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7일 금요일

연주.


지난 화요일에는 작년 연말에 공연했던 곳에서 다시 연주를 했다. 평소보다 작은 무대, 객석이 가득찬 아담한 공간의 소리가 좋게 들렸다. 무대는 낮았고 관객의 얼굴 높이에 앰프와 캐비넷이 있었다. PA로 나가는 소리와 별개로, 무대 앞쪽의 사람들이 따뜻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연의 절반 이상은 엄지손가락으로 연주했다.

넓고 큰 공간에서 연주할 때의 즐거움도 있지만, 작은 무대에서의 공연은 언제나 좋다. 나는 좁고 작은 클럽에서 음악을 시작했다. 팔을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에 있는 관객들은 손가락이 줄에 닿는 감촉까지 느끼며 음악을 즐길 수 있다.
하고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살고있는 일이 쉽지는 않다. 어깨는 늘 무겁다. 다만 악기를 챙겨 무대에서 내려올 때까지는 잠시 일상의 시름을 잊는다. 더 나이를 먹어도 내가 처음 그랬던 것처럼 작은 공간에서든 어디에서든 자주 연주를 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연을 마치고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에 찬 바람이 모질게 불고있었다. 바람때문에 더 빨리 타버리고 있던 담배 한 개비가 아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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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3일 월요일

더블 앨범.


밴드의 십주년 기념음반이 나왔다.
비닐 레코드로, 두 장짜리 더블앨범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LP였다. 다시 턴테이블을 사용할 계획이 없었었는데...


표지도 좋았지만 음반을 열었을 때에 시원하게 보이는 이 그림이 무척 좋았다. 모두 밴드의 리더님이 크레용으로 그리신 것.

부모 두 분의 병원일들로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드디어 자리를 잡고 들어봤다. 한 곡씩 지나갈 때마다 그것을 녹음하던 날의 풍경이 떠올랐다. 연습실에서의 소음도 기억나고 녹음을 마치고 밤중에 도로를 달려 돌아오던 일들도 생각이 났다.

음반을 다시 자켓에 끼워넣다가 문득, 여전히 그 동작이 손에 배어있다는게 신기했다. 아득히 어린 시절에 매일 했던 동작이었다. 자전거 타는 법을 잊지 않듯 손이 기억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레코드에 그 사이 달라붙은 고양이의 털을 후후 불어 떼어내고 음반을 비닐 포장에 고이 담아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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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2일 목요일

식구.


검은고양이 까미가 우리집에 '제 발로' 들어와 눌러앉아 살은지 두 해가 되었다.
집안을 휘젓고 다니며 종일 까불고, 나이 많은 고양이들에게 달려들어 놀아달라고 조르는 것을 매일 본다. 볕이 좋으면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졸다가 햇빛이 사라지면 이불을 찾아 드러눕는다. 이 고양이가 처음 내집에 들어왔을 때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흘 동안 잠만 잤던 것이 기억난다. 추웠던 그 해 십일월에, 바깥에서 고생을 했었으리라.

고양이 순이가 떠난지 두 해 넉달이 지났다. 검은 고양이 까미는 순이가 하던 짓을 신기하게 재연할 때가 많다. 나는 까미를 보다가 순이 생각을 했다. 까미를 쓰다듬다가 순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한밤중에 내가 자리에 누우면 검은 고양이가 조용히 다가와 내 팔을 베고 나란히 눕는다. 나는 깜박하고 검은 고양이의 이마를 만지며 '순이야', 하고 불러버린 적도 있었다.

다시 겨울이 시작되었다. 겨울동안 내 식구들이 사료를 잘 먹고, 군것질도 적당히 하고, 내가 없는 동안에도 집안에서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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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4일 수요일

퀸과 그 영화.


스팅은 50,000이라는 노래에서 세상을 떠난 록스타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We tweet our anecdotes, our commentary
Or we sing his songs in some sad tribute
While the tabloids are holding a story of kiss and tell
That he’s no longer able to deny or refute’

이 곡은 스팅의 앨범 “57th & 9th” (2016)에 실려있다. 이 음반이 발표될 즈음 뮤지션들의 사망소식들이 있었다. 이 곡은 데이빗 보위와 프린스가 세상을 떠난 시점에 쓰여지고 녹음되었다. 그 즈음 글렌 프라이 (Glenn Frey, ‘프리’가 아니다) 도 죽었다. 앨범이 발표된 이후 겨울에는 레미 킬리미스터 (Lemmy Kilimister) 가 사망했다. 스팅은 ‘rock stars don’t ever die, they only fade away’ 라고 노래한다. 그러면서 ‘타블로이드는 죽은이가 더 이상 부인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그의 성적인 사생활 보도를 계속하는 동안, 우리는 트위터에 우리의 일화, 우리의 해설을 쓰거나 슬픈 추모의 마음으로 그의 노래를 부르지’ 라고 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스팅의 저 노랫말을 떠올리게 했다.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고, 이제 누군가에게는 마음에 오래 남을 좋은 영화로 기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이 영화는 너무 상업적이었고, 그 떠들썩했던 광고만큼 가벼웠으며,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감히 생략해버렸다. 네 명의 밴드 멤버들은 스테레오 타입의 단순한 캐릭터로 변했다. 심하게 말하면 이 영화는 큰 돈을 들인 립싱크, 흥행에 대한 강박이 느껴지는 거대한 카라오케 같았다. 이 영화는 전기(傳記) 영화가 아니라, ‘실화에 기반을 둔 재연드라마’가 되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미디어의 역할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면 그만일 수도 있다. 나는 오랜 팬의 입장에서, 퀸과 프레디 머큐리를 다루는 극영화라면 적어도 이 영화보다는 더 나은 작품이길 바랐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여자친구와 뒹굴다가도 피아노를 연주하던 어떤 천재가 마음 착하고 순한 성격의 세 멤버들을 만나 6분짜리 명곡을 만든 록스타가 되고, 사생활의 문제 등으로 밴드를 버리고 솔로음반을 만들다가 Live Aid 공연 직전에 마치 돌아온 탕아처럼 밴드에 다시 합류하여 록음악사에 오래 남을 전설적인 공연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 되어버렸다. 쉽고, 단순하고, 피상적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The Bird (1988) 와 대비하여 생각하게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재즈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미국의 근현대사, 그리고 찰리 파커라는 인물에 대한 진중한 탐구를 그대로 영화에 옮겨주었다. 그런데 The Bird 처럼 영화를 만들면, (단지 음악이 비밥재즈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기 어렵다. 진중함과 깊이를 포기하는 대신 드라마와 로맨스, 자극적인 즐거움을 선택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어할 수 있는 영화를 판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뒤의 것 - kiss and tell 에 집중했다.

이 영화는 어쨌든 위대했던 록밴드를 다시 소환하는데에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데에는 영화 자체보다도, 자신들이 위로받고 행복해했던 음악들과 그 음악을 만든 그룹 퀸에 대한 애정이 오래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뉴욕타임즈에 록음악 비평을 쓰는 A.O. Scott 은 이 영화를 소개하며, “유튜브와 레코드를 보고 듣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그의 의견에 매우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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