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0일 일요일

의미있는 것

 


예전의 나는 작은 기쁨과 고통에 혼자 예민해하여 한 줌도 안되는 감정을 이만큼 과장하곤 했다. 이제는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은 우리에게 무심하다. 원래 세상이란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인간이라는 쪽의 입장에서는 자꾸 이치를 따지고 싶어하고 원칙이니 정의 따위를 내세워 떼라도 써보려 하는 것이지만, 자연・세상・우주는 그런 것에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는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어떤 가치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을 논리인 것처럼 우겨보려고 해봤자, 우리는 점점 더 약하고 보잘 것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된다. 그것을 부조리하다며 계속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이 하는 일이겠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되어지지 않는 것을 해결해달라고 드러누워 소란을 피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 곁을 지키며 밤새 의자에서 몸을 접고 자고있는 고양이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는 일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 뭐 몇 개나 될까.



2022년 3월 18일 금요일

버릇

 


안경을 쓰지 않고 글씨를 써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안경은 돋보기인데, 적당한 거리를 맞추기 어려워졌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지럽다. 내 시력의 문제는 단순한 노안 증상이기 때문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으면 안경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

요즘 읽고 있는 대부분의 책은 모두 전자책이다. 눈이 나빠진 뒤로는 종이책을 읽는 것을 더 어려워하고 있다. 종이의 색에 따라, 인쇄된 글자의 폰트, 서체에 따라 어떤 종이책은 눈을 더 피로하게 만든다. 아이패드로 책을 읽으면 밝기를 잘 맞추고 배경색과 서체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이 편하다. 다만 옛날처럼 옆으로 누워 좌우로 뒤척이며 책 한권을 다 읽어버리는 일은 이제 어렵다.

그동안 계속 안경을 쓰고 글씨를 썼더니 더 잘 보이게 하고싶어서 몸을 자꾸 낮춰 웅크리고 있었다. 허리의 통증도 줄여야 하고 손목도 자주 주물러 펴줘야 한다. 더 잘 읽고 보고 싶어서 눈을 찡그리는 것도 하지 않으려고 자주 의식해야 한다.

나이가 들었고, 몸은 변했다. 좋은 자세를 생각하며 스스로 버릇을 만드는 방법 밖에 없다.

2022년 3월 12일 토요일

자코 부트렉


 애플뮤직에 웬 Jaco Pastorius 앨범이 새로 나왔다며 추천음반으로 보여졌다. 또 이곡 저곡 붙여둔 엉터리인건가 보다 하고 듣지 않고 있었다. 사실, 며칠이 지나도록 음악을 집중하고 들을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수상한 앨범의 곡명을 보다가 내가 모르는 타이틀이 있어서 들어보기 시작했다. 이 앨범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특이한 녹음이었다. 음질도 나쁘지 않고 악기 소리 외에 잡음도 없는데 그렇다고 제대로 믹싱을 거치지 않은 듯 밸런스가 좋지 않은 곡도 있었다. 이건 부트렉 같은 것일까.

자코의 연주도 특이했다. 솔로의 구성이 엉성하고 간혹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부분도 들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함께 연주하는 연주자, 편곡, 자코의 솔로 등은 클래스가 높았다. (당연하잖아) 두 곡을 이어붙인 트랙은 라이브 연주이거나 공연을 위해 리허설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정식으로 발매했던 앨범에서 들었던 자코의 완성도 높은 연주가 아니라고는 해도 무시무시한 테크닉은 분명했다. 이런 녹음은 누가 어떻게 보관하고 있었던 걸까. 플렛리스 베이스의 슬러를 사용한 인토네이션은 자코의 지문처럼 그 사람만 낼 수 있는 아름다운 사운드 그대로였다. 말끔한 구성은 아니고 반복되는 프레이즈를 계속 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녹음이나 공연을 앞두고 꼭 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솔로인데도 어느 부분도 화성적으로 틀리거나 이상한 음이 없다. 망설이는 것처럼 들릴 때에도 음악적인 손버릇으로 빈 곳을 메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음색이 대단하다. 



2022년 3월 5일 토요일

선거

 



읍사무소 (명칭은 주민자치센터로 바뀌었지만, 읍사무소가 낫다)에 가서 아내와 함께 사전투표를 했다.

투표소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 서있었다. 내 앞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든 육십대 쯤 되어보이는 여자가 너무 뻔뻔했지만,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싫어서 잠자코 있었다. 내 뒤에 서있던 아내가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하러 나왔는데, 이것이 어떤 결과로 나올지 아직 모른다. 불안감과 함께 희망도 버리지 않는 수 밖에 없다.

투표를 마치고 걷던 중에 빨간 옷을 입은 나이 어린 남자애들이 빨간색 기호를 들고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가까운 옆에 두 명의 중년 여성들이 파란 옷을 걸치고 홍보하며 서있었다.

아내와 첫 끼 식사를 위해 동네를 걷다가 새로 생긴 가게에서 햄버거를 사먹었다. 저녁에 뉴스에서는 이번 사전투표율이 역대 가장 높았다고 했다.

동해 해안을 따라 산불이 아주 크게 났고 여전히 불을 끄지 못하고 있다. 삼척, 동해, 울진, 묵호항까지. 바람이 세게 불어 남동쪽으로 확산하고 있단다. 강를 옥계에서 일어난 불은 방화였다고도 하고.

빨간 옷을 입은 갓 스무살 정도 되어 보이던 사내아이들의 모습이 기억 나면서, TV 화면 속에서 시뻘겋게 타고 있는 불길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