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13일 일요일
광화문에서.
수십만이라느니, 백만이 넘었다느니 하며 사람들은 숫자를 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종로에서 교보빌딩 모퉁이까지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밀려 걸어갔다. 그 넓은 장소에서 앞 뒤의 사람들과 몸이 닿은채로 몇 시간 동안 움직여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 청소년, 젊은이들, 어린이를 안은 여자와 남자들, 휠체어를 타거나 안내견의 도움을 받으며 걷던 맹인들 중 누구도 남을 밀치거나 소란을 피우거나 발을 밟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남한의 사람들은 원래 어깨를 부딪히거나 사람을 밀치거나 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아니었나, 했다.
아니나 다를까, 타인을 몸으로 밀고, 손을 뻗어 사람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사람들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전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떠들었고 아무 말이나 했다. 그러다가 만만해 보이는 상대를 보면 훈계질을 하거나 가르치려 들었다. 모두,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공감하지도 못하고 배우려 하지도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원래 그런 인간들이 나이를 먹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그들은 지금의 세상에 대하여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공손히 사죄하는 일이 먼저여야 옳지 않을까. 쓸데 없는 소리일테지만.
2016년 11월 3일 목요일
십일월이 되었다.
집에는 낡은 책이 많다.
서적을 구입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아침에 아내가 읽고 있던 책에 대해 말을 걸었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집에 읽을 책이 없어."
원래 그런 거다.
시디나 책이나 구입하고 모아 놓아도 문득 소파에 앉아서 듣거나 읽을 것이 없기 마련이다.
십일월이 되었다.
지난 일요일은 내 고양이 순이가 죽은지 백 일이 되었던 날이었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못했지만, 나는 혼자 강가에 나가서 순이를 떠나 보냈던 아침처럼 긴 의자에 앉아 강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의식을 치르거나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냥 마음 깊이 그리워했다.
십여년 전에 이사를 다니며 가지고 있던 책을 많이 처분해야 했다. 이제는 그것이 아깝게 여겨지지 않는다. 낡은 책은 버려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두 번 다시 펴 보지 않았을 책들이었다.
집안에 무엇을 더 채울 것이 아니라 하나 둘 씩 버리고 잊는 습관을 가져보겠다고 생각했다.
2016년 10월 25일 화요일
그리워했다.
꿈에서 순이를 보았다.
그리고 잠을 깨었다. 밖은 깜깜했다. 두 시 반이었다.
순이가 떠난지 아직 백일이 되지 않았다.
고양이 순이가 내 어깨에 볼을 기대고 그르릉 거리던 시절이, 어느 날에는 아득한 옛 일 같기도 했다. 어떤 아침에는 어제의 일 처럼 느껴졌다. 매일 꿈에서 고양이를 보았었다가 한 동안 꿈을 꾸지 않고 지냈다.
꿈 속에서 한 번도 내 고양이를 만지거나 다가가 안아 보지 못했다.
다시 꿈에서 만나게 되면 와락 다가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눈이라도 마주치면 이름을 부르며 웃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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