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25일 화요일

연주자의 시작.


기타리스트 경천 형님과 긴 얘기를 나눴던 적이 있었다.
술은 없이, 커피만 마시며.

"그때 동네의 중국인이 그만 의처증이 생겨서, 젋고 예쁜 아내를 간수하지 못하겠던지... 어느날 갑자기 마누라를 데리고 대만으로 가버렸지. 그때까지 나는 드럼을 쳐보겠다고 맨날 북을 두드리다가 그 중국인이 버리고 간 전기기타를 처음 만져보게 되었던 거야. 그게 시작이었지 뭐. 무슨 음악적인 계기 같은 것은 없었지."

그의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이 잘 연결되지 않았지만, 편집이 덜 끝난 영화를 보는 듯 흥미진진했다. 경천 형님은 지금도 연습을 많이 하신다. 불 꺼진 어두운 무대 위에서 그 분 혼자 연습하는 것을 구경한 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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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20일 목요일

Jaco.


맨 처음 그의 음악을 들었던 것은 아주 오래 전 어느 봄날, 나른한 기운이 가득했던 오후였다.
그 목요일 오후에 나는 처음 그의 연주를 들었던 것이다.
그 후 십여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는 음반들 중 그의 연주가 담겨있는 것이라고는 팻 메스니의 첫 앨범 뿐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자면 맨 처음 그의 음악을 듣게 되었을 때에 나는 레코드점으로 달려가 그의 음반들을 사왔어야 좋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의로 그의 음악을 듣지 않으려 했었다.

80년대 이후 많은 베이스 연주자들의 연주를 듣다가 보면 어느 특정한 시기에 그들 모두가 비슷한 습관을 지니게 된 것처럼 비슷한 프레이즈를 써먹고 있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있었다.

앤소니 잭슨의 말이 생각난다.

"자코 이후의 수 많은 베이스 연주자들은, 미안하지만 나를 포함하여, 모두 자코의 클론이라고 여겨진다. 이제 누가 그의 벽을 깨고 넘을 수 있을까?"

최근에 와서야 나는 그의 시디를 모아놓고 열심히 듣고 있게 되었다.
이제는 자코보다 더 뛰어난 테크닉을 지닌 베이스 연주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그래봤자 모두 다 비슷 비슷하다. 자코의 위대함은 단지 베이스줄을 튕기는 것에 있지 않다. 그가 작곡한 곡들을 진지하게 들어보아야 한다. 실제로 나도 모르게 공손한 자세를 하고 음악을 들었던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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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3일 월요일

음악.

어린시절에 빠져들었던 음악들은 나머지 평생 동안 좋아하게 되는 것일까.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금지곡들도 많았었고, 금지곡이 아니라고 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음반들이 많았던 시절, 음반 한 장을 위해 작전을 세우고 조사를 하고 음반가게를 뒤지며 듣고 싶은 음악들을 찾아다녔던 기억이 많다.

그때의 음악들을 이제는 손바닥만한 시디로 손쉽게 구해 듣고, 수천 곡을 하드디스크에 담아 들을 수 있다. 휴일이라면 종일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음악만 들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사정이 좋아졌다고 하여도, 열악한 오디오 기기를 껴안고 처음으로 체험하는 모든 소리들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다는 듯 몰입할 수 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음악을 한다며 돌아다니다보면 자주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을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한 번 만나면 두 번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고, 나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신경질이 나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있다.

그러나, 절대로 용서가 되지 않던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도 가끔씩은 마음 한쪽이 흐뭇해질 때도 있다.
그들도 어느 시절의 어느 순간들을, '빽판'을 껴안고 보물같은 음악에 빠져서 보냈던 기억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좋고 나쁜 사람이란 없는 것 같고, 그냥 모두 다 친구같을 때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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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24일 화요일

나는 날건달인가.

몇 주 전보다는 조금 시간이 나서 읽고 쓰며 보낼 수 있는 것이 좋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는 있다.
나는 자신의 일에는 신중하지 못하면서 남의 잘못과 허물 앞에서 너무 가혹할 때가 있다.
반드시 한 마디씩 던져줘야 직성이 풀린다.
부당한 것을 견디지 못한다.
사실은 그것이 부당한 것인지 당연한 것인지를 남이 판단하도록 하기 싫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사람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도 마지못해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불행하게도 최근 나에게 그런 일은 바로 연주하는 일이었다.

뭔가 잘못 된 것 같지만, 그냥 하루씩 출근하면 돈이 모아지는 그 편안한 일을, 시작한지 일주일 만에 그만뒀다.
그것은 음악도 뭣도 아닌 똥같은 일이었다.
엉터리같은 사람에게 휘둘려 부당함을 참으며 버틸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
고작 그런 일을 하고 싶어서 내가 주변 사람들을 신경쓰게 하고 내가 고생을 자처하며 지금까지 음악을 하려고 애썼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손익을 따지지 않는 경우에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말 한 마디 정도로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있다. 가증스럽다고 해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돼먹지 않은 일, 돼먹지 않은 사람 앞에서 입에 발린 아첨과 맹목적인 순종을 할 수가 없다. 손익을 계산하며 처신하는 것이 제일 싫다.

팀의 리더에게 새 베이스 연주자를 구하라고 했지만, 그쪽에서도 사정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결국 자신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인지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이미 그만두겠다고 통보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 저녁에는 내쪽에서 독촉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남자가 만일 나를 해고하는 입장이었다면 아마도 나에게 잔혹하게 굴었을 것이었다.
내가 그만두겠다고 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난감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새해엔 내가 조금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
나쁜 일을 겪는 이유는 우선 내가 못났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쁜 놈이 나쁜 이유는 당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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