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14일 목요일

조용한 리허설.

그곳의 했빛은 얄밉게도 내려쬐어서 그 뜨거운 오후의 햇살만 놓고 보자면 마치 태양은 영원히 초신성이 되지 않을 것 처럼 여겨졌다.

공연을 준비하고 있던 현지의 스탭들은 뙤약볕 아래에서 아무 말 없이 능숙한 동작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큰 야외극장은 너무 조용하고 고즈넉하여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졌다.


가끔씩 케이블을 던지거나 스피커를 옮기는 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서 그들의 몸에서 떨어지던 땀방울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리는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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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왔던 순이.


고양이 순이를 집에 남겨두고 내가 외국에 가있었던 동안의 모습이다.
순이에게 많이 설명을 해두고 떠나왔던 것이었지만, 고양이의 입장에서는 서운한 마음이 컸었나보다.

나는 집을 떠나있으면 반나절만 지나도 순이를 보고 싶어한다. 그것을 고양이 순이에게 말하며 이해를 부탁할 수 있다면 좋겠다.

여행에서 돌아와 순이를 껴안고 한참을 사과했다. 순이는 금세 마음이 풀렸는지 집안을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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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진 채로 외국의 식당에서.


불과 몇 개월전의 뉴욕에서는 대상없이 막연한 무엇인가를 그리워했었다.
그곳의 차가운 바람과 기온은 혼자 감상에 빠져드는 것을 방해했었다.
너무 추웠던 것이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와서 길을 걷다가 이 식당에 들어가 앉았던 그 오후에는 따뜻한 바람과 고요한 냄새들이 가득한 해변을 걷고 있었다. 그런 날씨라면 당연히 내일의 약속보다는 엊그제의 추억을 되씹게 된다. 한껏 고즈넉하고 무기력해졌었다.

불과 몇 개월전의 막연한 그리움이란 것은 결핍을 부정하려는 앙탈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현재하는 대상을 자주 보고싶어하고 있게 되었다. 집에 두고온 내 고양이 순이가 그리워졌다. 하지만 이제 전보다 덜 걱정할 수 있었다. 순이를 돌봐주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턱을 고인채 한참을 있다가, 곧 음식이 나오면 갑자기 곁에 그녀가 나타나 '어서 먹어'라고 말해주는 상상을 해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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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만났다.


로스앤젤레스의 변두리에 있는 대형상점 통로에서, 20여년만에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려보니 한 사람이 선뜻 내 이름을 부르지는 못한채 나를 바라보며 엉거주춤 서있었다.
이 친구는 중학시절의 동창생으로 십대의 시간을 드문 드문 함께 보낸 이후 전혀 만나지 못하고 지냈었다. 미리 알고 약속을 했던 것도 아닌데 우연히 엉뚱한 장소에서 마주쳤다. 서로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기 직전에 나는 그를 스윽 지나쳐서 무심히도 걸어갔다고 했다. 으음, 그럴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주 못알아본다.

우리는 마주 앉아 현재의 이야기를 지나온 이야기처럼 나눴다. 지나간 서로 모르는 각자의 일화들은 지금의 일처럼 툭툭 던지며 말할 수 있었다. 오래 전의 친구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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