

지난 주에 펠리칸 펜을 쥐고 있는데 손가락 사이로 잉크가 흘러내렸다. 배럴에 틈이 벌어져 잉크가 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한동안 펜을 계속 닦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여 잉크를 빼내고 펜을 씻은 다음 한참 들여다 보았다.

내가 펜을 노려본다고 뭐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한번 더 만년필을 잘 닦고 보증서가 들어있는 포장상자를 꺼냈다. 수입사에 수리를 맡기는 일을 작년에 해보았기 때문에 당황하거나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다. 수리센터로 만년필을 발송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연락을 받았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펜을 수리하기 전에 담당직원이 전화를 해주고 어떻게 수리할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 정도의 배려만으로도 수리를 부탁하는 쪽에서는 안심이 되고 신뢰감도 생긴다. 보증기간이 남아있기 때문에 정책에 따라 수리비는 무상이었다.

담당자는 배럴이 깨어져 있으므로 교체를 할 것이라면서 펜이 심한 압력을 받았나봐요, 밟혔다거나, 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고 가능한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지만 어쩐지 내 목소리에 섭섭해하는 심정이 담겨서 입 밖으로 나왔다. 그분은 배럴이 깨어진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듯, 곧 말을 이어갔다. 배럴을 새것으로 교체할텐데, 준비되어 있는 부품은 새로 나온 모델 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새 모델이라면 내가 작년에 사서 가지고 있는 M605 펜처럼 불투명한 배럴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잠깐 고민해야 했다. 펜을 들어 빛에 비추었을 때 배럴의 줄무늬 사이로 잉크레벨을 볼 수 있는 것이 이 펜의 특징이며 장점이었다. 불투명한 펠리칸 펜으로 변해버릴 수 있다고는 예상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잠시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아무 서두를 일이 없어 보이는 편안한 음성으로, 그 담당자가 다시 묻고 있었다. 이 배럴로 교체해도 될까요. 나는 그렇게 해주세요, 라고 말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래서 완벽하게 불투명한 배럴로 바뀐 펠리칸 만년필이 돌아왔다. 불투명한 펜을 써본 적 없었다면 많이 어색하고 낯설어할 뻔했다. 어쩐지 더 견고해진 느낌이지 않아, 라고 나 혼자 위로하는 최면을 거는 중이다. 이 만년필만 두번이나 수리를 받았다. 이제 아무 말썽 없으면 좋겠다.

.

2023년 1월 11일 수요일

잉크

 

새로 잉크 두 병과 공책 몇 권을 샀다.

카랜다쉬 잉크를 넣어 쓰고 있던 펠리칸 펜에 Diamine Eau De Nil 잉크를 넣었다. 나일 강의 물이라니, 색상의 이름들은 다 근사하다. 새 잉크의 색이 만년필 색깔과 거의 똑같이 보였다. Diamine 잉크를 처음 사보았는데 과연 좋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미 두루 검증되었고 오랜 세월 인기가 있는 잉크는 사면서도 잘 모르고 정보가 부족한 잉크는 구입하기 꺼려하는 이유는 모험심이 없거나 권위에 기대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까.

새로 넣은 잉크가 펜과도 잘 어울리고 종이 위에 그어지는 기분도 좋아서 만족스럽다. 사실 잉크의 차이를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일년 전만 해도 내 일상에 없던 일이었다.

디아민 Diamine 잉크는 원래 발음대로 하자면 '다이어민'이 될텐데 우리나라에선 '디아민'이라고 부른다. 유튜브 영상 중에 어떤 미국인은 '다이어마인'이라고 읽고 있었다. 그 단어가 만들어진 유래를 알면 원래의 영어 발음인 '다이어민'이 가장 납득할 수 있는 읽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지만 디아민이라고 쓰고 읽는 것이 어쩐지 예쁘게 들리기도 하고, 그 철자를 연상하기도 편하여 좋다고 생각했다. 미국인의 '다이어마인'은 그들 나름대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더 편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소리가 통일되지 않고 이름이 여기 저기에서 다르게 불리워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여러 가지로 불리워지고 있어도 가리키는 것은 하나라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다.



