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일 금요일

TV Live Show.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서 공연을 했다.
TV 생방송인줄을 하루 전에 알았다. 그리고 완공된지 몇 년이 지난 그곳에 나는 처음 가보았다.
전날 리허설을 할 때에도 뭔가 순조롭고 좋은 기분이었다. 생중계로 준비된 공연이었는데 음향과 진행 등이 모두 좋았다. 모든 것이 잘 되어있어서 어쩐지 생경한 느낌이었다는 것이 우스웠다. 원래 다 그래야 하는 것 아니었나 싶어서.

요즘 어머니의 병간호 때문에 밤마다 병원에서 보내고 있는 중이다. 무대 위에서 뭔가가 불편했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악기연습을 충분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인줄 알았다. 곡이 계속 진행되면서 불편했던 이유가 어깨와 허리 통증 때문인 것을 알게 됐다. 그러고보니 몸과 마음이 편했던 적이 아주 오래 전의 일처럼 여겨졌다.

더 많이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 연말까지 남은 공연은 두어개 뿐이다. 엄마가 회복하시고 가족들이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면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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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경험.

5년 전 여름날, 장모님이 크게 다치셨다. 여러군데 중요한 수술을 받고 긴 입원생활을 하셨다. 퇴원 후에도 한동안 간호가 필요하셨다. 나와 아내는 아예 우리집에 모셔서 가을까지 함께 계시도록 하였다. 아내는 전력을 다해 어머니의 병간호를 했다. 집안의 고양이들은 누워계신 노모 곁에 또아리를 틀고 함께 자고는 했다.

지난 주에, 이번에는 내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와 그대로 입원, 장기적인 치료가 불가피하게 됐다. 나는 매일 밤과 아침을 병실에서 보내고 일하러 갔다가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아내와 내가 함께 겪었던 몇년 전의 일이 경험이 되어, 서로 주고받는 말도 필요없이 각자 알아서 대처하고 있다. 아내와 동생은 혼자 있는 아버지를 챙겨드리거나 낮시간에 엄마의 간호를 맡았다. 나는 (원래 야행성이기도 하니까) 밤부터 아침까지 엄마의 병실을 지키고 있다.

살면서 함께 어떤 일을 겪어내면, 그렇다고 하여 마음이 심드렁해지는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눈앞에 닥친 비슷한 일 앞에서 크게 당황하지 않게 된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에 '이것은 전에도 비슷하게 겪어봤잖아' 라는 생각을 하게 된 후, 정서적인 최소한의 편안함은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지금보다 젋거나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기 싫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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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7일 일요일

산책.


자전거를 타고 나가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가 계속 되었지만, 나는 휴일이 아니면 시간을 낼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휴일이었으나 볕이 남아있을 때에 몇 시간 정도 달려보고싶었다.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데 길에 사람과 자전거들이 너무 많았다.
사람이 많지 않은 식당을 찾아 자전거 도로를 벗어나 조금 더 달렸다. 겨우 찾은 식당은 사람도 반찬인심도 붐비지 않는 곳이었다. 반찬을 더 달라고 부탁하면 작은 종지같은 접시에 꼭 두 개씩만 새로 담아줬다. 세 번 더 달라고하기엔 눈치가 보였다.

배를 채우고 해가 저무는 집쪽을 보며 잠시 앉았다가, 준비해온 외투를 걸쳤다. 이제 머지않아 추워질 것이다. 올 겨울에는 옷을 껴입더라도 자전거를 계속 타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몇 해 전 겨울에는 그만 입김이 마스크 안에서 얼어붙어 덜덜 떨면서 집에 돌아왔었다. 덜 추운 겨울이 오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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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7일 월요일

그 때 그 곳.


페이스북 덕분에 연락을 하고 지냈던 주엽형의 초대로 내가 졸업한 학교에 갔었다.
학교의 홍보를 위해 쓰이는 일이라고 하여 두말없이 가겠다고 대답하고, 시간을 내어 다녀왔다. 어색한 사진 몇 장을 찍고 주엽형과 마주 앉아 인터뷰를 하였다. 사실 그것은 좋은 핑계였고, 기회삼아 옛 학교에 가보고 싶었다. 25년만에 가보는 곳이었다.

눈에 익은 길이 나왔을 때에 갑자기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기억은 혼재되기 쉽고 나는 워낙 시간의 앞과 뒤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가끔 떠오르던 골목길이나 좁은 거리가 어디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었다. 바로 내가 다녔던 학교 앞이었다.

주엽형의 연락으로 태우형과 광장형도 만났다. 함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다른 장소에서 약속하지 않고 학교로 갔던 것은 잘한 일이었다. 엄혹했던 시절, 야만스러움이 아직 씻겨지지 않았던 사회의 분위기는 학교라고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오늘 만났던 형들은 모두 젊은 투사들이었고 자신을 던지며 부당한 일들에 맞서 싸웠었다. 그 틈새에서 늘 이어폰이나 귀에 꽂고 다니며 음악을 할 생각만 했던 나를 이해해주고 오히려 배려해줬던 사람들도 그 형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공적으로 사적으로 빚을 졌다. 그런 부채의식은 평생 지속된다. 굳이 갚으라고 하는 사람은 없는데도.

오래된 건물의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 새로 생긴 길을 오고가는 학생들의 모습은 분주해보였다. 제법 굵어진 나무 한 그루, 매점으로 쓰였던 낡은 건물의 벽돌들도 모두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늦여름의 햇빛은 따뜻했고 그늘 아래에서 부는 바람은 시원했다.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았다. 기억하고 있는 일들은 너무 흐릿했다. 낯익은 장소에서 느껴보는 생소한 기분들이 돌아다녔다. 떠올랐던 것들을 써두고 싶었는데, 몇 번 시도를 하다가 그만뒀다. 서로 맞춰지지 않는 조각들같은 생각들이었다. 기분과 느낌은 그것대로 지니는 편이 나을 때가 많았다. 따뜻한 햇빛과 선선한 바람을 기억해두자, 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는 잘 기억할 수 있다.

집에 돌아올 때엔 일부러 국도를 타고 느릿느릿 운전했다. 꼬불거리는 도로 위에 차들이 없었다. 조용한 오후였다. 함께 와준 아내와 함께 오랜만에 한적하고 고즈넉한 드라이브를 했다. 컨테이너로 꾸민 커피집을 발견하고 멈춰 서서 찬 커피도 한 잔 사서 마셨다.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왜 나는 그 형들과 사진 한 장 함께 찍어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자신의 모습을 담는 사진을 찍는 일에 무감하다보니 아쉬운 한 컷을 얻어놓지 못했다. 이제 사람을 만나면 함께 사진 찍어두는 일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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