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8일 목요일

만년필 수리

 

지난 주에 펠리칸 펜을 쥐고 있는데 손가락 사이로 잉크가 흘러내렸다. 배럴에 틈이 벌어져 잉크가 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한동안 펜을 계속 닦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여 잉크를 빼내고 펜을 씻은 다음 한참 들여다 보았다.

내가 펜을 노려본다고 뭐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한번 더 만년필을 잘 닦고 보증서가 들어있는 포장상자를 꺼냈다. 수입사에 수리를 맡기는 일을 작년에 해보았기 때문에 당황하거나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다. 수리센터로 만년필을 발송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연락을 받았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펜을 수리하기 전에 담당직원이 전화를 해주고 어떻게 수리할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 정도의 배려만으로도 수리를 부탁하는 쪽에서는 안심이 되고 신뢰감도 생긴다. 보증기간이 남아있기 때문에 정책에 따라 수리비는 무상이었다.

담당자는 배럴이 깨어져 있으므로 교체를 할 것이라면서 펜이 심한 압력을 받았나봐요, 밟혔다거나, 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고 가능한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지만 어쩐지 내 목소리에 섭섭해하는 심정이 담겨서 입 밖으로 나왔다. 그분은 배럴이 깨어진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듯, 곧 말을 이어갔다. 배럴을 새것으로 교체할텐데, 준비되어 있는 부품은 새로 나온 모델 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새 모델이라면 내가 작년에 사서 가지고 있는 M605 펜처럼 불투명한 배럴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잠깐 고민해야 했다. 펜을 들어 빛에 비추었을 때 배럴의 줄무늬 사이로 잉크레벨을 볼 수 있는 것이 이 펜의 특징이며 장점이었다. 불투명한 펠리칸 펜으로 변해버릴 수 있다고는 예상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잠시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아무 서두를 일이 없어 보이는 편안한 음성으로, 그 담당자가 다시 묻고 있었다. 이 배럴로 교체해도 될까요. 나는 그렇게 해주세요, 라고 말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래서 완벽하게 불투명한 배럴로 바뀐 펠리칸 만년필이 돌아왔다. 불투명한 펜을 써본 적 없었다면 많이 어색하고 낯설어할 뻔했다. 어쩐지 더 견고해진 느낌이지 않아, 라고 나 혼자 위로하는 최면을 거는 중이다. 이 만년필만 두번이나 수리를 받았다. 이제 아무 말썽 없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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