2022년 12월 16일 금요일

새 펜, 올해의 마지막 펜

 


스테인레스 닙 펠리칸을 한 개 더 사고 싶어서 그동안 몇 번 거래를 시도했었다. 사고 싶은 색상은 품절이었고 간혹 중고로 M200이 나오긴 했지만 내가 원하는 닙 사이즈가 아니었다. 당근마켓에서 드디어 한 개 거래할 수 있게 되어 약속을 하고 나갔더니, 펜에 판매자의 이름이 각인되어있던 적도 있었다. 한 개 더 있으면 좋겠다는 이유로 해외에서 주문을 하기엔 반 년 사이에 환율이 너무 나빠져 있었다. 이미 만년필은 여러 개 있으니까 급한 일도 아니어서 가을 쯤 부터는 검색해보는 일도 그만 두고 있었다.
수요일 아침에 펜가게에서 알림 문자가 왔다. 이게 웬일, 모르는 사이에 펠리칸 한정판 M205가 새로 나왔다는 것이다. 새벽에 월드컵 경기들을 보느라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서둘러 주문을 했다. 내가 원하는 F닙만 남아있었고 다른 닙들은 이미 품절이었다.
헐레벌떡 주문, 결제를 마치고 나서야 조금 느긋하게 방금 내가 산 것이 어떤 모델인지 살펴봤다. 이미 구월에 펠리칸에서 발표를 했고 유명한 분들이 소개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발매는 지난 달에 시작, 이제서야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 내가 만년필에 관련된 기사들을 찾아 읽어보지 않은 것이 대략 여름이 지날 무렵부터였구나.
펜을 쥐고 불빛에 이리저리 비추어보았다. 나는 데몬스트레이터 모델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직접 내 손으로 만져보고 나서야 이것이 매력이 있는 모델이라는 것을 알았다. 투명하게 속이 비치는 모델은 처음엔 판매 영업사원이 펜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판매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보았던 것이었는데, 지금은 여러 색상으로 스페셜 버젼이 나와있다.
이 펜은 에델슈타인 잉크에 맞춰 색상을 정한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Caran D'Ache Blue Alpin 잉크를 넣어보았다. 신기할 정도로 잉크와 펜의 색상이 서로 잘 어울려서 재미있어했다.
올해의 마지막 펜이다. 진짜 더는 안 사려고 하는데, 장담하진 못한다.





2022년 9월 23일 금요일

청주에서 잤다.

 


공연 하루 전날 청주로 가서 하루를 잤다.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도로가 오래 정체되어 중평 톨게이트를 통해 빠져나와 깜깜한 국도를 달렸다. 숙소 부근 빵집을 찾아 급하게 먹을 것과 커피를 사고, 호텔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방에 들어가 TV를 켰다. 축구 국가대표 친선경기가 이제 막 시작하고 있었다.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전반전이 진행되는 동안 먹고, 보온병에 담아 아직도 뜨거웠던 커피는 손흥민 선수가 프리킥을 찼을 때에 마셨다. 경기는 재미있었지만, 그 종편 채널을 이용해야만 하는 것이 거북했다. 축구 중계가 끝나자마자 텔레비젼은 끄고, 아이패드로 음악을 틀었다.



