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23일 금요일

다음 공연을 벌써 기다리고 있다.


상승하고 있는 밴드의 분위기라고는 했지만, 지난 공연이 너무 즐거웠어서 그 후유증이 오래 가고 있다.
공연 끝난지 며칠 지나지 않아 벌써 다음 스케줄이 생기기를 바라고 있게 되었다.
진작 이랬어야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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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2일 목요일

서울을 다녔다.


머리를 아주 아주 짧게 깎고, 오랜만에 서울 시내를 쏘다녔다.
동대문, 종로의 골목길들, 인사동, 악기상가, 안국동과 삼청동의 뒷길, 그리고 지랄맞은 청계천, 청계천.

어두운 한 밤중에 여러 대의 '추럭'이 남녀노소의 사람들을 가득 싣고 와서는, 아무 것도 없는 깜깜한 언덕에 쓰레기를 버리듯 부려놓고 떠났다. 그것이 개발을 위해, 수도 서울의 미관을 위해 청계천에 거주하던 가난한 빈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던 이 나라의 '추진력'이었다. 그놈의 개발이라는 것을 해놓고 사람들을 떠나보낸 것도 아닌, 사람을 먼저 데려다 놓은 후에 알아서 개발을 하고 살으라고 하는.... 선이주 후개발이라는 창의성 가득한 일을 벌였던 것인데, 이런 사실들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는 거의 없다. 그들이 버려지듯 옮겨져야했던 곳은 경기도 광주, 지금의 성남이다.

20대의 시절에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인사동을 지나 종로길을 걸어가려면 보도에 까맣게 줄지어 앉은 전경들을 지나야했다. 말콤 엑스 책을 보고 마르크스라고 생각하여 가방을 빼앗아 검문했던 경찰도 있었다. 21세기의 서울 도심을 걸으면서 생각나지 않아도 좋을 그 시절이 저절로 떠올려지는 것이 답답했다.
오래된 골목 어귀에는 담쟁이가 늘어진채로 햇빛을 받으며 졸고 있었고, 대형 신문사의 전광판에는 끊임없이 정부의 광고가 비춰지고 있었다. 몇 시인가 싶어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오후 여덟 시에 청계천의 소라기둥에서 모이자고 하는 촛불집회 메세지가 도착해있었다.

2008년 5월 21일 수요일

함께 살아가기.

정리되지 않은 잡념들을 나열해보았다.

- 미국 시민인 이모님은 나와 내 동생에게 '속상하게하는 녀석들'이라고 했다. 동생이 첫째와 둘째 아이를 낳게 되었을 때에 미국에 '들어와서' 애를 낳고 가라고, 모든 것을 다 준비해주겠다고 그렇게도 힘주어 이야기했는데 말을 듣지 않더니, 오빠라고 하는 나 역시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한 녀석이구나, 라고 했다.

자신의 아기를 어느 곳에서 출산하는가라는 것은 전적으로 내 여동생 부부의 마음이니까 내가 뭐라고 할 것이 아니다. 다만 최소한 내 조카들이 으앙 하고 첫 울음을 터뜨렸던 곳이 이역만리의 그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에는 동생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다. 객쩍은 생각이긴 하지만, 워낙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한 나라가 되었으니까 나와 내 동생같은 사람들은 별종이거나 유별난 인간들로 보일지도 모른다. 내 기준으로는 미국 시민이 되어버린 내 이모가 안스럽다. 열흘 후에 그 분은 다시 '스테이츠'로 '들어가실'텐데, 부디 지난 달에 한국으로 '나오실' 때 처럼 예방주사를 네 개나 맞는다던가 하는 일을 겪지 않으시길. 미합중국의 모든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분의 정서가 가능한 상처입지 않으며 여생을 보낼 수 있으시길 바라면 되는 걸까.


- 어릴 적의 친구를 반가와한다, 라고 하는 분은 아름다운 우정을 지닌 분들이다. 나에게는 옛 친구라는 말처럼 섬뜩한 것이 없다. 그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계속 친구가 되어지고 싶은 대상들이 소중하다.
사고와 생활방식, 머리속의 가치관과 살아가는 태도를 다 묵인하며 옛 친구이니까 함께 어울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여간 비위가 좋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비위가 좋은 사람들이 아주 많거나 (이번에도) 내 인격형성이 비뚤게 되어있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될 것 같다.
서로의 생활이 달라 만나지 못하며 지내도 마음 속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는 우정이라는 것이 있고, 시시콜콜 옛 이야기를 나누며 언제라도 술과 고기를 나눠먹을 수 있다고 해도 그나마 말라 붙어있던 정마저 뚝 떨어지는 존재들이 있는 법인데, 참으로 마음도 여유롭고 비위도 세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 못하겠다.


- 루소는 자유와 평등과 우애를 말했다고 했다. 함께 살아가는데에 제일의 가치가 될만한 말들을 남겨주긴 했으나, 그것은 비현실적이어서 가치를 더 가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이 따뜻한 곳에 있기 위해서는 세상의 음울한 골목이 당연히 존재해야한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내 것과 남의 것은 결코 똑같은 무게일 수 없다는 것을 종교로 삼는 사람들과 우애를 나누며 살 수 있다면, 존 레논도 자신이 쓴 가사를 두고 머쓱해할지 모른다. 그것은 환상일 것 같다. 그런데도 간혹 끝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을 놓지 않고 그들에게 헌신하며 삶을 꾸려가는 분들을 보게 될 때면 나는 부끄럽고 난처하다. 나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하면서 입속에서 우물거리기만 하며 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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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실에서.

사진 : 니나

공연의 연속이었던 몇 주가 지나가고 나니 사람을 고생시키던 지독한 감기도 함께 지나가 버렸다.
공연장의 대기실에서도 계속 코를 풀고 기침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병원에 두 번이나 갔었고 심지어 약도 꼬박 꼬박 챙겨 먹어야했다. 이 달의 공연을 기억할 때에는 꼭 감기가 함께 생각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