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5일 토요일

운전, 연주, 운전.


정읍에서 공연했다.
새벽에 어떤 소음 때문에 잠을 깨어 결국 다시 잠들지 못했다. 겨우 두 시간만 잘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운전을 시작, 네 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예상하지 못했던 추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따뜻해 보이는 외투를 입고 있었다. 내장산 기슭의 바람이 매서웠다.

아직 여름 옷을 입고 다니는 나는 계절의 변화에 너무 둔감한 것 같다.
첫 곡을 시작했을 때에 낮은 온도에 악기의 줄이 점점 더 차갑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손이 시려워서 입에 손을 가져다 대고 후후 불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매우 바보같았을 것이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해가 지고, 기온은 더 낮아졌다. 악기의 음이 자꾸 미세하게 올라갔다. 가장 덜 변한 줄을 기준으로 삼아 연주를 하면서 수시로 튜닝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무대 위의 음향은 최근 몇 년 중 가장 최악이었다. 이미 리허설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정이었을 때에 눈치를 챘다. 공연을 시작한 후 연주를 하는 도중에 헤드셋 마이크를 하고 있는 분을 불러 모니터 스피커의 소리를 아예 꺼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경우에는 무대 위의 사운드를 최대한 귀기울여 듣는 편이 언제나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왕에 시작한 연주를 할 때에는 더 이상 핑계를 대거나 부실한 음향을 구실 삼아 변명할 필요는 없다. 집중하여 잘 하면 그만이다.

공연을 마치고 났더니 감기에 걸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읍 시내에서 따뜻한 국밥을 먹고 다시 운전을 시작했는데, 저절로 두꺼운 이불이 덮혀지는 것 처럼 졸음이 밀려왔다. 두 번이나 중간에 쉬면서, 세 시간을 운전하여 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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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친구가 서초동에 함께 가겠느냐는 문자메세지를 보내왔다.
지난 주 부터 다음 주까지 토요일 마다 공연이 약속되어 있어서, 나는 못 가는 대신 내 몫까지 해주고 오렴, 이라고 답을 했다.
집에 돌아와 금세 잠들지 못하고 사람들이 올린 사진과 글을 한참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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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7일 금요일

공연 사흘 째.



밴드 10주년 기념공연이라는 이름을 붙인 나흘 동안의 공연, 사흘째 순서를 마쳤다.
연주하고 공연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내 개인사는 편안하지 못했다.

연주하는 일이란 특별할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러나 마음의 상태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사흘 내내 공연 직전 혼자 스스로를 가라앉히고  정서를 유지하려 애써야 했다. 음 한 개, 박자 하나에 더 신중하려고 했다.

오늘 밤은 집에 돌아오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
먹은 것이 없어서 그랬나 보다.
챙겨 먹고, 쉴 수 있을 때에 쉬어야 한다.

내일 남은 공연은 더 편안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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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3일 월요일

공연 준비.


수요일 부터 나흘 동안 한 장소에서 공연을 할 예정이다.
주말에 악기에 새 줄을 감고 페달보드를 꺼내어 케이블 청소를 했다.
합주실에 조금 일찍 가서 소리를 확인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몇 해 동안 이펙터를 들고 다니지 않았었다. 올 가을 공연들에서 연주할 곡이 특별히 더 많은 것은 아니다. 한정된 악기 편성에서 조금 더 다양한 음색이 필요했다. 보드 위에 붙어있던 것들을 모두 떼어 케이블과 잭을 닦고 꼭 사용할 것들을 새로 추렸다.
페달보드의 구성을 자주 바꾸다 보니 보드에 페달을 고정할 때에 사용하는 강력 테이프를 다 써버리고 없는 줄도 몰랐다. 급한대로 끈으로 묶어 가방에 넣어 이동했다. 아침에 테이프를 주문했으니 모레 공연 직전까지는 배송될 것이다.

긴 합주를 하는 동안 집중하느라 커피가 놓여져 있는 것을 그만 잊었다. 리허설을 마치고 악기를 챙겨 나오면서 식은 커피를 벌컥 들이켰다.
가을 하늘은 맑았다.
햇빛은 따뜻하고 바람은 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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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9일 목요일

안경.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고 남을 탓하는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다. 몇해 전에 오랜만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는데, 스크린의 해상도가 너무 낮다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에 집중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화질이라고 생각하여 극장에서 나온 후에도 투덜거렸었다. 어떻게 저런 후진 시설을 해놓고 표값을 받는 것이나며 죄없는 극장을 탓했다. 내가 그동안 컴퓨터 모니터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대형 스크린에 비춰지는 영상이 거칠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그것이 갑자기 나빠진 내 시력 때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워낙 시력이 좋았던 나는 한번도 눈이 나빠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며 살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조금 오래 운전을 하고나면 몸이 지치기도 했고 햇빛이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다보면 얼굴의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인상을 쓰며 읽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한참 후에야 내 시력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해에 처음으로 안경을 샀다.

안경점 사장님은 완성된 안경을 나에게 건네어주면서 자연스럽게 노안이 생긴 것일 뿐 여전히 시력이 좋은 편이니 항상 안경을 쓸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안경을 사용한 후 다시 긴 시간 운전을 하여도 피로하지 않게 되었다. 올해엔 인상을 덜 쓰며 활자를 읽기 위해 돋보기 안경을 한 개 더 샀다. 역사상 초기의 안경 렌즈란 노안을 교정하기 위했던 것이었다. 나는 이제서야 본연의 기능을 위한 물건을 가지게 된 셈이다.

안경을 쓰기 시작한 후 비로소 눈이 나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평소에 함께 길을 걷다가 뻔히 보이는 간판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던 아내의 심정을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아직 일정한 거리에 있는 것들은 여전히 선명하게 잘 보이기 때문에, 늘 안경을 썼다가 벗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귀찮고 어색하다. 하지만 인상을 쓰며 눈을 가늘게 뜨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고, 극장의 스크린을 다시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도 좋다.

한편, 내 눈이 나빠진 것을 모르고 극장의 시설을 탓했던 것이 혼자 미안하여 그 후에도 영화를 볼 일이 있으면 나는 계속 같은 극장에 다니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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