생각해둔 것을 글로 옮기는 것에 한계를 느껴서 틈나는대로 아이폰의 노트 앱에 메모를 해두고, 여전히 그중에 여전히 쓸 것이 있으면 쓰기 시작하기로 하고 있다. 메모는 넘치고 숙소의 통나무 의자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어서 수시로 일어나 몸을 움직여야 했다.
잠시 일어난 김에 유튜브에서 음악 라이브 영상을 고르다가 Rodney Jones가 판데믹 기간 동안에 연주했던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쿼텟에서 피아노를 맡고 있던 류다빈 씨라는 피아니스트를 알게 됐다. 그는 매우 좋은 연주를 하고 있었다. 로드니 존스의 연주를 일부러 들어본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구글의 인공지능 덕분에 가끔 행운처럼 건져지는 것들이 있다.
영상을 보는 바람에 한 시간을 그대로 지나보내고 결국은 아주 늦게 잠들었다. 이래서야 공연 하루 전에 힘들여 운전하여 온 보람이 없는 것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래도 토요일에 시계를 보며 초조해하면서 공연장으로 달려가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2022년 7월 19일 화요일

강릉, 강문, 초당동


 집을 떠나 호텔에서 하루 머무는 일정이 정해졌을 때 당연히 공책과 펜을 가지고 가기로 마음 먹었다. 숙소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가져가지 않았더라면 후회할 뻔 했다.

장거리 운전과 긴 리허설 때문에 피곤했었는데도 호텔 방 안의 책상에서 글을 쓸 때 눈이 아프지 않았다. 책상용 스탠드 조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내 방에서는 밝게 불을 켜놓아도 그림자가 생기고, 한 두 장 종이를 채우면 눈물이 나며 눈이 따갑고 아프다. 밝기와 빛의 색이 괜찮은 조명 한 개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방에서 내다 보이던 풍경은 넓은 논이었고 해송들이 군데 군데 모여 앉아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곳에서 그 소나무들을 보아왔는데, 언제나 흐트러진 차림으로 기대거나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강릉이라면 바다 보다도 늘 소나무들이 좋았었다.

지금은 잘 포장된 도로가 길게 늘어져 있어서 옛날의 해변 모습은 아니지만 나는 그곳을 한 여름에 맨발로 걸어다니기도 했었다. 바다에서 나와서 대충 샤워장 물을 끼얹고, 젖은 옷과 몸 그대로 호수를 끼고 돌아 걸으면 한 여름 볕과 바닷가 바람에 어느새 옷이 바짝 말라 있었다. 높은 방에서 창 밖을 내려다 보다가, 대충 육십여년 전에 저 길을 걷고 있었을 내 아버지를 한 번 상상해 보았다.




2022년 7월 4일 월요일

Souverän M605 Tortoiseshell Black.

 


무려 5월 말에 해외 필기구점에서 주문했던 만년필이 도착했다. 값을 치른지 한 달 하고도 엿새 만이다.

올해의 'Special Edition' 으로,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잉크를 넣고 써보니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만족스럽다.

이 펜을 손에 쥐고있게 되기까지 사연이 많았다. 이쪽으로는 물정을 모르던 나로서는 생소한 경험들을 하기도 했다. 그 이야기들은 길지만 남들에게는 하찮은 일이어서 한번 죽 써보았다가 지웠다. 가지고 싶어했던 펜을 잇달아 두 자루나 샀고, 그것으로 앞에 있던 과정들의 피로는 사라졌다.

이 펜이 나오면서 펠리칸 만년필 매니아들이 입을 모아 배럴이 불투명하게 바뀐 것을 꾸짖기도 했다. 직접 만져보니 그들의 불평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백여년 동안 지속되었던 반투명한 잉크 뷰 챔버는 사라졌다. 피스톤 필러 방식의 펜이기 때문에 잉크를 넣을 때 제대로 충분히 잉크를 담았는지, 사용 중에는 잉크가 얼마나 남아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졌다.

그런데 사람은 적응하기 마련이니까 나에게는 그게 대수로운 일은 아닌 느낌이다. 펜을 오래 쓰다보면 미세한 중량의 차이를 느낄 수 있게 되어 아마 잉크가 바닥나기 전에 새로 채우거나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쓸모 없는 상상도 해보았다. 

성능도 좋고 보기도 참 좋다. 택배를 받은 직후 나는 아내에게 미리 준비해둔 긴 변명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아내는 끝까지 들어주는 대신 '이제 새 잉크도 사기 시작하겠군.'이라고 했다.


