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일 수요일

희망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나때문에 깨었는지 아내가 다가와서, "고양이 깜이의 밥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지 말라" 는 핀잔을 주고 돌아갔다. 고양이 이지가 당뇨식이 아닌 사료를 자꾸 먹으려고 하고있어서 아내는 항상 그것에 신경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깜이가 배고프다며 보채는 바람에 잠을 깨어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고양이 밥그릇을 깜이에게 내어줬던 것이었다. 자기때문에 혼난 것인데 고양이는 모른체하며 슬그머니 사라지고 없었다.

새해 첫 대화를 고양이 밥그릇을 치우지 않은 것때문에 아내에게서 꾸중을 듣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수 없다. 아직도 한 달 전 비상계엄 사태의 여파로 틈만나면 뉴스속보를 훑어보고 있다. 재해, 인재, 참사, 무지하고 야만스런 언어를 듣고 보지 않는 일상이 오기를 희망한다. 나쁜놈들은 벌을 받고 억울한 이들이 명예를 되찾고 죄없는 사람들이 죽지않고 소수자들이 외면받지 않는 일상, 고양이 밥그릇이나 내다버리지 않은 재활용쓰레기같은 것때문에 혼나는 일상이 이어지는 새해가 되면 좋겠다.

2024년 12월 31일 화요일

2024년에 듣고 있던 음악들.


 올 1월은 로리 갤러거, 다이어 스트레이츠와 스모키를 들으며 시작했다. 중학생 무렵 카세트테이프로 듣고 있던 음악들을 다시 들으며 즐거워 했다. 일월 넷째 주에 한국에서 '애플뮤직 클래시컬'이 시작했다. 그 덕분에 올해엔 어느 때보다 클래시컬 음악을 많이 들었다. 마리아 주앙 피르스의 피아노는 일년 내내 듣고 있었다.

그리고 조 헨더슨의 1991년 앨범 The Standard Joe가 리마스터 되어 나왔다. 나는 군복무를 마친 뒤에 이 시디를 누군가에게 빌려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여 들었었다. 그 후로 처음 들어보았다. 이 앨범을 시작으로 조 헨더슨의 음반들을 몇 장 연거푸 듣고 있었다.


2월엔 빌 에반스를 한참 들었다. 카타르 아시안컵 축구중계를 보고 답답해지면 얼른 어두운 곳에 앉아서 이어폰으로 빌 에반스의 음반을 들었다. 그리고 파가니니 현악 4중주, 기타 2중주와 피아노 음악들을 들었다. 엘렌 그리모의 모차르트와 라흐마니노프, 쇼팽 연주, 가브리엘 포레, 올가 셰프스의 쇼팽 연주를 듣고 있었다.

2월 마지막 주엔 쿼텟 허드슨의 음반을 들었다. 이 앨범엔 밥 딜런, 조니 미첼, 지미 헨드릭스의 곡들과 잭 드죠넷, 존 스코필드의 곡 몇 개가 담겨 있다.

3월엔 마리아 주앙 피르스의 앨범들을 연이어 들었다. 그동안 굳이 꺼내어 듣지 않고 있었던 키스 자렛의 클래식 연주 앨범도 들었다. 손열음과 Svetlin Roussev,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를 들었다. 피아노 음악을 듣다가 오스카 피터슨의 앨범도 두어 장 들었다. 그 사이에 레드 제플린의 라이브를 나누어 들었다. Baden Powell, Ambrose Akinmusire, Julian Lage도 듣고 있었다. 
집에서 또 쓰러져 허리를 부여잡고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다니면서부터는 빌 에반스와 짐 홀의 Undercurrent 앨범도 집중하여 들었다. 그 음색과 질감이 진통제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았다.

4월에도 클래식 피아노 음악에 푹 빠져 지냈다. 여수와 울산에 다녀올 때엔 운전하며 짐 홀, 카라얀의 벨를린 필, 파가니니 쿼텟, 옐로우재킷, 바니 케슬을 들었다. 찰스 로이드, 그랜트 그린, 존 콜트레인 쿼텟, 제리 멀리건의 앨범도 들었다.
한의원에서 한 번 침을 맞을 땐 물리치료, 부항 등을 함께 하기 때문에 거의 오십여분이 지난다. 이달에도 계속 침을 맞으러 다니고 있었는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침상 위에 엎드려 있어보려고 시도했다가 그만 뒀었다. 한의원에서 틀어두는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몸에 찔러 둔 수십개의 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5월에 웨스 몽고메리가 목록 맨 위에 있는 이유는 애플뮤직에 있는 두 시간 십육분 짜리 앨범을 들었기 때문이다. 웨스 몽고메리는 정말 몸을 혹사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녹음을 많이 남겼다. 그래서 어느 것을 골라도 좋다, 라고는 해주기 어렵다. 물론 그가 연주한 것 중 제일 나쁜 것이라도 웬만한 연주자의 베스트 정도는 되겠지만, 두 시간 넘는 이 앨범은 딱 한 번만 듣고 말았다. 나머지는 아마 앨범 Full house를 재생한 시간일 것 같다.
이달엔 마이클 솅커 그룹, 스콜피언스와 주다스 프리스트도 들었다. 쿨 앤 더 갱, 드 바지도 들었었다. 맨날 옛 음악만 다시 듣고 있었던 봄이었다.


