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4일 일요일

새벽에 고양이와

 



원주 공연에 액티브 베이스와 패시브 베이스를 모두 가져가기로 하고 미리 가방에 악기를 넣어두었다. 공연장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벽에 갑자기 생각이 났다. 페달을 한 개만 가지고 가려 했었는데 그러면 곤란하다는 생각이었다. 베이스를 공연 도중에 바꾸려면 잠시 뮤트해주는 역할을 할 페달이 필요했다. 페달튜너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드케이스 더미 아래에 끼워 넣어뒀던 페달보드를 꺼냈다.

보드 위에 있던 것들을 떼어내고 프로비덴스 코러스와 MXR 프리앰프/드라이브, 그리고 페달튜너를 붙였다. 가장 깔끔하게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한참 그것을 하고 있었는데 고양이 깜이가 자다 말고 신이 나서 가까이 오더니 냉큼 가방을 깔고 누워버렸다. 쓰다듬어주고 달래어 간신히 가방 덮개를 덮고 잠그었는데, 이번에는 다시 그 위에 뛰어 올라가서 발톱을 세워 움켜쥐고 내려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 장난을 하는 꼴이 꼭 순이를 닯기도 했고 꼼이를 떠올리게도 하여 귀엽고 예뻐보였다. 그대로 두고 외면하면 모처럼 장난을 치고 싶었던 고양이가 실망할까봐 깜이의 엉덩이를 밀어보기도 하고 머리통을 움켜쥐며 실랑이를 하는 체 하면서 조금 더 놀아줬다.

아무튼 갑자기 페달보드 생각이 나지 않았다면 기껏 두 개의 악기를 들고 가서 한 개만 사용했을 뻔 하였다.

.

2022년 8월 6일 토요일

세종로, 사직동 길

 

몹시 더웠다. 습도가 아주 높았다. 세종로 지하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의 온도계에는 섭씨 35도가 표시되고 있었다.

서울시가 주관한 광화문 행사를 위해 시내에 갔었다. 행사와 연주에 관한 이야기는 적어둘 것이 없다. 보기 드물게 수준이 낮은 관제행사였다. 열심히 행사를 준비하고 섭외되어 출연한 사람들만 고생했다.

리허설을 마치고 에어컨이 충분하게 틀어져 있는 대기실 테이블 위에 악기를 꺼내어 놓았다. 리허설을 할 때에도, 밤에 연주를 할 때에도 악기의 네크에서 물이 뚝뚝 흘렀다. 에어컨 바로 앞에 악기를 눕혀 잘 마르도록 해두고, 나는 경복궁 역 앞에 있는 펜가게에 구경을 하러 갔다. 올해 초에 명동 판가게에 구경하러 갔을 때에 경복궁 역 앞의 상점도 가보고 싶었는데 그땐 코로나 방역 때문에 매장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찌는 듯한' 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딱 맞는 기온과 습도 속에서 오랜만에 세종로와 사직동 길을 걸어서 펜가게에 도착했다. 안에 들어가 혼자 두리번거리며 구경을 했다. 내가 관심을 가질만한 것은 없었다. 나는 아무튼 거의 모든 것에 대하여 너무 취향이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 대기실로 사용하는 세종문화회관 건물로 돌아갈 때에는 이십대 시절에 다녔던 골목길을 찾아 걸었다. 길이 없어진 것 같기도 하고 새로 생긴 것 같기도 하여 조금 당황했다. 내가 맞게 걷고 있는지 잠시 멈추어 지도 앱을 열어 확인을 해봐야 했다.

대기실에 돌아오니 염민열의 기타와 내 베이스가 보송보송한 상태로 변해 있었다. 줄을 닦고 다시 조율한 다음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연주 순서를 기다렸다.


.

2022년 7월 19일 화요일

강릉, 강문, 초당동


 집을 떠나 호텔에서 하루 머무는 일정이 정해졌을 때 당연히 공책과 펜을 가지고 가기로 마음 먹었다. 숙소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가져가지 않았더라면 후회할 뻔 했다.

장거리 운전과 긴 리허설 때문에 피곤했었는데도 호텔 방 안의 책상에서 글을 쓸 때 눈이 아프지 않았다. 책상용 스탠드 조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내 방에서는 밝게 불을 켜놓아도 그림자가 생기고, 한 두 장 종이를 채우면 눈물이 나며 눈이 따갑고 아프다. 밝기와 빛의 색이 괜찮은 조명 한 개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방에서 내다 보이던 풍경은 넓은 논이었고 해송들이 군데 군데 모여 앉아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곳에서 그 소나무들을 보아왔는데, 언제나 흐트러진 차림으로 기대거나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강릉이라면 바다 보다도 늘 소나무들이 좋았었다.

지금은 잘 포장된 도로가 길게 늘어져 있어서 옛날의 해변 모습은 아니지만 나는 그곳을 한 여름에 맨발로 걸어다니기도 했었다. 바다에서 나와서 대충 샤워장 물을 끼얹고, 젖은 옷과 몸 그대로 호수를 끼고 돌아 걸으면 한 여름 볕과 바닷가 바람에 어느새 옷이 바짝 말라 있었다. 높은 방에서 창 밖을 내려다 보다가, 대충 육십여년 전에 저 길을 걷고 있었을 내 아버지를 한 번 상상해 보았다.




강릉에서.


 강릉에 일요일에 갔다가 월요일에 공연을 하고 돌아왔다. 출연하는 팀들이 많았고 긴 시간이 필요한 공연이었다. 일요일에 리허설을 하기 위해 강릉에 가서 초당동 해안길에서 하루를 묵었다.

강릉 공연에는 펜더 재즈를 가지고 갔다. 이번에는 낮은 D음을 쓸 곡이 없었기 때문이었기도 했고, 몇 달 전 이 악기의 상태가 나빴던 것을 그동안 잘 고쳐놓았기 때문에 큰 공간에서 소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공연을 만든 방송사 쪽에서 무대 위에서 입을 의상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을 때 나는 십 년 전에 검은색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공연했던 사진을 골라서 보내줬다. 그 옷차림은 이렇다 할 색감이 없으니 펜더 재즈 베이스의 선버스트 바디가 의상의 일부로 보여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페달은 MXR 프리앰프/드라이브 한 개를 가져갔다. 페달 보드를 들고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베이스의 소리가 자연스럽게 들리기를 원했다. 그나마 가져갔던 페달은 두 곡에서만 썼다. 


발왕산 동쪽 해안 도시의 기후는 종잡을 수 없다. 경포 호숫가에 차려진 무대는 저녁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도 습도가 높았다. 악기를 잡으면 나무에서 물기가 배어나왔다. 바람도 불었다.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베이스 줄과 손가락 끝을 괴롭게 하더니, 결국 또 손톱 끝이 조금 들려버렸다.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몰라 피크를 두어 개 챙겨 갔었다. 내 손가락 끝은 언제나 말썽이다. 소리는 좋았다. 넓은 장소와 기온과 습도, 그리고 관객들 덕분에 공연 내내 모든 음악들의 소리가 좋았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