.

2022년 6월 29일 수요일

M200 Café Crème

 


갖고 싶었던 펠리칸 카페 크렘이 도착했다. 주문한지 열흘 만에 왔다. 나는 그것이 더 오래 걸릴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 펜은 7년 전에 출시되었던 한정판으로 지금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 M200 을 산다면 이 모델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구할 수가 없었다. 트위터에서 보았던 글에서는 작년 까지도 일본의 펜가게에서는 팔고 있었다고 했는데 내 검색 능력으로는 찾지 못했다. 이베이에는 중고 물건이 어쩌다 한 번 올라오기도 했지만 원하는 닙 사이즈가 아니거나 너무 낡아버린 것들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값을 비싸게 매겨 놓았다.
지난 주 월요일 새벽에 우연하게 새 제품으로 이 펜을 파는 곳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주문 결제가 끝나 있었다. 어떤 검색어를 거쳐 발견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디에도 모두 품절이라는데 왜 그곳에만 새 제품이 있었는지도 여전히 모르겠다. 아무튼 독일과 홍콩을 거쳐 온다고 하길래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고 있었고 어제 인천에 도착하여 택배 송장번호로 조회가 가능해졌었다. 그러더니 단숨에 배송. 우리나라, 빠르다.

펜은 많은 사람들의 리뷰 그대로 보기 좋고 쓰기 편하다. 캡을 포스팅 했을 때의 균형감도 좋고 스틸 닙이 미끄러지는 것도 유려하다. 색상도 디자인도 마음에 쏙 들었다. 잉크창과 피스톤 필러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엔트리 모델 라인으로 나온 제품이 이제는 구하기 힘들어 너무 비싼 값이 되어버렸다. 펠리칸은 스페셜 에디션이라고 했지 리미티드 에디션이라고 했던 적은 없으므로 언젠가 다시 만들어 주려나 하고 기대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적은 없었다. 손에 들어온 새 펜을 만지작 거리며 만일 이것이 언제든지 구입하기 쉬운 펜이었다면 내가 그렇게 홀린 듯 사버렸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만년필이고 뭐고 역시 중독에 약한 사람에겐 좀 치명적이구나.


.

2022년 6월 19일 일요일

22, Seoul Pen Show


'펜 쇼'에 처음 다녀왔다. 나는 잠을 안 자고 커피 석 잔을 마신 후에 아내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갔다. 행사가 열리는 충무아트센터에서 오래 전에 공연을 했었기 때문에 그곳에 주차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요일 낮 지하철은 쾌적했다.

행사 장소는 넓지도 좁지도 앉은 홀이었는데 오전부터 이미 사람으로 가득했다. 문 밖에서 보이는 것은 온통 사람들, 펜 보다 사람의 숫자가 더 많아 보였다. 성황이었다. 펠리칸 펜들을 잔뜩 진열하고 계셨던 분이 최고였다. 나는 그 앞에 세 번이나 가서 제일 오래 머물렀다. 사람들이 가득하여 비좁았기 때문에 마냥 그 자리에 눌러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몇 개 집어들고 잉크를 찍어 써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잘 참았다. 종이에 몇 줄 선이라도 긋기 시작했다면 분명히 한 개 정도는 사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처음 가보는 행사였어서 더 그랬겠지만 나는 아주 재미있게 구경했다. 아내는 연필깎이를 샀다. 나는 아무 것도 사지 않은 나를 속으로 칭찬했다. 그대신 그동안 사진으로 보았던 펜들을 직접 보며 조금 더 공부해 볼 수 있었다. 가을에 다시 행사가 열릴 때엔 얼마 정도 돈을 챙겨서 갈지도 모르겠다.

행사장 길 건너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왔다. 허리에는 통증이 심하고 졸음이 쏟아져서 힘들었는데도, 오랜만에 걸어다니며 사람 많은 곳을 경험했더니 기분이 좋아졌다. 다녀오길 잘 했다. 혼자였다면 또 귀찮아하며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꺼이 함께 동행해준 아내에게 고마와했다.