6월엔 13년 동안 타던 차를 폐차하고 갑자기 새차를 구입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대구, 군산, 인천에 다녀오는 길엔 그냥 배경음악처럼 클래식 피아노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다. 새차의 스피커가 너무 품질이 나빠서 장거리 운전을 하며 음악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냥 도로의 소음 속에 가끔씩 음악소리가 섞여 들리게 하는 데엔 피아노 음악이 알맞았다. 새차를 타고 지방공연을 하고 돌아와 제일 먼저 자동차 스피커를 교체했다. 포칼 스피커로 했는데, 좋은 선택이었다.

7월에 팻 메스니의 새앨범 MoonDial이 전부 공개됐다. 지난 해에 나왔던 Dream Box 의 연작이긴 하지만 그 느낌이 다르다. 여름이 다 지나갈 때까지 이 앨범을 자주 들었다. 그 외엔 케빈 유뱅크스, 바비 브룸, 퀸, 조지 벤슨, 바니 케슬을 듣고 있었다. 
여러 번 재생하진 않았지만 이달에 나왔던 인상적인 앨범은 Slash의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Orgy of the Damned였다. 블루스 앨범이고, 그의 기타 톤은 정말 멋졌다. 앨범 제목은 좀 민망했는데, 나처럼 취향이 저질인 사람이나 지레 민망해 하는 건가 보다, 했다. 그리고 애플 뮤직에서 앨범 그래픽을 굳이 움직여주는 기능이 이 앨범에서는 꽤 효과적이었다.

8월. 대전, 양산, 아산, 광주 등을 다니면서 음악을 많이 들었다. 심야에 집에 돌아오는 고속도로 위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다보면 한 시간 두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위 목록의 것들을 많이 들었지만, 그 외엔 레드 제플린의 라이브로 시작하여 역순으로 앨범을 한 장씩 듣고, 데이빗 커버데일 시절 딥 퍼플을 듣다가 메탈리카로 이어지곤 했다.
빌 에반스와 에디 고메즈의 듀오 앨범 Intuition은 1974년 녹음이라는데, 이번에 처음 들어보았다. 빌 에반스가 연주하는 Fender Rhodes 소리가 듣기 좋았다. 스티브 스왈로우의 Falling Grace가 여기에 있었다.
또 조 헨더슨의 Big Band, 옐로우 재킷의 Parallel Motion, Jackets XL도 들었다. 


9월엔 아버지가 수술을 위해 입원했다. 수술 전 검사를 위해 병원에 몇 번 갔다가, 수술 두 주 후엔 다시 병원에 모시고 가서 진료를 받고 왔다. 대전, 경주, 광명에 공연하러 다니면서, 음악을 듣지 않고 있던 적이 많았다. 멍한 상태로 있거나, 틈이 나면 짧은 시간 잠을 잤다. 이달엔 위 목록에 있는 것들이 들었던 음악 전부였을 것이다.


10월은 아주 바쁘게 지냈다. 구미에 갔다가 다음날 서울 올림픽 공원에, 바로 그 다음날엔 칠곡에 가서 연주했다. 클래식 음악은 이제 다시 미뤄두고 알 디 메올라의 새앨범, 찰리 헤이든, 키스 자렛, 제프로버 퓨젼, 폴 데스몬드, 예스, 길 샤함, 브랜포드 마살리스, 스틸리 댄, Fourplay를 들었다. 조 샘플의 Sample This 앨범도 들었다. 이 음악들은 소니 워크맨에 담겨 있기 때문에 데이터를 걱정하지 않고 자주 들었다. 에릭 클랩튼의 새앨범도 들었었다. 주말마다 공연을 하러 다니는 중에 주중엔 부모를 차에 태우고 여주에 다녀오거나 병원에 다녀왔다. 장거리 운전을 하고 나면 허리가 많이 아파서, 찜질기를 등허리에 대고 음악을 들으며 누워 있었다.


11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예기치 않았던 일이었다. 영암에 다녀와서 완전히 지쳐 누워있다가 며칠 후 병원에 모시고 가서 진료를 받을 때에 노인이 어딘가 안 좋아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뒤로 갑자기 위독해졌고 일주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이달에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없는데, 애플뮤직에서 정리해준 것을 보면 위의 것들을 저렇게 듣고 있었다고 했다. 일기장에 써둔 것 중엔 데이브 그루신, 덱스터 고든 같은 음악들도 있었다. 무엇에 기대고 싶은 마음에 음악을 마냥 틀어두고 있었나보다. 그런데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12월. 빌어먹을 자들이 내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 아버지 사망신고를 하고 온 다음날 밤 일이었다. 그 뒤로 한 달 내내 음악을 들은 것이 없다. 뉴스만 보았다. 거제도와 포항에 다녀올 때에도 유튜브로 뉴스와 시사방송만 보았다. 이틀 전엔 비행기 사고로 참사가 일어났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목숨을 잃었다. 분노, 상실감, 슬픔이 밤낮 없이 안개처럼 산과 강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2024년 12월 28일 토요일

