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8일 월요일

성격과 취향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매일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겐 휴식이고 편안한 일상이다. 유약하고 보잘 것 없는 소일거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대여섯 살 때부터 지금과 같은 취향이고 성격이었다. 밖에서 또래들과 노는 일은 거의 없었다. 흙장난을 해본 적도 없었고, 친구의 집에 가서 방 안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내는 정도가 가장 사회적인 행동이었다. 오히려 내 일상이 평화롭지 않게 된 것은 학교에 입학한 후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도록 강요 당하면서부터였다.

나처럼 지내어도 괜찮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고 각자의 생활이 또래 집단과 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어울려 세월을 보내는 친구들을 여럿 본다. 역시 성격과 취향이 개체로 하여금 평생 똑같은 선택을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트위터에 글을 적지 않게 된 데에는 수다스런 사람들이 하루에 수십개씩 올리는 글에 어느 순간 질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얼굴 모르는 사람들이 올리는 글까지 더해져 때로는 자기분열적 혼잣말들을 보고 있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고, 정리되지도 다듬어지도 않는 생각을 낙서하듯 쓰고 있던 내 모습을 돌아보니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난 몇 해 동안 남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을 블로그에만 쓰고, 트위터는 일회성 정보를 찾거나 미리 만들어 놓은 리스트를 통해 뉴스를 읽는 용도로 쓰고 있다.


2024년 1월 6일 토요일

쥐가 났다


 아침에 자고 있다가 오른쪽 종아리에 경련이 나서 고통스러워 하며 깨었다. 처음은 손으로 주물러 보려고 하다가 통증이 심해져서 신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파지고 있어서 신음은 저절로 비명이 되기 직전이었다. 좀 더 침착하게 해결해 보고 싶었지만 그 대신 끙끙 앓는 목소리만 크게 나오고 있었다.

방문 밖에서 이지에게 밥을 먹여주고 있던 아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발로 내 오른발을 꾹 밟아 뒤로 꺾어줬다. 그리고 급히 다시 돌아가 이지에게 밥 먹여주기를 계속 했다. 일단 아내가 발복을 뒤로 젖혀 준 다음엔 거짓말처럼 통증이 잦아 들었다.

내가 막 통증을 느끼고 신음을 내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곁에서 자고 있던 깜이가 크게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내 신음 소리가 커지면 고양이는 더 크게 소리를 냈다. 고양이가 거의 고함을 치듯 소리를 내고 있어서 나는 아파하던 중에 팔을 뻗어 깜이를 쓰다듬었다. 아내가 뛰어와서 '조치'를 해주고 돌아간 다음에도, 통증이 가라앉아 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때까지도 깜이는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돌아보았더니 고양이의 표정은 놀랐다거나 당황했다기 보다는 비장하고 용감해 보였다. 내가 팔을 뻗어 안아주자 깜이는 비로소 외치기를 멈췄다. 그 모습이 너무 우습고, 가여웠다. 한동안 고양이는 곁에 앉아 얼굴을 올려다 보며 나를 살피고 있었다.

밖에선 이지에게 밥을 먹여주느라 아내가 허리 통증을 참으며 웅크려 앉아 있었다. 깜이는 내 뒤를 따라 방에서 나오더니 제 밥그릇 앞에 앉아 늠름한 자세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들키지 않게 치킨텐더 덩어리를 꺼내 잘게 쪼개어 그릇에 담고 사료 몇 알을 섞어 고양이에게 주었다. 나는 조금 전 일이 식구들 앞에서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2024년 1월 4일 목요일

통기타

 쇠줄 통기타를 자주 치지 않았으니까 손가락 끝이 아픈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이유 보다도 가지고 있는 기타들이 결함이 많아 제대로 연주를 하지 못 하였다. 한 개는 넥이 뒤로 누워버린 뒤 복원되지 않고 있고 그나마 칠 수 있는 다른 한 개는 프렛을 잘라 낸 단면을 제대로 마감하지 않아 손을 움직일 때마다 날카로운 프렛 절삭면에 손가락이 긁힌다. 너트는 홈 깊이가 들쭉 날쭉하여 첫번째 프렛에서 줄이 눌리는 강도가 다르다. 버리기엔 아깝고 굳이 돈을 들여 수리하기엔 애매한 기타들이다.

통기타를 쥐고 줄을 뜯다 보면 중학생 시절 엄청나게 몰입하여 기타를 배우고 익혔던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손가락 끝엔 퍼렇게 산화된 니켈 때가 물들어 있었고 기타줄 모양으로 살 위에 자국이 나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그 기억이 되살아 난다. 기타의 사운드 홀에 종이를 덮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연습하다가, 결국 폭발하여 방문을 열며 나무라던 엄마의 모습도 생각난다.

좋은 통기타 한 개를 언젠가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2024년 1월 3일 수요일

지금 어디에 있는지


 사람들은 지금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 먹는 음식들, 생활을 제어하는 제도와 관습이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없던 것이 만들어지게 되어 이전에는 갖지 않았던 필요가 새로 생기는 것이다. 풍습이란 원래부터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 아니라 어느날 누군가들에 의해 시작되어 다수의 동의를 얻거나 다수에게 강제해 오면서 반복되었던 것이다. 유래를 알면 물건이 생겨난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 과거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지금 여기에 있는 자기와 타자를 바르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역사를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대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무지한 채로 수명을 연장한다고 하여 특별히 잘 못 될 일은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고양된 정신이나 철학은 사치이다. 매일 먹고 놀고 즐기는 것 외에 가치라고 할 것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고, 알고 보면 굳이 문명의 울타리 안에서 살 이유도 없는 인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