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4일 월요일

기운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서야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지난 주 수요일에 경주에서 공연을 했다. 리허설을 마친 후에 나는 그날의 공연이 모두 순조로울 것으로 생각했다. 무대는 잘 준비되어 있었다. 친숙한 음향 팀은 완벽하게 소리를 만들어줬다. 전부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첫 곡을 시작할 때 부터 내 악기에서 예상하지 못한 소리가 나왔다. 아주 거칠고 메마른 소리였다. 나는 그것이 악기의 탓인지 앰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모니터 스피커는 리허설을 할 때 보다 음량이 커져있었는데, 그것 역시 정말로 음량이 세어진 것인지 아니면 리허설 때에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악기의 줄을 건드릴 때 마다 신경이 쓰였다. 나는 위축되어서 악기의 볼륨 노브를 돌려보기도 하고 모든 이펙터를 꺼보기도 했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순서에 따라 악기를 바꿨을 때에도 몹시 당황했다. 갑자기 소리가 작아졌고 원하는 음색을 낼 수 없었다. 여전히 무엇이 원인인지도 나는 파악할 수 없었다. 가능한 연주 도중에 앰프나 이펙터의 노브에 손을 대는 것을 삼가려 했는데, 그 날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연주하는데에 편안한 소리를 내보려고 애썼지만 하나도 제대로 되어지지 않았다.
그럭 저럭 공연을 마치고, 나는 대기실로 돌아가는 대신 공연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잠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나, 내가 너무 안일했던 것인가, 공연 직전에 손톱을 한 번 더 다듬었어야 좋았을까, 아니면 멤버들과 저녁을 먹을 때에 나 혼자 끼니를 거르지 않았어야 옳았나.

다른 사람들이 다 떠난 뒤에, 나는 힘이 빠진 채로 느릿 느릿 악기를 챙겨 차에 싣고 심야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뭔가 일을 바르게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졸립지도 않았다.

그 다음 날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했다. 수업과 수업 사이에, 나는 계속 전날의 공연을 떠올리며 기초적인 연습을 다시 해봤다. 여전히 기분이 가라앉고 있지만 어쩌다 잘 되어지지 않는 날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하여 일을 망쳤다고 여겨질 때에, 나는 심하게 자책을 하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뛰어나지도 완벽하지도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긴 습관일 것이다. 엉뚱한 생각이 들어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았던 악기들을 검색하여 자세히 살펴보기도 했다. 나를 탓하기 싫으니 악기 탓을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지나고 보면, 내가 나를 책망하는 것이 나중의 일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주말 동안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계속 연습을 했다. 연습이 지나간 일을 보상해주지는 않지만, 비슷한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줄여주기는 할 것이다.

돌아오는 주말에 다른 공연이 기다리고 있다. 그 공연을 아주 잘 해내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다.


.

2019년 10월 29일 화요일

밤중에 경주에.


낮에 고민하다가, 공연 하루 전에 미리 경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공연을 마치고, 그 다음 날에는 여주에 가서 수업을 해야 한다. 지난 주 대구에 다녀왔을 때에도 무척 피곤하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장거리 운전을 하고 밤 열 시를 넘길 공연을 마친 후 다시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 보다는 하루 전에 공연장 근처에 도착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매니저님에게 전화를 걸어 이 내용을 말하고, 해가 저문 후에 느긋하게 출발하려고 하고 있었다. 오후 늦게 매니저님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내가 머물 숙소를 예약해 주셨다고 했다. 나는 내가 편할 때에 출발하여 내가 머물 곳을 알아서 잡아 하루 자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감사 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 운전을 시작했다.

밤 열한 시 직전에 한옥집의 외양을 흉내 낸 이상한 여관에 도착하였다. 어떻게 말해도 호텔이라고 해줄 수는 없는 곳이었다. 오랜만에 요를 깔고 바닥에 누워본다. 집에서 하던 일들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어폰을 잘 못 가져오는 바람에 에어팟을 사용해야 했다.
그런데 역시 의자가 아니어서 몸 여기 저기가 무척 아팠다. 나는 아직도 양손이 저리고 허리와 목과 어깨에 통증이 있다.

내일 공연으로 바빴던 한 달이 지나간다.
오늘은 여유를 부리며 깊이 잠들 수 있으면 좋겠다.



.

2019년 10월 24일 목요일

대구에서.


대구에서 공연했다.
보통의 공연에 비하면 절반 정도 분량이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달렸다. 내 차에는 멤버 분들의 악기가 실려있었다. 그들은 KTX를 타고 가기로 했고, 나는 직접 운전을 하여 가고 있었다. 중부내륙 고속도로에서 큰 정체를 겪었다. 약 한 시간 남짓 손해를 보았다. 알고 보니 큰 사고가 있었다. 사고 현장에서 구급차가 막 떠난 것으로 보였다. 나는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조바심이 났지만,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악기가 내 차에 실려 있으니 사고라도 나면 오늘 공연은 망치는 것 아닐까 하였다. 올해 들어 나는 자주 과속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약속 시간에 정확히 도착하여 짧은 리허설을 하고, 공연을 마쳤다.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엔 느긋한 마음으로 밤길을 달렸다.


.

2019년 10월 22일 화요일

잠깐 가을.


오랜만에 이틀 동안 쉴 수 있었다. 어제와 오늘 동네에 있는 한의원에 다시 찾아가 치료를 받고 침을 맞고 있다. 다시 팔과 손이 저린 증상이 시작되었다가 그것이 심해져 손 끝에 감각이 없어진 정도가 되었었다. 토요일 인천 공연은 왼손에 감각이 없어서 지판을 자주 쳐다봐야 했다.

침을 맞고 진료를 받는다고 쉽게 낫지는 않는다. 그래도 시간을 낼 수 있을 때에 몸을 관리라도 해보려는 것이다. 그 덕분에 동네 어귀를 느릿 느릿 걸으며 가을 하늘을 올려다 보고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집 앞에 나무들은 잎의 색도 바꾸고 빨간 열매를 맺기도 하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어느 감나무 앞에 서서 탐스럽게 매달린 감을 올려다 보았다. 더러는 새들이 쪼아 먹기도 했지만 예쁜 색을 띠고 가지 끝에 주렁 주렁 달린 감들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오랜 기간 힘든 일들을 겪어 왔다. 아직 아무 것도 더 나아지지는 않았다. 모처럼 쉴 수 있었던 이틀 동안 밤중에 갑자기 전화를 받고 응급실에 가거나 걱정을 가득 안고 도로를 달리는 일은 없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내일 부터 다시 합주를 하고 공연을 하러 먼 길을 다녀오고 밴드 일정 때문에 미루어야 했던 수업 준비도 더 공들여 해야 한다. 몸이 저절로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치료를 받으러 다니겠다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