송년 공연

올해의 끝 공연을 하기 위해 서둘러 공연장에 갔다. 어제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았더니 뭔가 개운해진 기분이어서 오늘은 기운 넘치게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허설을 하고 차에 가서 드러누워 쉬려고 했었다. 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연주 도중에 화장실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길까봐 입술이 마르고 있어도 참았다. 시트를 따뜻하게 하고 눈이라도 감고 쉬었으면 좋았을텐데, 그 사이 벌어진 소식이 궁금하여 뉴스를 검색했다. 권한대행을 하던 자를 국회에서 조금 전 탄핵시켰다는 것을 알았다. 헌법재판소에서 나온 발언과 검찰에서 나온 공소 요지도 빠르게 읽었다. 리허설 전에 비현실적으로 달러 대비 원화환율이 치솟고 있었는데, 총리 탄핵에 이어 민주당 대표의 담화문이 나온 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연주를 시작했는데 리허설 때 맞춰 놓았던 소리가 그대로 들리지 않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던 상현 씨에게 신호를 보냈는데, 그것을 잘 못 알아들은 그는 황급히 무대에 올라오더니 내 수신기만 다른 것으로 바꿔주고 번개처럼 내려가버렸다. 아, 이런...

이런 일로 스탭들을 연거푸 고생시키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인이어의 음량을 올리고 잘 들리지 않는 소리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연주했다. 몇 곡 지나가면 적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두 시간 반 공연을 다 마칠 때까지 적응해내진 못 했다. 뭐, 이런 일도 생길 수 있는 거다. 거기에 더하여, 한 곡에서는 아주 대차게 코드 한 개를 잘 못 눌러버렸다. 송년 음악회에서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다. 맙소사.

올해 마지막 공연을 마쳤다. 예정보다 시간을 초과하여 너무 늦게 끝이 났다. 커피를 살 곳이 있는지 살피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도로엔 차들이 많았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는데, 물론 주차할 자리 같은 건 없었다. 또 먼 곳 길가에 차를 세우고 터벅터벅 걸어왔다.

다음 주 새해 첫 공연은 제주도에서 하기로 되어있다. 예정된 공연이 곧 다가오기도 하고, 하루가 마치 일주일처럼 흐르고 있는 시절이어서 연말인지 연시인지 느낄 틈이 없다.







 

2024년 12월 23일 월요일

영등포 공연

매일 뉴스를 보고 국회상임위원회 중계를 챙겨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루에 쏟아지는 뉴스를 따라가기에도 벅찼다. 지난 달에 상을 치르고 이달엔 어처구니 없는 시국을 겪다 보니 가만히 앉아 음악을 들을 여유도 없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연습하며 통증을 줄이기 위해 스트레칭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등포 공연장에 도착하여 한 시간 동안 혼자 사운드 체크를 하고 연습을 했다. 새 베이스의 톤이 낯설어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멤버들이 모여 리허설을 한 시간 더 하고 이어서 두 시간 짜리 공연을 잘 마쳤다.

규모가 작은 극장이었지만 객석에 사람들이 가득 있었다. 지역 문화재단에서 주최하여 표값이 안 비쌌던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번엔 내 인이어를 잊지 않고 잘 챙겨 갔다. 좋은 음질로 소리를 들으며 불편하지 않게 연주할 수 있었다. 새 악기는 연주하기 편하고 조금 가벼워서 허리에 부담이 덜 했다. 하지만 결국 리허설부터 공연까지 네 시간 동안 악기를 메고 서 있었더니 공연을 마칠 즈음에는 다시 통증이 심했었다. 나는 공연이 끝난 뒤 극장 직원들이 객석을 마저 정리하기도 전에 악기를 챙겨 메고 주차장으로 갔다. 자동차 시트에 잠시 몸을 눕히고 쉬어야 했다.

토요일마다 일을 하느라 거리의 집회에 한 번도 나가지 못하였다. 사실 일이 없었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체력으로는 아스팔트 위에서 시간을 보내긴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공연을 하고 있던 그 시각에 광화문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극장 안을 메워준 청중들이 있어서 공연을 잘 할 수 있었던 것도 맞지만, 마음은 광화문 앞에 모여 있는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오늘은 그날 밤부터 만 이틀 동안 남태령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찾아 보고 읽고 있었다. 삼십여 시간 농민의 편에 서서 밤을 새우고 교대를 하며 자리를 지켜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과거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것이 맞긴 하지만 어쩐지 현상을 심드렁하게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 같기도 하여 부족하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남긴 영상과 글을 찾아 보다가 토요일에 우리 공연을 보고 갔던 사람의 글을 읽게 됐다. 그 분은 그날 광화문 집회에 참여했다가 일찌감치 예매했던 공연을 보러 왔었다고 했다. 나는 미안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금 이 시절에 이 공동체는 분명히, 젊은 여성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