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22일 월요일

자살.

잠깐 방심했더니 그만 나는 몸살에 걸리고 말았다.

정확히는 토요일부터 시작되었다.
앓다가, 괜찮아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열이 조금 있을 때에 효과적이라고 여겼던 찬물로 샤워하는 일도 이제는 만만하지 않았다.
차가운 물방울을 손끝에 대보면서 망설이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다가 열만 내려 준다면 두통도 불편함도 사라질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냉수마찰을 하고 훌러덩 벗은채 잠을 청해봤다.
그랬더니 열만 내려갔고 감기증상이 심해졌다.
몸이 아프면 같이 사는 고양이에게도 민폐를 끼친다. 물을 얼마나 끓여마셨는지 뱃속이 출렁거린다. 나는 고양이 순이의 밥 그릇을 자주 살피고 물 그릇을 자주 확인했다. 내가 그만 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 온통 여자가수의 자살에 관련된 기사가 넘치고 있었다.
나는 그까짓 열좀 나고 몸이 조금 으슬거린다는 것만으로도 살아남으려고 혼자 별 짓을 다했던 밤을 보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내 홈페이지에 적어둔 어떤 글 때문에, 이곳을 검색을 통해 찾아오는 분들 중에는 '죽고싶을때'라는 문장을 찾다가 여기에 들러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살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충고, 권고, 경고, 분석을 하고는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것들은 모두 자살하지 않은 사람들의 말일 뿐이다. 자신을 스스로 죽인 사람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당연히 그것을 설명하고 써 내려가는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죽은자와 남은자의 의사소통은 어느 쪽이 되었든 일방적이다. 대부분 더 이상 말없는 사람쪽이 더 폭력적이다. 그들은 설명도 대꾸도 해주지 않을테니까.

'모든 이의 상처와 고통은 지문처럼 독특하다'라는 말에 나는 동의했다. 
나는  '정말 큰 고통 앞에서는 오히려 살아남으려 애쓰게 되므로, 죽고싶다는 생각은 여전히 사치'라고 썼던 적이 있었다. 여전히 그 생각은 변함이 없으나, 지금에 와서더 생각해 본다면 결국 자살하지 않은 녀석의 고백일 뿐이었다.

사람에게는 '존재했어야할 자기'와 '실제로 존재하는 자기'가 늘 서로 실랑이를 하기 마련이다. 
현실의 분열적인 상태의 자기를 물리적으로 제거한다고 해서 '있어야할 자기'로 그 자리를 메울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모든 존재는 행복하려고 사는 것이다.
나는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