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3일 목요일

매트릭스: 부활을 보았다.

 



극장에서 상영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 서둘러 가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시작할 즈음 다른 손님들이 몇 분 들어오긴 했지만 적어도 광고를 하고 있는 동안까지는 상영관 안에 나와 나 때문에 함께 따라와버린 아내 두 사람 뿐이었다. 이십년 전에 처음 나왔던 영화의 뜬금없는 새 시리즈를 관객들은 그다지 흥미있어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두 시간 동안 혼자 킬킬 웃으며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래리 워쵸스키 (모두 워쇼스키라고 하는데, 키아누 리브스가 인터뷰에서 '워쳐우스키'라고 하길래 나도...) 로 시리즈의 처음을 시작했던 감독은 이제 라나 워쵸스키가 되어서 마지막 시리즈를 내놓았다. 당시에는 형제였던 앤디 워쵸스키와 함께 세 편의 시리즈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자매가 된 그 릴리 워쵸스키 없이 이번엔 라나 워쵸스키 혼자 감독하였다. 나는 영화가 개봉하면 꼭 보러갈 생각으로 그 사이에 앞의 세 시리즈를 다시 보아뒀었다.



이십여년 전에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이 영화에 빠져들었던 나는 2003년에 마무리했던 세번째 시리즈 레볼루션의 결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 이후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 영화를 몇 번이나 다시 본 다음에야 그 이야기의 흐름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뭔가 끝내지 못한 결말을 보충해주는 마지막 회가 세상에 나와주기를 기다렸었다. 드디어 세상에 나온 네번째 시리즈를 나는 사용설명서를 미리 읽어둔 게임을 하는 것처럼 쉽게 따라가며 볼 수 있었다. 많이 웃고 아주 재미있었지만, 좌석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면서, 아이구 이 영화는 손익분기점까지 못 갈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너무 관객이 없으니 계속 의자에 붙어서 마지막까지 앉아있겠다고 떼를 쓰기엔 심야에 고생하는 직원들의 눈치가 보였다. 나중에 크레딧 뒤에 쿠키영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읽고 꺼지지 않은 스크린을 지나쳐 나온 것을 후회했다. 주차장에 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더니 이십대로 보이는 친구들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사기를 당한 기분인 듯 불평을 하고 있었다. '영화가 재미있었다'라고 끼어들었다가는 나쁜 경험을 할 것이 틀림없어서 나는 얌전히 볼일을 마치고 나왔다.

2021년 12월 20일 월요일

스티브 스왈로우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의 2020년 앨범 Swallow Tales를 한 해가 지난 이 즈음에야 듣고있었다.

기타리스트의 기타 트리오 편성 음반이지만 이 앨범의 주인공은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왈로우이다.  아홉개의 오리지널 곡은 모두 스티브 스왈로우 작곡이다. 믿음직한 드러머 빌 스튜어트의 완벽한 리듬연주 앞에서 선생과 학생으로 만나 수십년 동안 우정을 가꿔온 두 명인의 연주를 듣다보면 50여분이 언제 흘러갔는지 모른다. 세 사람의 연주는 튀어오르지도 너무 가라앉지도 않으면서 모든 곡에서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듣다보면 저절로 탄식이 나오는 순간이 많은 앨범이다.