.

2022년 4월 18일 월요일

글 모음

 


이번 생일에 아내가 만년필을 선물해줬다. 부담없고 가벼운데 품질도 좋다. 이 달에는 이 펜으로 많이 썼다.

펜으로 써둔 것이 늘어나고 있어서 공책의 글들을 텍스트 파일로 저장해 보려고 방법을 찾아보았다. 아이폰 카메라에 비춰진 손글씨를 인식하여 번역할 수 있으니 손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스캔하거나 촬영한 이미지 파일을 구글에서 열면 가능했다. 필기한 글씨를 인식하는 정확도도 훌륭했다. 너무 알아볼 수 없게 흘려 쓰지 않는다면 손글씨를 텍스트 파일로 바꾸어 저장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PDF 파일로도 바꿀 수 있는데, PDF 문서에서도 단어별로 검색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더 생각해보니 매일 써둔 글들은 이미 너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일일이 촬영하거나 스캔하여 잘못 인식된 글자를 고쳐서 분류하고 저장하는 것은 좀 바보같은 짓 같았다. 시간을 많이 빼앗길 것이고 그러느니 처음부터 컴퓨터로 쓰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와 공책은 공책대로, 블로그에 담아둘 것이나 생기면 컴퓨터로 쓰기로 했다. 뭐 대단한 기록이라고, 더 단순하게 살아도 부족하다.



2022년 3월 18일 금요일

버릇

 


안경을 쓰지 않고 글씨를 써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안경은 돋보기인데, 적당한 거리를 맞추기 어려워졌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지럽다. 내 시력의 문제는 단순한 노안 증상이기 때문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으면 안경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

요즘 읽고 있는 대부분의 책은 모두 전자책이다. 눈이 나빠진 뒤로는 종이책을 읽는 것을 더 어려워하고 있다. 종이의 색에 따라, 인쇄된 글자의 폰트, 서체에 따라 어떤 종이책은 눈을 더 피로하게 만든다. 아이패드로 책을 읽으면 밝기를 잘 맞추고 배경색과 서체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이 편하다. 다만 옛날처럼 옆으로 누워 좌우로 뒤척이며 책 한권을 다 읽어버리는 일은 이제 어렵다.

그동안 계속 안경을 쓰고 글씨를 썼더니 더 잘 보이게 하고싶어서 몸을 자꾸 낮춰 웅크리고 있었다. 허리의 통증도 줄여야 하고 손목도 자주 주물러 펴줘야 한다. 더 잘 읽고 보고 싶어서 눈을 찡그리는 것도 하지 않으려고 자주 의식해야 한다.

나이가 들었고, 몸은 변했다. 좋은 자세를 생각하며 스스로 버릇을 만드는 방법 밖에 없다.

2022년 2월 28일 월요일

만년필

 



나는 손끝이 약하다. 악기를 연주할 때 걸핏하면 검지손가락의 손톱이 들려버리거나 손가락 끝을 다친다. 그런데 겨우 펜을 쥐고 글씨를 쓰다가 손끝이 다칠 줄은 몰랐다. 굳은살이 있어도 이 모양이다.

만년필에 관련된 영상들이 재미있어서 매일 찾아보고 있었다. 어떤 도구, 어떤 취미이거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자기가 재미있어하는 것에 객관적이지 못하다. 그냥 그것이 좋고 그 일에 몰두하여 재미있으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할 것 같은데, 자신의 선택과 취향에 자꾸 비싼 값을 매기려고 한다. 다른 기준, 보편적인 동의, 억지로 쥐어 짜낸 급조된 철학 같은 것으로 장식해주지 않으면 자기의 취미가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버릴까봐 겁을 내는걸까. 나는 그런 모습들을 악기에서도 보았고 자전거를 탈 때에도 체험했다. 당연히 만년필의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모든 인간의 문화는 그렇게 과몰입하는 사람들의 쓸데 없는 짓들 덕분에 풍부해진다. 뭘 저렇게까지 하는가 싶은 사람들의 경험과 실패가 쌓여 그 분야의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한편 나는 갑자기 펜을 사느라 너무 돈을 썼다. 이쯤에서 멈춰야 좋겠다.



