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0일 일요일

피곤했다

 


아내가 깨워줘서 겨우 일어났다. 나는 알람이 울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계획했던 시각에 밥을 먹고 제 때에 출발할 수 있었다. 날씨 좋은 토요일, 일요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원효대교를 넘어 여의도 그 동네에 도착했다. 정확히 이십년 전에 나는 그 동네의 지하 술집에 매일 밤 연주를 하러 다녔었다.

지어진지 42년이 된 방송사 건물. 어딘가 어수선하고 불안해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건물이 낡은 것과는 관계 없었다. 이 장소에 나는 여러 번 왔었다. 그것도 이제 이십년 전, 십오년 전의 일이 되었다.

약속 시간 삼십분 전에 모두 모였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은채로 대기실에 앉아서 네 시간을 보냈다. 작은 일도 망설이고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몰라서 당황하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방송사에는 항상 있다는 것이다. 오래 기다리는 것 쯤이야 방송사에서 일이 생기면 늘 겪는 일이다. 그것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원래는 Moollon 베이스를 사용하려고 수요일부터 그 악기를 꺼내어 연습하고 들고 다녔다. 새벽에 문득 어떤 생각이 나서 낮에 펜더 재즈로 바꿔 가지고 갔었다. 오늘 입은 셔츠의 색깔과 어울릴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당황했다. 악기의 상태가 나빠져 있었다. 네크가 많이 휘어 있어서 연주하는데 힘들었다. 그동안 귀찮아서 악기를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주는 단번에 마쳤다. 나는 갑자기 취재를 위해 급히 달려가야 하는 기자처럼 집으로 도망치듯 돌아왔다.

내일은 악기들을 닦고, 손질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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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일 금요일

커피


 

지금까지 내가 커피를 마신 후에도 잘 잠들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제 그것은 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알고보면 커피로 인한 각성 같은 것에 내 몸이 잘 버티기 때문에 잠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카페인에 내성이 생기고도 남았던 것이었고, 부족한 수면을 한꺼번에 보상하기 위해 그냥 쓰러져서 잠들었던 것이다. 제대로 잠들지 못하였던 요인 중에 확실히 커피의 영향이 있었다.

새 커피 콩을 살 때가 되어서, 이번에 처음으로 디카페인 원두를 사보았다. 한번도 먹어본 적 없는 낯선 것이어서 공부가 필요했다.

밤중에는 저지방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마셨다. 찬 음료를 마시지 않은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2022년 3월 29일 화요일

겸손해질 수 밖에

 


컴퓨터를 아예 끄고, 책상 위에 아이패드를 가로로 놓아 음악을 틀었다. 몇 주 동안 듣고있는 Romain Pilon의 앨범이다.

어제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30년 전 라이브 영상을 보았다. Joshua Redman이 막 데뷔하여 무서운 젊은이로 등장했을 무렵의 실황이었다. 크리스챤 맥브라이드, 브라이언 블레이드, 브래드 멜다우 들이 풋풋한 어린 모습으로 엄청난 연주를 하고 있었다. 크리스챤 맥브라이드는 플렛이 있는 네 줄 베이스를 치고 있었다. 잊고 지내던 베이스의 기본을 새로 구경했다. 어떻게 리듬을 연주하고 그것을 유지하는지, 화음과 리듬과 곡의 패턴을 훼손하지 않으며 음악적인 유희를 즐기는지,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낮에 밴드 합주를 했다. 밴드의 리더님은 조금 더 늙었고, 몇 곡의 키가 조금 변경되었다. 자기의 변한 목소리에 맞도록 바꾼 것일 게다. 키가 바뀌면 베이스의 선율이 다르게 들린다. 원래 하던대로 해버리면 음악이 너무 무거워지거나 밋밋하게 되어버릴 수도 있다. 밤중에 네 줄 베이스를 꺼내어 스무 곡 전체를 쳐보았다. 새로운 베이스 라인으로 연주하면 좋을 곡들을 골랐다. 합주를 할 때 노래와 악기 소리가 잘 섞이는지 확인하고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원래대로 할 것을 결정했다.

얼마 전에 John Scofield 가 앰프 두 개를 놓고 혼자 연주하는 영상을 봤었다. 노인이 된 그가 보여주는 연주는 완전히 농익어서 어쩐지 슬프게 들렸다. 말년의 클래식 피아니스트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종류의 슬픔이 있었다. 인간이 수십년 동안 매만져 완성해낸 최고의 기량과 정신. 그러나 완성에 가까와질수록 이제는 육체와 마음을 최고의 상태로 유지하는데에 남은 힘을 써서 버텨낼 뿐. 끝이 가까이에 다가온 늙은 인간의 무르익은 연주는 슬프고 아름답다. 겸손해질 수 밖에.


2022년 3월 24일 목요일

애정

 



고양이와 함께 살면 하루에 몇 번씩 신비한 경험을 한다.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가 얼마나 영리한지에 대하여 자주 말한다. 그게 중요한 이유가 뭔지 나는 모르겠다.

혹시 자기들이 영리하지 못하여서 개나 고양이가 사람이 이름을 부르면 알아듣는 것을 보고 똑똑하다고 감탄해주며 위안을 얻는 걸까. 다른 종의 동물과 주거를 함께 하며 고작 기뻐하는 일이 동물의 지능이라니, 지능에 결핍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 건가.

내가 고양이들과 살면서 경험하는 신비로운 일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종의 동물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애정을 표현할 때다. 밥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굳이 쓰다듬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애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다가와 떠나지 않는다.

일찍 죽어서 떠나버린 고양이 순이와 나는 특별한 관계였다. 그 고양이는 나에게, 나는 고양이에게 매일 애정을 표현했다. 고양이와 나만 기억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순이가 죽은지 벌써 오 년이 지났는데도, 자주 그 고양이의 갸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착각을 한다.

고양이 순이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나의 청승만은 아니다. 지금 함께 살고있는 고양이들이 발산하는 애정 덕분에 나는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순이와 꼼이를 가슴 안에서 떠올려 또 한번씩 느껴볼 수 있다.

지금 곁에 다가와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보다가, 내가 잠깐 품에 안고 어루만져줬더니 무릎 가까이에 몸을 말고 누워 잠든 검은 고양이. 고양이 깜이는 옛날에 순이가 그랬던 것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좋아한다는 표현을 한다. 동물과 함께 살면 매 순간 사랑을 빚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