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1일 목요일

Green Room


그린룸이라는 말의 기원은 이것 저것 추측되는 것이 많은데, 그 의견들이 다 그럴 듯하다.
어쨌든 그 의미는 출연자들이 분장실로 돌아갈 필요가 없이 잠시 휴식을 하거나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기 위해 머물 수 있도록 준비되어있는 방을 말한다.
그러니 '출연자 대기실'이라고 되어있는 우리말 이름(사실은 한자이름)이 적절하다. 물론 'Green' 색상으로 방을 꾸며둘 필요는 없다. 사진은 지난 주에 갔었던 방송사의 대기실이었다.

전에는 제법 돈들여 지어놓은 어느 지역 공연장의 무대 뒤에서 그린룸, 화이트룸, 오렌지룸 등이 적힌 방문들을 보았었다. 그리고 우리말로 각각 '분장실'이라고만 되어있었다. 그저 몇 개의 분장실을 구분하기 위해 적어둔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화이트룸은 잭 부르스가 만들고 에릭 클랩튼과 진저 베이커가 함께 연주했던 크림의 노래였다.
나는 이 노래만 들으면 경천 형님의 와우와우 소리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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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고양이의 삶.


지난 겨울, 베이스를 배우고 있는 학생 은지가 침착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새끼 고양이의 상태가 아무래도 심각하다는 것이었던가, 침착하지만 빠른 말투였다. 어쨌든 그런 내용이었다.
그의 친구 한 사람이 아주 작은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겠다고 해놓고서는, '여건상' 못 기르겠다며 은지에게 떠맡겼던 모양이었다. 몇 번 그 이야기를 들었고, 하루 정도 집에 맡아준 적도 있었다. 그중 한 마리는 너무 허약하고 힘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다.

결국 나와 아내는 깊은 밤중에 어린 학생과 그보다 한참 더 어린 고양이를 태우고 심야 동물병원으로 달려갔었다. 피검사를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던 새끼 고양이의 검사 결과는 생각보다 더 위중했었고, 살려내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무턱대고 데려와서 책임없이 남에게 떠맡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수의사의 설명을 들은 은지는 우리에게 고양이의 치료를 위해 동물병원에 입원시키고 싶다고 말했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단호한 음성이었고, 아내는 내가 의견을 묻기 위해 얼굴을 쳐다보자 이내 나를 계산대로 떠밀었었다. 졸지에 카드로 고양이의 입원비가 계산되어버렸다. 지출이 많았어서 조금 빠듯한 때였지만, 뭐 어떻게 되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너무 가느다란 발 끝에 큰 주사를 꽂은채로, 힘없는 눈빛의 새끼 고양이는 우리를 바라보며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틀 후에 새끼 고양이가 퇴원을 했고, 큰 고비는 넘겼으니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고양이를 입원시킨 다음 날에 나는 레슨을 마치고 은지에게, 돈 따위는 신경쓰지 않아도 좋으니 병원비 걱정말고 고양이를 잘 살려내렴, 이라고 말했었다. 그러자 학생은, "계산해주셨던 병원비를 드리려고 지금 가져왔는걸요"라고 하며 손에 쥔 것을 내밀었다. 주머니 속에 반으로 접혀있던 지폐에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어느날 내가 없는 사이에 은지가 고양이를 데리고 집에 방문했었다고 했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고양이가 팔팔해져서, 잠시도 쉬지 않고 장난하고 뛰어다니던 통에 촛점이 맞은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다고 했다. 비실거리던 눈빛은 반짝거리고 배는 잘 먹어서 빵빵해져있었다고 들었다. 두 여자는 오후 내내 고양이와 장난치며 보냈던 모양이었다. 아내는 그 사이 새끼 고양이를 모델삼아 인형을 한 개 만들어두었었다. 나란히 찍어둔 사진을 보니 우습다. 한참 지난 사진을 이제야 구경하면서 기분좋아하고 있었다. 이제 아프지 말고 재미있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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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하고 싶은 고양이.

먹고 자고 장난치느라 하루가 모자른 고양이 녀석.
정말 쉼 없이 놀고싶어한다.
불쌍한 인형 고양이 한 마리는 바닥에 기절해있었다.
아내가 만들어준 인형을 고양이 꼼은 물고 던지고 짓밟다가 가끔 머리를 베고 잠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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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6일 토요일

반가왔다.

사람을 만나고 친구로 여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주 얼굴을 본다거나 가까운 곳에서 늘 마주친다는 것은 습관이 되어버린 일상일 뿐일지도 모른다. 일 년에 한 번, 혹은 몇 해에 한 번, 전화 통화나 해본다거나 하는 사이일지라도 확 하고 반가움을 느끼게 되는 사람이 있다. 상대방의 본래의 모습과 상관없이 나 혼자서 꾸며놓은 호감이라고 해도. 
사람끼리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은 대충 그렇게 두리뭉실한, 이유가 부실한 감정의 털뭉치일지도 모른다. 여러번 감겨 단단해졌다가도 한 순간 풀어져버리고 만다거나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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