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10일 토요일

조금 쉬어야겠다.


하고 있던 밴드를 그만뒀더니 직장을 잃은 것이냐고 누가 물어보았다.
내가 하는 일이 차라리 그런 것이었다면 나는 불의를 정말 잘 참는 사람이 되었거나 아니면 일찌감치 조직으로부터 버림 받았을지도 모른다.
실직한 것은 아니므로 여전히 다른 밴드, 다른 사람들과 연주를 하고 있다.
혼자서도 계속 뭔가를 하고 있다. 그동안 써뒀던 음악 중 한 곡을 다음 주 일요일에 결혼을 하는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했다. 결혼식에서 그 곡을 연주해주려고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알고 지내는 연주자들이 모두 바쁘다는 것이다. 일이 있어서 바쁘다는데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야하니까 절대로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일은 이제 질렸다. 아무래도 밴드의 멤버를 구할 때에는 '무신론자 우대' 같은 조건이 필요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남았는데 연주할 친구들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지 걱정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빈둥거릴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많이 자고 자주 먹었다.
몸을 편하게 하고 긴장을 풀었더니 저절로 빠르게 게을러졌다.

고양이 순이는 그동안 무척 심심했었던 것 같다.
내가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까 고양이가 많이 좋아한다.
까불고 장난을 치고, 사료도 많이 먹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 어깨 위로 뛰어내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냥 내버려뒀으면 고양이가 알아서 어깨에 매달렸을 것을 도와준답시고 손을 내밀었다가 그만 가구의 모서리에 손등을 다쳤다. 외상은 없는데 혈관이 지나는 부분이 계속 부어오르고 있는 중이다. 많이 아프다. 주먹을 쥐기가 힘들다.
그래도 고양이가 다치지 않아서 나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순이는 어쩐지 나를 비웃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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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8일 목요일

고양이 소리.


새벽에 약간의 취기가 남아있었다.
조금 덜 마시면 덜 마신대로 더 마시면 과한대로 컨디션이 나쁘다.
오랜만에 시간이 많이 남아서, 깊은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러나 습관이 무섭다. 오늘도 날이 밝도록 잠을 못 잤다.

이웃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책상 위의 구석진 곳에 앰프를 두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구입한 코러스에서 나는 소리인지, 계속 그르릉거리는 잡음이 들려왔다.
이펙터를 꺼보기도 하고 케이블도 확인했다. 앰프의 노브들을 살펴봤는데 이상이 없었다.
계속 악기소리의 사이 사이에 뭔가가 계속 그르릉 그르릉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앰프 뒤에서 고양이 순이가 부시시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순이가 구석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었다.
잠이 깨지 않은 고양이가 몸을 더 일으키지 않은채 장난을 걸어왔다.
나는 사진을 한 장 찍어뒀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결국 순이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유통기한이 다 되어버린 커피냄새, 방치해둔 빨래들, 빈 그릇이 가득한 설거지통들... 날이 밝으면 집안 꼴이 더 잘 보일 것 같아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 덮고 잠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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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6일 화요일

절이 싫으면 떠나는 것.

새벽에 눈보라를 뚫고 얼어붙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면서 내가 고민했던 것은 더 참을 것인지 아닌지가 아니었다.
명분, 실리라는 것은 사람들이 제 입맛에 맞도록 만들어내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 것은 계산에 넣을 수도 없었다.
나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위대한 일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짓은 아니기를 원했다. 그것이 생각의 시작이었다.
지난 주말 공연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나는 노력했다.
며칠 동안 시간을 들이고 밥을 굶고 비용을 썼다.
집에 돌아와 낯선 앰프의 매뉴얼을 읽고 스무 곡 남짓 악보를 완벽히 외느라 오래 집중했다.
실수할 가능성이 있는 부분은 체크하여 필기해뒀다.
공연장에 있는 메인콘솔을 카메라에 담아와서 세세한 모양을 익혔다.
엔지니어에게 공연시 내가 원하는 사운드에 대해 말하고 의견을 구했다.
일주일도 되지 않았던 베이스 줄을 새것으로 교환했다. 그리고, 리더 때문에 속상해있는 다른 멤버들을 챙기느라 애썼다.

그 결과 공연의 질은 매우 좋았다.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다.
나는 나 혼자만의 시험을 잘 치렀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밴드의 리더가 투자한 것에 비하면 가격대비 최상의 공연이었다.
며칠 후 돌아온 것은 터무니없는 액수의 연주료와 비상식적인 변명이었다.
그는 함께 연주하는 사람들을 폄하했다. 그의 언어에 치졸한 욕심이 드러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떳떳하지 못할 때에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
겁을 내면서도 잔인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그래서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겨우 나와 같은 연주자가 그 밴드를 그만두는 일이 그렇게 심각한 것이었나.
꼬리를 물고 걸려오는 동료들의 전화와 질문들에 당황스러웠다.
회유도 있고 걱정해주는 말도 있었다. 동조하거나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몇 사람들에게 급박한 전화들이 걸려온 모양이었다. 순조로울 수도 있었던 다음 공연들이 위태롭게 되었던 것이었을까. 벌써부터 들려오는 협박과 비난의 단어들. 내가 매장될지도 모른다는 공갈.
어리석은 행동은 몇 번의 반복만으로 악행이 된다.

내가 남에게 어떻게 살아야 옳은가를 말해준다는 것은 시건방진 일이다.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 아니냐와 같은 말도 하면 안 된다.
그런데 그런 말을 나 자신에게는 매일 해야만 한다.
조금 숨을 돌리고, 충전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지금은 좋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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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1일 목요일

이상했던 날이었다.

1. 잠을 자다가 꿈에서 무엇인가가 몹시 우스워 자다말고 누운채로 크게 웃어버렸다.
내 웃음소리에 내가 놀라서 그만 잠을 깨었다.
잠을 깬 것과 동시에 무엇이 우스웠던 것이었는지 잊고 말았다.
기억해내려 애써보다가 다시 잠을 잤다.
혼자 몇 년 지내다 보니 언제나 강박증이 있다.
알람이 울리기 5분 전에 나는 늘 깨어난다.

2. 시간에 쫓길 하루일 것을 예상했다. 평소보다 준비물을 많이 챙겨서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만 양말을 신지 않은채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마 나는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3. 잠이 덜 깬채로 오후 한 시에 강변을 달리고 있었다. 바깥은 싸늘한데 자동차 안은 밝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늘 어둠 속을 달리다가 모처럼 너무 밝은 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4. 첫번째 약속장소에서 사람을 기다렸다. 어쩐지 담배를 피우고 싶지 않았다. 이것도 이상하다면 이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때, 갑자기 한 아이가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미끄러져 다가오더니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모습이 예뻐 보였다. 유난히 인상 깊었다.

5. 평소같으면 전혀 연주할 일이 없었을 곡을, 전혀 그 곡을 연주할 것 같지 않았던 사람과 갑자기 공연 리허설에서 연습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곡이었어서, 나는 그 곡을 외고 있었다. 연주하는 동안에 마치 그것이 언젠가 겪었던 일 처럼 여겨졌다. 강한 기시감이었다.

6. 특별히 나쁘게 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화가 났다거나 짜증이 났다거나 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한밤중에 다른 공연이 끝난 후, 자신을 인도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인사를 청해온 남자가 있었다. 손을 내밀길래 악수를 받아줬다. 그러자 그는 숨 쉴 틈도 없이 계속 시타르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 악기의 재질과 역사와 인도에서의 문화적인 가치를 설명하고 있었다. 몇 분은 참고 듣다가 너무 피곤하여 견딜 수 없었다. 이놈도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종일 이상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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