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3일 월요일

늙고 낡은

 리디북스에서 소설 한 권을 구입했다. 리디북스는 앱스토어를 통해 결제하고 그것을 자기들 포맷의 캐시라는 이름의 통화로 바꾼다. 그러면 내가 결제한 돈의 일부를 차감한 금액이 그 '캐시'로 충전되는 방식이다. 구입한 책값은 만 이천원이었지만 실제로 결제한 금액은 만 사천오백원이었다. 알라딘 앱에서 한번 더 검색해 볼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기기와 프로그램이 오래 유지되어야만 구입한 책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시대. 가능한 종이책은 그만 사겠다고 결심한 대신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집안의 가구를 정리정돈하기 위해 아내는 오래된 오층장을 현관 가까이에 밀어 놓았다. 그것은 내가 여서일곱살 무렵에 모친이 금호동 가구공장에 주문하여 샀던 것이다. 오래되고 낡아져서 이젠 겨우 틀만 남았다. 문짝도 여기 저기 파손되었다. 장 뒷면 얇은 합판은 힘주어 밀면 뻥 뚫어질 지경이 되었다. 오십여년 가까이 이사를 할 때마다 옮겨지길 반복했던 낡은 가구가 이제 없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늙고 낡은 가구를 버리고 새로 가구를 사는 것만으로는 정리정돈이 다 되진 않는다. 집안에는 지난 사십여년, 삼십여년 동안 한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들이 잔뜩 있다. 그동안 많이 버렸는데도 아직 많다. 책을 버리는 것이 왜 그렇게 아깝고 어려운지 모르겠다. 책 뿐이 아니라 플라스틱 더미도 쌓여있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음악 CD들과 DVD들을 모두 버려야 마땅할텐데 여전히 어떻게 하지 못하고 쳐다보고 있다. 기술은 발전했고 시간과 비용을 들여 모았던 미디어들은 쉽게 버리지 못하는 짐이 되어버렸다.

애플뮤직, 유튜브와 넷플릭스, 전자책을 사용하는 시대이니까 불필요한 것은 버리기로 하고 정돈된 실내에서 일상을 보내는 것이 옳다. 쓰레기가 되어버린 물건들과 함께 기억과 이야기까지 버려져 잊어버린다고 해도 뭐 어떤가, 하는 마음이 들도록 자기를 설득해야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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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일 토요일

시월

 


시월이 되었고 밤엔 춥다. 가을이 문앞에 와있다.

수요일에 시골집에 가는 길엔 벼를 모두 베어버린 텅빈 논을 보았다. 노란 빛을 띠는 들판도 보았다. 시골집 뒤뜰엔 밤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밤나무에서 떨어진 밤송이들이 수염을 깎지 않은 남자의 입처럼 헤벌레 벌어진 채로 별 뜻 없는 말을 하듯 밤알들을 뱉어 놓고 있었다.

무덥고 습했던 여름날에 나는 머지않아 더위가 끝나고 찬 바람이 불 것을 알고는 있었다. 쉰 번을 넘도록 겪어온 가을이 막 시작하려는 지금, 어쩐지 처음 당해보는 슬픔 같은 감정을 느낀다. 계절을 마주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여전히 서글픈 이유는 결국 해내지 못한 일들만 지나온 길에 줄지어 떨어져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뒤돌아보면 이루지 못한 일들이 여기 저기 버려져 있다.

해가 지는 것을 보며 아내와 국도를 달릴 때 하늘빛이 처연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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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4일 토요일

청남대에서 공연을 했다.

 


해가 진 후 금강이 굽이쳐 돌고 있는 청남대의 공연장 대기실 천막 주변은 공기가 서늘했다. 저녁으로 도시락을 먹고 났더니 추위와 함께 피로를 느꼈다. 지난 밤에 일찍 잠들지 않았던 탓이었다. 공연 전에 주차해 둔 차에서 시트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였다.


한 시간 동안 연주를 했다. 강과 넓은 잔디와 나무들이 있어서 소리가 좋았다. 두 시간 넘는 공연을 이어오다 보니 한 시간 동안 연주하는 것이 짧게 느껴졌다.

2022년 9월 23일 금요일

청주에서 잤다.

 


공연 하루 전날 청주로 가서 하루를 잤다.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도로가 오래 정체되어 중평 톨게이트를 통해 빠져나와 깜깜한 국도를 달렸다. 숙소 부근 빵집을 찾아 급하게 먹을 것과 커피를 사고, 호텔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방에 들어가 TV를 켰다. 축구 국가대표 친선경기가 이제 막 시작하고 있었다.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전반전이 진행되는 동안 먹고, 보온병에 담아 아직도 뜨거웠던 커피는 손흥민 선수가 프리킥을 찼을 때에 마셨다. 경기는 재미있었지만, 그 종편 채널을 이용해야만 하는 것이 거북했다. 축구 중계가 끝나자마자 텔레비젼은 끄고, 아이패드로 음악을 틀었다.



생각해둔 것을 글로 옮기는 것에 한계를 느껴서 틈나는대로 아이폰의 노트 앱에 메모를 해두고, 여전히 그중에 여전히 쓸 것이 있으면 쓰기 시작하기로 하고 있다. 메모는 넘치고 숙소의 통나무 의자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어서 수시로 일어나 몸을 움직여야 했다.
잠시 일어난 김에 유튜브에서 음악 라이브 영상을 고르다가 Rodney Jones가 판데믹 기간 동안에 연주했던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쿼텟에서 피아노를 맡고 있던 류다빈 씨라는 피아니스트를 알게 됐다. 그는 매우 좋은 연주를 하고 있었다. 로드니 존스의 연주를 일부러 들어본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구글의 인공지능 덕분에 가끔 행운처럼 건져지는 것들이 있다.
영상을 보는 바람에 한 시간을 그대로 지나보내고 결국은 아주 늦게 잠들었다. 이래서야 공연 하루 전에 힘들여 운전하여 온 보람이 없는 것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래도 토요일에 시계를 보며 초조해하면서 공연장으로 달려가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