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 23일 토요일

믹스 커피.


군에 입대하여 부대를 배정받았을 때에, 나에게 주어졌던 최초의 명령은 바로 커피를 타는 일이었다.
함께 입대했던 친구들이 막사의 마루에 엉덩이를 붙인채 하루 종일 '대기'를 하고 있었을 시간에,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부대배치 즉시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었다. 그 때에 직속상관이었던 소령이 나에게 맨 처음 시켰던 일이었다.
나는 먹기 쉽게 봉지에 담겨있는 커피를 종이컵에 털어서 놓고 더운 물을 부은 뒤 그에게 가져갔다.

내 커피의 맛을 본 소령은 곧 두번째 명령을 내려주었다.
나는 뒤로 돌아서서 벽을 보고 말뚝처럼 서있어야 했다.

내가 원래 즐겨 마시는 커피는 설탕과 크림이 섞여있지 않은 검은색 커피이다.
조금 진하게, 적절하게 뜨거워야 맛있게 마실 수 있다.
그러나 봉지에 담겨있는 믹스 커피의 맛이란 역시 달짝지근해야 좋은 것이었나 보다.
나는 그런 커피를 먹어야 할 상황이 되면 조금 묽게, 적당하게 뜨거운 정도로 마셔왔었다.
그런 커피를 남에게 대접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물도 아니고 커피도 아닌 몹시 이상한 어떤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몰랐었다.

이런 내가 학교에 다닐 때에 어느 겨울 내내 낮시간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었다. 주로 그 시간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모두 커피를 주문했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하필 원두커피가 아니라 믹스되어 있는 다방 커피 메뉴가 따로 있었다.
그것을 주문했던 손님들은 내가 타준 커피의 맛을 보고는, 담배만 피우다가 돌아가버렸다.
그렇게 돌아간 손님들 중에 물론 다시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저녁에 가게에 출근했던 카페의 주인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약속했던 한 달을 채웠을 때에, 월급을 주며 인사를 하던 가게 주인은 두 번 다시 나에게 연락을 해오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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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13일 수요일

Bill Evans


스코트 라 파로가 만일 일찍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빌 에반스의 음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빌 에반스의 연주는 스코트 라파로의 생전과 사후의 것이 많이 다르다.
빌 에반스의 피아노 연주가 스코트 라 파로 사후에 활력이 떨어졌다거나 예전과 같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는 글을 읽을 때가 있다. 꼭 그렇지는 않다. 빌 에반스의 연주는 계속 발전했다.

스코트 라 파로가 죽은지 6년이 지난 해에 에디 고메즈와 녹음했던 You Must Believe In Spring 을 듣고 있으면 이상한 평론이나 음반소개 글은 과연 읽지 않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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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 12일 토요일

일기.


국민학생이었을 때부터 나는 일기를 써왔다.
맨 처음 컴퓨터를 가지게 되었을 때에 책받침만한 플로피 디스켓을 번갈아 끼워 컴퓨터를 부팅하면서 했던 일은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보석글'을 가지고 끄적이던 일기쓰기는 결국 너무 번거롭고 경제적이지 않았다. 다시 공책에 쓰는 일기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매킨토시를 가지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개인용 컴퓨터로 일기를 쓰는 일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동할 수 있는 랩탑이 없었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다시 공책에 일기를 썼다.
언젠가부터는 그 두 가지의 일이 이러저리 섞여버려서, 컴퓨터 안에 텍스트 파일로 쌓여가는 일기가 따로 있고 여전히 공책에 적어두는 일기가 한쪽에 따로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기록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조차도 다시 읽어볼 일이 별로 없는 일기를 나는 왜 계속 쓰고 있는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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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 8일 화요일

악보 보기.


나는 악보를 볼줄 모르는 연주자였다.
지금도 악보를 빠르게 읽지 못한다.
낯선 장소에 도착하여 허둥지둥 악기를 꺼낸 후 대뜸 악보 한 장을 건네어 받는다고 해도 아무 문제없이 초견이 가능한 경지는 아직도 멀었다.
함께 연습하는 분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더니 믿어주지 않았다.
내가 먼저 고백하기 전까지는 '저 녀석이 악보를 못본다'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동안 나는 눈치와 임기응변, 음악을 외는 습관으로 해왔었다.

나는 한번도 음악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학교의 음악시간이란 교과서 제목 뿐인 '음악'이었다. 음악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저 분이 정말 음악을 좋아하기는 할까 의심스럽기만 했었다.
나중에 나 혼자 화성공부를 할 때에도 나는 악보를 볼줄 몰라서 영문자로 되어있는 코드 이름을 기초로 무조건 음과 패턴을 외는 식으로 해왔었다.
무대에서 연주를 하기 시작한 후에, 그제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심정으로 악보를 보고 그리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연주해야 한다면 악보를 볼줄 아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악보는 연극의 대본과 같다. 음악을 부분마다 잘라서 이름을 붙이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악보를 볼줄 몰라도 얼마든지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다. 또 멋진 곡을 만들 수도 있고, 남에게 가르쳐줄 수도 있다. 그러나 악보를 볼줄 알게되면 연습하는 동안 일일이 말로 설명해야 할 시간에 몇 곡이라도 더 연주해 볼 수 있게 된다.

가끔씩 악보를 보는 바보들을 만날 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어정쩡하게 교육을 받았거나, 교육은 잘 받았지만 음악을 어정쩡하게 하고 있는 이들이다.
음악을 좋아하여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악보에 표시되지 않았다고 하여 연주할 부분에서 쉬고 있거나 하지는 않는다. 엉터리로 기보된 악보대로 연주하면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모를 수 없다.
싱코페이션을 악보대로 연주하는 연주자들 보다는 악보는 상관하지 않으면서도 제 맛을 내주는 블루스, 재즈 연주자들이 좋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연극배우가 각자의 대본을 손에 들고 공연하지 않는 것과 닮았다고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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