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25일 월요일

일상.


감기 기운으로 그런 것이었는지 속이 편하지 않았어서, 먹고 가라는 음식을 마다하고 굶은채 나갔었다. 배고픈 것은 견딜만했는데 거의 여덟 시간동안 소리에 시달렸더니 너무 피곤했다. 정신이 멍한채로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현관 앞에 줄줄이 나와 인사를 하는 고양이들을 차례로 쓰다듬어주고, 수건 한 장 들고 욕실 문을 열었더니 물감을 담았던 플라스틱 용기와 붓이 보였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집안을 둘러보니 그제서야 새로 색칠이 되어있는 집안의 구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물감이 묻은 붓과 색상을 얻은 집안을 보는 것, 한 그릇 따뜻한 밥처럼 기운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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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22일 금요일

감기.


아니나 다를까, 감기에 걸렸다.
어쩐지 올 겨울은 무사히 지나보내는가 했더니 역시 걸려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다. 나는 무척 조심했다. 바보처럼 보여지더라도 찬 바람을 피해보겠다고 몇 겹씩 껴입고 다녀보기도 했다. 다 소용없었다. 바이러스를 막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숨을 쉬지 않고 외출을 한다거나 무엇과도 접촉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것 뿐이리라. (그래도 걸릴 놈은 걸린다.)

몸이 아프다. 아프긴 아픈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이 정도는 뭐 예상했던 것이라는 느낌 정도이다.
잘 지내다가 단 한 주일 정도 극심하게 문란한 생활을 했던 결과였다. 밤을 새우고 낮에 잠깐 자고,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다시 밤새 깨어있다가 날이 밝으면 한꺼번에 몰아서 자버리는 짓을 며칠 했다. 소문을 들었는지 곧 감기가 찾아와 잘 있었느냐고 인사를 건네었다.
증상과 징후를 잘 기억했다가 대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이를 먹으면서 좋아지는 것이 있다면 비위가 강해진다거나 하는 일인가보다.
토악질이 나거나 혈압이 치솟아 쓰러지거나 할 정도의 일이 매일 매일 일어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담담하다. 그리고 더 많이 차분하다. 불과 몇 년 전에도 할 수 없었던, 무슨 꼴을 보아도 일단 껄껄 웃기 - 마저도 가능하다. 마음이 아프다고 하더라도 그저 아픈 것 아닐까 하는 생각뿐 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많이 자제하고 좀 더 넉넉해져보려고 애를 쓸 때엔 잘 되어지지 않더니, 더 없이 꼴 사나운 장면들을 매일 목도할 수 밖에 없는 시절이 오고나서야 오히려 냉정을 찾는 느낌이다.
앓고있는 사람들의 감기 정도야 곧 낫겠지만 지저분한 세상의 냄새들은 쉽게 사그러지지 않을 모양이다. 그러나 쉽게 화가 나지도 않고 별로 절박하지도 않다. 우선은 조용하게, 더 길게 바라보며 더 배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옳지 않은 일을 지켜보면서도 입을 닫고 뒷짐을 지는 것은 나쁘고 부끄럽다. 힘들게 살더라도 쪽팔리게 늙고 싶지 않다. 쪽팔리게 늙고 계신 분들을 많이 구경하면 이 정도는 배워질 수 있는 것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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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6일 토요일

어린이와 고양이.


앞니 한 개를 멀리 출장을 보낸 조카가 놀러왔었다.
조카 남매는 나를 힐끗 보고는 한 번 크게 웃어주고, 고개를 휙 돌려 소리를 지르며 고양이들을 부르는 일을 반복했다.
고양이들은 물론 이미 다 숨어있었다. 몸집이 작은 사람에게 관심이 생긴 한 마리만 빼고.



2008년 2월 11일 월요일

순이는 언제나 나와 함께.

순이는 스크린을 덮어둔 맥북을 방석 삼아 어슴푸레 새벽이 밝아 올 무렵 한참동안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고양이는 깔고 앉을 랩탑 컴퓨터의 규격에 잘 맞도록 몸을 접는 법을 익혀둔 모양이다.

내 것은 집안의 세 개의 맥북들중 가장 최근의 것으로, 이제 일 년이 되었다.
그런데 다른 두 개의 것들과 비교해보면 화면이 가장 어둡다.
순이가 깔고 앉은 것이 가장 오래되었는데, 화면은 가장 밝고 멀쩡하다.

순이는 졸리워서 꾸벅거리면서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앉아있으려 했다.
어릴적부터 언제나 항상 내 곁에 있어주는 고양이 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