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23일 금요일

예의가 불편하다.

어찌 어찌 살다보니 일주일에 수십 명의 학생들을 만나게 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는 자주 학생들에게 예의따위는 집어치우고 좀 시건방지게 해보라는 말을 하고는 했다.
그것을 두고 내가 학생들에게 어줍잖게 환심이라도 사려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어린 학생들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잘 알아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이 거드름이고 무엇이 진심인지 쉽게 알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때묻은 얼굴을 가린채 곁눈질하는 어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예의라는 것은 유치한 권위를 보전하기 위해 만든 것도 아니고, 겨우 나이를 헤아려 대접해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을 혼동하거나 어설프게 배워온 사람들은 자주 위에서 아래로의 예의란 처음부터 없는 것으로 여기고 행동한다. 나이어린 사람들에 대한 예의는 어디에서 배울 것인지.
예의라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상대방에 대한 양해이고, 존중이고, 남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나도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하자는 합의일 뿐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경직되고 가식적인 태도와 자세로는 악기이고 음악이고 아무 것도 배우고 익히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 앞에서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등을 기댄채 담배를 피워물고 있어도 상관없다. 나는 그런 것에 전혀 불편해하지 않으니까, 양해도 된 것이고 적당히 합의도 된 셈이다. 최대한 자유로운 상태가 되어있지 않으면 아무 것에도 집중할 수 없다. 마음을 연 관계도 이루어질 수 없는게 당연하다. 자연스럽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커뮤니케이션이 된다고, 그들은 이미 몸에 익힌 어리숙한 단정함으로 치장한 말과 행동을 해보이려 애쓴다. 
그것은 말하자면 아닌데 그런척, 그런데 아닌척하는 것일뿐, 나는 그런 것이 불편하다. 거기에는 진심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