세 사람은 같은 또래의 동료들은 아니다. 스티브 스왈로우는 '40년생, 존 스코필드는 '51년생, 빌 스튜어트는 '66년생이다. 스티브 스왈로우는 존 스코필드의 1980년 앨범 Bar Talk 이후 스코필드의 앨범 여서 일곱 장에서 베이스 연주를 했다. 빌 스튜어트는 스물 네살 때에 존 스코필드의 Meant To Be 앨범에 참여한 이후 스코필드의 앨범 열 다섯 장에서 함께 연주해왔다. 이 앨범은 스왈로우 선생님과 각별한 친분이 있는 존 스코필드가 오랜 세월 자기들끼리만 연주해보았던 스티브 스왈로우의 곡을 녹음하자고 제안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앨범 전체가 차분하고 정갈한 기분이 드는데 그것은 혹시 ECM에서 만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선곡과 연주가 담백하여 ECM에서 내기로 한 것일지도.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왈로우에게는 어떤 신비로움 같은 것이 있다. 그가 아주 젊은 시절에 이미 '잘 나가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그가 '70년대 중반 이후 악기를 바꿔 연주해온 것을 들으며 나이를 먹었다. 긴 세월 내내 그는 어떤 범주에 집어넣기 힘든 고유한 일렉트릭 베이스 연주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가진 일렉트릭 베이스기타에 관한 관점이나 생각에 동의하지 못한다. 굳이 새로 고안하여 이상한 모양의 악기를 완성하고 직접 연주하고 있는 것에도 나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의 연주를 따라해보거나 솔로를 듣고 베껴 연주해볼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 어느 음반에서나 그의 연주는 특별하다.  그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매순간 스왈로우 세계의 어떤 풍경이 새롭게 펼쳐진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triad 사용법이라던가, 그가 기타피크를 쥐고 탄현하는 길고 짧고 세고 여린 모든 음들이 들려주는 깊이라던가 하는 것은 다른 누구에게서도 들어볼 수 없는 소리이다. 나는 아마 그의 연주를 따라해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시도해볼 엄두를 내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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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2일 월요일

고마왔어요, 할머니.

 


내 외할머니. 스물 네살에 내 엄마를 낳았다. 내 엄마는 스물 네살에 나를 낳았다. 할머니는 마흔 여덟살에 외손주를 보았다. 그는 첫 손자인 나를 많이 귀여워했다.

나는 내 엄마의 부모,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못지 않게 나를 예뻐했다. 나에게 다정했던 외할아버지는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연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그는 갑자기 아내를 데리고 단둘이 남산에 놀러가자고 했단다. 계획도 없이 할머니의 손을 잡고 남산에 올라간 외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아내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외할머니는 그 기억을 언제나 행복하게 이야기했다. 그 사진은 외할머니 집에 항상 놓여있었다. 고운 옷을 입고 있는 흑백 사진 속의 중년 부부는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외할아버지가 로맨틱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할머니는 여생 동안 내내 일찍 자신을 떠나버린 남편을 그리워했다.

나는 육년 전 할머니의 생일에 이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할머니는 낙상을 하여 정형외과에 입원했었고 그 뒤로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 나중에는 요양병원에 계셔야 했다. 할머니는 지난 금요일 새벽에 급히 연락을 받고 달려간 큰 딸과 두 아들을 만난 후 돌아가셨다. 임종을 지킨 내 엄마에 따르면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에 감겨진 두 눈에서 양볼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길게 흘렀다고 했다.
가족 모두가 모여 사흘 동안 장례를 치렀다. 나는 할머니의 유골함을 가슴에 안고 할아버지가 묻힌 묘지로 갔다. 할아버지의 묘에 할머니의 유골이 합장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장례를 모두 마치고 돌아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꿈을 꿨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지저귀며 한참을 날고 있었다. 아마 내가 피아노 독주 음악을 틀어둔채로 자고 있었기 때문인가 하였다. 

아흔 아홉살 우리 할머니, 편안히 쉬셔요. 많이 고마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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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0일 수요일

지나가버린 가을.


 그동안 멈춰야했던 것을 앙갚음이라도 하듯 바쁘게 시월을 보내고 나서, 다시 학교의 일과 집안의 허드렛일들에 시간을 쓰다보니 그만 가을이 지나가버렸다.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 손과 얼굴을 씻으려는데 고양이 깜이가 내 곁에 뛰어올라와 쳐다보고 있었다.


아내가 만들어주고 사다준 장난감이며 쿠션들은 본체만체하고 고양이들은 저렇게 빈 종이상자를 오가며 놀고 있다. 날씨가 추워지니까 슬슬 사람 곁에 붙어서 잠을 자려고 한다. 올 가을은 단풍이 물들었는지 낙엽이 떨어졌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없어져버린 것 같다.

올 겨우살이도 고단할 것이고 큰 선거가 다가올수록 공해에 가까운 것들도 자주 보게 되겠지. 오래도록 그랬던 것처럼, 외출 후 집에 돌아오면 반겨주는 고양이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식구가 있다는 것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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