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3일 수요일

병실에서

 

전날 저녁부터 새벽, 퇴원 수속을 할 때까지 환자는 계속 난동을 피웠다.

나는 꼬박 서른 여섯 시간 동안 깨어있어야 했다. 음식을 먹으면 졸음이 쏟아질까봐 굶었다.

거울을 보면 내 얼굴에서 잔주름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을 알게된다. 나는 나이 들었고 이제 늙기 시작한지 오래다. 내가 나이 든 것을 느낄 땐 내 부모가 늙어있는 사실이 뒤따라 떠오른다.

올해부터 내 모친은 부쩍 늙었다. 엄마를 만나면 더 지쳐보이는 어깨와 눈빛이 먼저 보인다. 엄마가 걷는 모습을 보면 끝나지 않은 고단함의 무게를 간신히 버티며 위태롭게 다른 발을 앞으로 옮기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주변에만 중력이 늘어난 것처럼, 작아진 몸이 무거워진 공간을 어쩔 수 없이 견디는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내 아버지 곁에서 하루 혹은 이틀을 시달리며 보낸 뒤에, 내 모습도 잠시 엄마의 모양처럼 보였다.

새벽에 예상했던 부친의 큰 난동이 벌어졌고, 나는 그동안 경험이 쌓인 덕분에 잘 대처할 수 있었다. 노인은 소란스럽고 추한 언동, 자기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었던 심각한 소동을 벌였다. 내가 오염된 환자복과 시트를 처리하고 돌아왔더니 노인이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발길질을 하며 에너지를 썼으니 노곤해진 모양이었다.

퇴원한 뒤에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는 길을 달려 부친을 집에 데려다 놓았다. 내 모친에게 다시 곤란한 어떤 것을 떠맡기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의 삶은 고단한데, 특별히 어떤 존재는 타인의 삶을 갉아 먹으며 생을 유지한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여섯 시간을 자고 깨어났다. 다음 주에 다시 부친을 데리고 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야하는 날짜를 달력에 표시해두고, 커피를 아주 진하게 내려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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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4일 월요일

Souverän M605 Tortoiseshell Black.

 


무려 5월 말에 해외 필기구점에서 주문했던 만년필이 도착했다. 값을 치른지 한 달 하고도 엿새 만이다.

올해의 'Special Edition' 으로,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잉크를 넣고 써보니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만족스럽다.

이 펜을 손에 쥐고있게 되기까지 사연이 많았다. 이쪽으로는 물정을 모르던 나로서는 생소한 경험들을 하기도 했다. 그 이야기들은 길지만 남들에게는 하찮은 일이어서 한번 죽 써보았다가 지웠다. 가지고 싶어했던 펜을 잇달아 두 자루나 샀고, 그것으로 앞에 있던 과정들의 피로는 사라졌다.

이 펜이 나오면서 펠리칸 만년필 매니아들이 입을 모아 배럴이 불투명하게 바뀐 것을 꾸짖기도 했다. 직접 만져보니 그들의 불평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백여년 동안 지속되었던 반투명한 잉크 뷰 챔버는 사라졌다. 피스톤 필러 방식의 펜이기 때문에 잉크를 넣을 때 제대로 충분히 잉크를 담았는지, 사용 중에는 잉크가 얼마나 남아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졌다.

그런데 사람은 적응하기 마련이니까 나에게는 그게 대수로운 일은 아닌 느낌이다. 펜을 오래 쓰다보면 미세한 중량의 차이를 느낄 수 있게 되어 아마 잉크가 바닥나기 전에 새로 채우거나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쓸모 없는 상상도 해보았다. 

성능도 좋고 보기도 참 좋다. 택배를 받은 직후 나는 아내에게 미리 준비해둔 긴 변명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아내는 끝까지 들어주는 대신 '이제 새 잉크도 사기 시작하겠군.'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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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9일 수요일

M200 Café Crème

 


갖고 싶었던 펠리칸 카페 크렘이 도착했다. 주문한지 열흘 만에 왔다. 나는 그것이 더 오래 걸릴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 펜은 7년 전에 출시되었던 한정판으로 지금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 M200 을 산다면 이 모델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구할 수가 없었다. 트위터에서 보았던 글에서는 작년 까지도 일본의 펜가게에서는 팔고 있었다고 했는데 내 검색 능력으로는 찾지 못했다. 이베이에는 중고 물건이 어쩌다 한 번 올라오기도 했지만 원하는 닙 사이즈가 아니거나 너무 낡아버린 것들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값을 비싸게 매겨 놓았다.
지난 주 월요일 새벽에 우연하게 새 제품으로 이 펜을 파는 곳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주문 결제가 끝나 있었다. 어떤 검색어를 거쳐 발견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디에도 모두 품절이라는데 왜 그곳에만 새 제품이 있었는지도 여전히 모르겠다. 아무튼 독일과 홍콩을 거쳐 온다고 하길래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고 있었고 어제 인천에 도착하여 택배 송장번호로 조회가 가능해졌었다. 그러더니 단숨에 배송. 우리나라, 빠르다.

펜은 많은 사람들의 리뷰 그대로 보기 좋고 쓰기 편하다. 캡을 포스팅 했을 때의 균형감도 좋고 스틸 닙이 미끄러지는 것도 유려하다. 색상도 디자인도 마음에 쏙 들었다. 잉크창과 피스톤 필러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엔트리 모델 라인으로 나온 제품이 이제는 구하기 힘들어 너무 비싼 값이 되어버렸다. 펠리칸은 스페셜 에디션이라고 했지 리미티드 에디션이라고 했던 적은 없으므로 언젠가 다시 만들어 주려나 하고 기대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적은 없었다. 손에 들어온 새 펜을 만지작 거리며 만일 이것이 언제든지 구입하기 쉬운 펜이었다면 내가 그렇게 홀린 듯 사버렸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만년필이고 뭐고 역시 중독에 약한 사람에겐 좀 치명적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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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8일 화요일

광양 성당


 


공연을 마치고 공항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어찌나 졸음이 쏟아지던지 음식을 먹으면서도 잠을 자고 싶었다. 대화하려 하면 발음이 뭉개졌다.
밥을 먹고 식당에서 나왔을 때 가까운 곳에 천주교 광양교회가 보였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저 종탑을 보아서 (종 같은 것이 있는지는 모른다) 기억하고 있었다. 사진으로 보았던 저 성당 안에 있는 조형물들이 아름답고 따뜻해 보여서 언젠가 한 번 방문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그냥 지나쳐 와야 했다.
비가 개인 하늘은 기지개를 켜는 듯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틀 사이 두 개의 공연을 잘 치르고 배부르게 저녁을 먹었더니 피곤이 몰려와 나도 하늘 마냥 늘어져 눕고만 싶었다.

오고 가는 길이 먼 일정들은 늘 힘이 든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더니 집에 돌아와 바닥에 길게 누워 잠깐 눈을 감고 있는 것 만으로 조금 나아졌다. 눈을 떠보니 고양이 깜이가 조용히 곁에 와서 나란히 누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아홉 시간 동안 잠을 잤다. 무슨 꿈을 꾸었는데 제주의 파란 하늘도 나왔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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