2022년 2월 20일 일요일

글씨

 


지금 나의 필체는 '93년 가을에 지금의 이 모양으로 바뀌었다.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에는 내 글씨가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


나는 '93년 여름에 군에 입대했다. 여섯 주 동안 훈련을 받고 무슨 영문인지 자동차에 실려 하루는 이쪽 부대로 다른 날에는 저쪽 부대로 실려다니다가, 바람이 선선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부대에 배치를 받았다.

나는 상황실, 나중에는 지휘통제실이라는 명칭으로 바뀐 부대 안 사무실에서 근무를 했다. 밤을 새우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야근을 하지 않는 날에는 지휘통제실을 밤새 지키는 근무를 했다. 아침부터 밤, 새벽까지 매일 빈 종이에 자와 볼펜으로 양식을 그리고 공문의 내용을 작성했다. 온갖 서류와 체크리스트에 싸인을 했다. 낮에는 종일 타자기로 문서를 만들고 지도를 그리거나 암호를 관리했다.

내가 제일 많이 했던 일은, 부대장과 상관 장교들의 지시내용을 간결하되 충분하게 요약하고, 문장을 잘 다듬어 문서로 만드는 것이었다. 제일 많이 받아서 책상 위에 일거리로 쌓아두고 있었던 것은 직속상관인 중령의 메모였다. 그는 뭔가 생각이 나면 연필이나 싸인펜으로 종이에 빼곡하게 내용을 적어 내려 보냈다. 그것을 하사관이나 장교들이 받아와서 말없이 내 앞에 '원고'를 놓고 가는 일도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부터는 중령이 사무실에 들어와 직접 나에게 메모 더미를 내밀며 '일'을 독촉했다.

그 시절에 그 중령의 갈기듯 빠르게 쓴 메모의 글씨가 나에게 전염되었다. 해야 할 일은 많고, 가능한 시간을 아껴 많은 것을 빨리 적어야 했다. 자음과 모음을 죽 이어서 속도감 있게 써내려가는 그 장교의 손글씨체는 효율적이었다. 다음 해 여름 무렵에는 내 글씨가 그의 글씨와 많이 닮아져 있었다. 다른 사무실의 동료가 수상한 문서를 들고 와서 나에게 상관의 싸인을 대신 해줄 수 없느냐고 말하여 난처했던 적도 있었다. (아마 말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군에서 복무했던 경험이 강했기 때문이었는지 그 뒤로 삼십여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지금 이 필체의 단점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전역을 한 후 몇달이 지났을 때에 우연히 찾아와 함께 커피를 마시던 군대 후배로부터 그 장교가 훈련 중 차량사고로 순직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참을성 있는 사람이었다. 나와 큰 인연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분의 명복을 빌었다.


나는 지금의 내 글씨를 교정하든지 하여 언젠가는 다른 필체로 바꾸고 싶다. 뭔가를 오래 끄적일 때마다 군대 시절 그 사무실의 퀘퀘한 냄새가 떠오르곤 한다.


 

2022년 1월 26일 수요일

손으로 쓰기


 사용하던 일기장 앱은 이제 없어졌고, (관련내용) 제 날짜에 배송받았던 공책에 일기를 쓰고 있다. 오랜만에 손으로 글씨를 많이 쓰고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 하루 이틀은 손으로 쓰는 것보다 타이핑을 하는 것이 더 편하다며 불평도 했었다. 지금은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며 뭔가 더 쓰고싶어지기도 하고 있다. 손가락으로 펜을 쥐어잡고 쓰고 그리는 행위가 만족감을 준다. 가지고 다니던 메모장에 적는 글씨의 모양도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