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3일 토요일

기다려주는 고양이.


내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비교적 일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고양이 순이가 매일 밤 같은 시간에 현관 앞에 앉아서 나를 기다린다고, 어느날 아내가 말해줬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고양이가 그럴리가''라고 생각했다. 현관 밖에서 나는 무슨 소리를 들었다거나 그런 것이겠지, 라고 여기고 말았다. 그런데 그 다음 날에도, 또 다음에도 아내가 같은 말을 했다. 자고 있거나 놀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현관 앞에 앉아 한참을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가끔 내가 시간을 넘겨 늦게 들어온다거나 할 때엔 기다리다가 '에이, 안오나보다'라고 단념하는듯 돌아서서 다시 잠을 자러 가거나 한다고 했다.

혹시 아내가 나를 제 시간에 꼬박꼬박 들어오게 만들기 위해 지어낸 픽션인 것일까, 라고 생각하고 또 넘기려고 했는데... 결국 순이가 기다려주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줬다.

정말이었던걸까. 어쩌다가 무심코 '그 녀석은 왜 집에 안오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일 수 있겠지만, 괜히 사진을 보고 미안해졌다. 혼자 집을 보고 있을 때에도 순이는 저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적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일 때문에 아주 늦도록 귀가하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고양이이니까 사람이 없으면 알아서 잘 놀던가 잠이나 푹 자고 있겠지, 생각했었다. 미안했다.

집에 돌아오면 현관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나와 인사를 하는 고양이 순이. 항상 한 발 늦게 느릿느릿 나와서 몸을 부비는 흰둥이 꼬맹이, 기지개를 펴고 한 바퀴 뒹굴면서 눈인사를 건네는 언니 고양이 에기까지... 유유자적, 편안하고 재밌게 잘 지내자고 한 마리씩 다가가 말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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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일 목요일

Green Room


그린룸이라는 말의 기원은 이것 저것 추측되는 것이 많은데, 그 의견들이 다 그럴 듯하다.
어쨌든 그 의미는 출연자들이 분장실로 돌아갈 필요가 없이 잠시 휴식을 하거나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기 위해 머물 수 있도록 준비되어있는 방을 말한다.
그러니 '출연자 대기실'이라고 되어있는 우리말 이름(사실은 한자이름)이 적절하다. 물론 'Green' 색상으로 방을 꾸며둘 필요는 없다. 사진은 지난 주에 갔었던 방송사의 대기실이었다.

전에는 제법 돈들여 지어놓은 어느 지역 공연장의 무대 뒤에서 그린룸, 화이트룸, 오렌지룸 등이 적힌 방문들을 보았었다. 그리고 우리말로 각각 '분장실'이라고만 되어있었다. 그저 몇 개의 분장실을 구분하기 위해 적어둔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화이트룸은 잭 부르스가 만들고 에릭 클랩튼과 진저 베이커가 함께 연주했던 크림의 노래였다.
나는 이 노래만 들으면 경천 형님의 와우와우 소리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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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고양이의 삶.


지난 겨울, 베이스를 배우고 있는 학생 은지가 침착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새끼 고양이의 상태가 아무래도 심각하다는 것이었던가, 침착하지만 빠른 말투였다. 어쨌든 그런 내용이었다.
그의 친구 한 사람이 아주 작은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겠다고 해놓고서는, '여건상' 못 기르겠다며 은지에게 떠맡겼던 모양이었다. 몇 번 그 이야기를 들었고, 하루 정도 집에 맡아준 적도 있었다. 그중 한 마리는 너무 허약하고 힘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다.

결국 나와 아내는 깊은 밤중에 어린 학생과 그보다 한참 더 어린 고양이를 태우고 심야 동물병원으로 달려갔었다. 피검사를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던 새끼 고양이의 검사 결과는 생각보다 더 위중했었고, 살려내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무턱대고 데려와서 책임없이 남에게 떠맡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수의사의 설명을 들은 은지는 우리에게 고양이의 치료를 위해 동물병원에 입원시키고 싶다고 말했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단호한 음성이었고, 아내는 내가 의견을 묻기 위해 얼굴을 쳐다보자 이내 나를 계산대로 떠밀었었다. 졸지에 카드로 고양이의 입원비가 계산되어버렸다. 지출이 많았어서 조금 빠듯한 때였지만, 뭐 어떻게 되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너무 가느다란 발 끝에 큰 주사를 꽂은채로, 힘없는 눈빛의 새끼 고양이는 우리를 바라보며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틀 후에 새끼 고양이가 퇴원을 했고, 큰 고비는 넘겼으니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고양이를 입원시킨 다음 날에 나는 레슨을 마치고 은지에게, 돈 따위는 신경쓰지 않아도 좋으니 병원비 걱정말고 고양이를 잘 살려내렴, 이라고 말했었다. 그러자 학생은, "계산해주셨던 병원비를 드리려고 지금 가져왔는걸요"라고 하며 손에 쥔 것을 내밀었다. 주머니 속에 반으로 접혀있던 지폐에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어느날 내가 없는 사이에 은지가 고양이를 데리고 집에 방문했었다고 했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고양이가 팔팔해져서, 잠시도 쉬지 않고 장난하고 뛰어다니던 통에 촛점이 맞은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다고 했다. 비실거리던 눈빛은 반짝거리고 배는 잘 먹어서 빵빵해져있었다고 들었다. 두 여자는 오후 내내 고양이와 장난치며 보냈던 모양이었다. 아내는 그 사이 새끼 고양이를 모델삼아 인형을 한 개 만들어두었었다. 나란히 찍어둔 사진을 보니 우습다. 한참 지난 사진을 이제야 구경하면서 기분좋아하고 있었다. 이제 아프지 말고 재미있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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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하고 싶은 고양이.

먹고 자고 장난치느라 하루가 모자른 고양이 녀석.
정말 쉼 없이 놀고싶어한다.
불쌍한 인형 고양이 한 마리는 바닥에 기절해있었다.
아내가 만들어준 인형을 고양이 꼼은 물고 던지고 짓밟다가 가끔 머리를 베고 잠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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