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일요일

한전아트센터 공연


 두 주 만에 공연장. 일요일 낮 시간에 이렇게 차가 막힐 줄이야. 그나마 일찌감치 나온 덕분에 약속 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말마다 공연을 하고 있었고 앞으로 내년 첫 주까지 매주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그 사이 유일하게 공연이 없었던 지난 주에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되었던 것이니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지난 열흘 동안 그 이전보다 더 잠을 못 자며 지냈다. 집에서 커피를 진하게 내려 마시면서 그것이 공연을 마칠 때까지 각성 상태를 유지하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수면부족이 아니라 통증이었다. 연주를 시작할 때부터 허리 통증이 심했다. 그나마 가벼운 악기를 가지고 갔던 덕분에 견딜 수 있었다. 공연 직후에 악기를 챙겨 차에 실을 때엔 좀 더 가벼운 베이스를 한 개 새로 살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은 악기들이 무거워진 것이 아니라 내가 약해져 있는 것이니까 몸을 회복할 생각을 해야 맞다. 
극장을 가득 메워준 관객들의 표정이 잘 보였다. 안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잘 보였을 리가 없을텐데, 연주 중엔 그렇게 느껴졌다. 그 덕분에 연주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십일월이 곧 지나간다. 다음 달엔 먼 장소를 옮겨 다니며 이틀 연속으로 공연하는 일정도 있다. 잘 쉬고 몸을 낫게 하여 겨울 공연들을 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24년 11월 19일 화요일

장례를 마쳤다.

 

13일 수요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6일 토요일에 고인을 화장하고 유골함을 안장했다.

11일 월요일에 방사선치료를 위한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갔었다. 노인의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그 날이 나와 동생, 엄마와 아버지가 함께 시간을 보낸 마지막 날이 되었다. 빈소 옆에 담요를 깔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주고 받은 마지막 대화는 자동차의 대쉬캠에 녹음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새벽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나는 혼자 그것을 여러 번 들어보고 있었다. 장례를 다 마친 후 집에 돌아와 일요일엔 밀린 잠을 잤다.

18일 월요일, 유골함을 놓아두고 온 장소에 가족들이 다시 모였다가 시골집에서 엄마의 짐 정리를 돕고 돌아왔다. 추모원엔 색으로 물든 나뭇잎과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유난히 파란 하늘 아래에서 센 바람을 맞고 있었다.


2024년 11월 9일 토요일

성수동, 그리고

 

성수동에서 공연을 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에 걸어서 오고 가던 동네가 이젠 많이 변하여 처음 가보는 장소처럼 느껴졌다. 삼십 분 약속이 되어있던 공연은 한 시간을 채우고 나서 끝났다.

연주를 마치자마자 화양동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상태가 더 나빠져 있었다. 발과 다리가 부어 있었고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노인의 다리에 병원에서 썼던 스타킹을 신겼다. 그것으로 부종이 완화될 것 같진 않았다. 월요일에 방사전치료를 위한 진료가 예정되어 있는데 지금은 진료와 상담이 아니라 급히 입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늦은 시간에 돌아왔던 것도 아닌데, 자리가 부족하여 주차하는 데 오래 걸렸다. 악기를 들고 집으로 걷는데 머릿속이 복잡하였다.

2024년 11월 2일 토요일

영암에서 공연

 

전날부터 나주, 영암엔 비가 내렸다. 금요일엔 하루 종일 비가 오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야외에 설치된 무대 바닥은 흠뻑 젖어있었다. 사운드체크를 한 후 물기 많은 트랙을 한 번 걸어보았다. 날씨 때문에 관객이 많이 없겠지만 연주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귀를 틀어막은 인이어 덕분에 천막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음악 소리와 섞여서 듣기 좋았다.
사십여분 공연을 마친 후에 차 안에서 몸을 녹이니 잠깐 동안 덜덜 떨렸다. 가는 비가 부딪는 소리를 들으며 음악을 듣다가 충북을 지날 즈음 비가 내리지 않아 음악도 잠시 꺼두었다. 어둡고 고요한 고속도로가 친숙했다. 심야에 천안삼거리 휴게소에서 라면을 팔고 있는 것을 기억했다. 자정에 따뜻한 라면 한 그릇을 먹고 기운을 차려 집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